어제와 그제는 미국 협력업체의 임원들이 내가 다니는 회사에 찾아왔었고, 나는 하루종일 그들과 회의를 해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왜곡된 영어 교육때문이겠지만, 나는 영문으로 된 글을 읽는 것에는 거부감이 별로 없으나 영어로 듣고 말하기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게다가 어제는 영어로 프리젠테이션까지 했으니... 이틀을 그렇게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더니, 집에 돌아갈 때 쯤이면 머리속은 하얀 백지상태가 되었다. 책이고 뭐고 음악이나 좀 듣다가 잠이나 자자... 모드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점은 내가 다니는 회사와 그들간의 관계가 소위 '갑-을'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갑'이므로, 영어 몇 마디 놓쳤다고, 내가 구사한 영어가 조금 썰렁하더라도, 별로 자괴감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을'이므로, 자기들이 말한 영어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못 알아들으면 몇 번이고 또박또박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잠시 그들과 우리 사이에 깔려 있는 묘한 역학관계의 층위를 들여다 보자. 가장 낮은 단계에서 인종이 다른 까닭에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미묘한 열등감/우월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 둘, 인도인 둘, 멕시칸 하나, 중국인 하나, 인종을 구분하기 어려운 싱가폴 사람 하나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 집단이었으므로, 인종에 따른 열등/우월감은 제로섬으로 상쇄되었다. (오해없길,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사회적인 편견의 학습에 따른 것이겠지만, 백인과 인도인을 보는 눈높이가 무의식중에 서로 다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단계에서 언어적 역학관계가 있다. 내가 다섯 마디를 말하면 그는 오십 마디를 말하고, 내가 문장 하나를 말하는 데 10초가 걸리지만 그는 2초가 걸린다면, 이 대화의 강자가 누군지는 뻔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던지는 'Sorry?'와 그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던지는 'Sorry?'의 의미 차이는 대단히 크다. 즉, 전자는 당신이 말한 것을 내가 알아 듣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이지만, 후자는 당신이 내가 알아 듣지 못하게 말해서 유감스럽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저께와 어제의 회의가 바로 그런 식이어서, 비유컨대 나의 영어가 돌도끼라면 그들의 영어는 스마트 폭탄이라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단계이자 가장 높은 층위의 역학관계가 바로 갑과 을의 관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갑'이고 그들의 회사는 '을'이다. 낮은 층위의 두 역학관계에서 그들이 제아무리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이 결정적인 층위에서 모든 게임은 뒤집힌다. 노란 피부색이나 왜소한 체구, 어버버거리는 영어 등은 그들 중 몇몇 덩치 좋은 백인들에게는 최소한 무시의 대상이거나 심하게 이야기하면 경멸 거리일 뿐이겠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밥그릇 크기를 결정짓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라면 그들은 지구를 반바퀴도는 수고를 감수하고 김치냄새 가득한 나라로 달려와서는 유치원다니는 자신의 자녀들이 구사하는 것보다도 유치해서 코웃음이 절로 나는 한심한 영어를 진지하고도 공손한 표정으로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말 한마디가 상대편 직원 몇 명의 모가지를 좌우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 관점에서는 자신의 언어가 공손한지 아니면 상스러운지, 자신의 말이 어법에 맞는지 혹은 개판에 가까운지, 이런 것들에 대해 그리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다. 내 말에 그들 모두는 감동했다는 듯 안습에 가까운 눈빛으로 열렬한 동감을 표하므로, 나의 영어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스스로 과대평가하여 비현실적인 자만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 영어 실력이 짧으면 짧을수록 타제석기와 같은 내 영어는 더 거칠게 그들 가슴에 야만적인 비수처럼 꽂히기도 한다.
긴 얘기를 썼지만, 미국의 그 협력업체와 일하면서 나 역시 권력의 달콤함에 익숙해지는 것같아 씁쓸하다. 그들의 오류를 성토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한편으론 후진 영어로 쪽팔리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의 성토에 아파하는 그들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서 얄궂은 쾌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