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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세트 - 전3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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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넘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의 5개월여간, 나의 지하철 퇴근길을 루이스 캐롤 풍의 기묘한 지적 판타지로 가득 채워주었던 <괴델, 에셔, 바흐>.(내가 읽었던 책은 영문판 원서였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 출판된 국문판은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다.) 지금, 이 777페이지짜리 대저작의 10년 짜리 먼지를 닦아 내서는, 만지작 거리고 여기저기 펴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호프스태터가 친절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세 번 쯤 꼬아서 철학과 수학과 컴퓨터 과학과 예술의 핵심을 꼬치처럼 관통시킨 '영원한 황금 실'의 뫼비우스적 트위스트를, 나는 충만한 경외감으로 바라보게 된다. 진중권씨 스스로도 고백했지만, <미학 오디세이>는 이 위대한 <괴델, 에셔, 바흐>의 대위법적 구성에 영향받은 바 크다. 괴델, 에셔, 바흐가 고스란히 등장하고,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그리 비중있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마그리트가 또 하나의 중요한 중심축인 것도 <괴델, 에셔, 바흐>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킬레스와 거북의 장난스럽지만 심오한 대화가 플라톤과 아리스의 교훈적인 만담으로 변용된 것은 물론이고.

그러니까 <미학 오디세이>는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일종의 '창조적 리바이벌'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동명의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미학 오디세이>는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원료로 했지만 장르와 주제와 느낌이 현저히 색다른 진중권식 <괴델, 에셔, 바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인 <괴델, 에셔, 바흐>의 독창성을 뛰어 넘기에는 힘이 부친다고 하더라도, <미학 오디세이>는 나름 장점이 많다. 일단 컬러풀한 그림이 많고 문체도 쉬운 편이어서 빠르게 읽힌다. 미학 전공 유학파의 내공에 진중권 특유의 꽉 찬 논리가 더해져서 미학 역사의 얼개가 탄탄하게 엮여 드러난다. 곳곳에 진중권식 개그가 스케르초 악장처럼 독자의 긴장을 이완시켜서 사변적이고 지루해지기 쉬운 미학 이론들의 뇌피질 안착을 돕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아, 개인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의 만담은 70년대 고춘자-장소팔 필이 물씬 풍기는 것이 적잖이 썰렁하긴 했지만 말이다.

<미학 오디세이>가 <괴델, 에셔, 바흐>와 가장 밑바탕에서('후경 분열의 법칙'에 따르자면 '이념의 층위'에서)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숭고'다. 숭고는, 저자를 인용하면, "인간은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 미"다. 그런데, 미를 인간이 알고 있던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미 그 자체도 인간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든다. "미란? 미적 지각의 대상. 미적 지각은? 미에 대한 지각! 예술이란?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한 대상. 예술계는? 예술에 자격을 부여하는 세계" <괴델, 에셔, 바흐>에서 호프스태터가 강조한 것도 이런 '이상한 고리'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에셔의 판화 <폭포>, 바흐의 <무한 상승 카논> 등과 같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기이한 고리.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이런 '이상한 고리'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의 불가해성을 은유하고 <미학 오디세이>에서는 미의 불가해성을 은유한다. 둘 모두 뫼비우스적 비틀림을 적용한 피드백이 궁극의 진리라고 소곤댄다. 컴퓨터 과학자 호프스태터는 정중하게, 미학-철학자 진중권은 다소 불온하게. 그런 측면에서 어찌보면 <미학 오디세이>의 숭고함이 <괴델, 에셔, 바흐>의 그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어차피 숭고할 바에는 번듯하고 깔끔하게 숭고한 것보다는 삐딱하고 기괴하게 숭고한 쪽이 더 멋지쟎은가? 그래서인지 저자는 <미학 오디세이> 3권을, 다소 말쑥한 에셔나 마그리트류의 초현실이 아닌, 피라네시의 깊고 음울한 초현실로 두텁게 회칠한다. 그리고는 숭고하고 영원한 황금실이 무참히 파괴해 버리고 남은 미의 원형의 폐허로 냉소적이며 얄궂은 미소를 머금고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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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 발 늦었네요.
오늘쯤 리뷰를 쓰려고 준비중이었는데요.
아마 저는 당분간 못 쓸것 같아요.
님의 글이 제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으니까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단어들이 새로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님의 글은
전혀 다른 또 한편의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멋져요,추천!

전자인간 2008-08-21 17:12   좋아요 0 | URL
제 글은 제 글일 뿐, 님의 글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요 근래 들었던 최고의 칭찬, 감사합니다.

딸기 2008-08-25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델이 나오는 책은 안 읽는다, 에셔가 나오는 책은 안 읽는데, 에라스무스 보슈의 그림 이야기가 나오는 책도 안 읽는다, 로저 펜로즈가 쓴 책은 안 읽는다...

그래서 저는 <괴델, 에셔, 바흐>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전자인간님은 잼나게 읽으셨나바요. 존경~ 존경~

전자인간 2008-08-25 09:03   좋아요 0 | URL
괴델, 에셔, 보슈, 펜로즈... 모두 제가 좋아하는 인물들이네요. ^^
제 기억에 의하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저 네 사람들 중에서 보슈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학 오디세이>에는 모두 등장하는군요! 딸기님의 기피대상 서적 1호네요!

딸기 2008-08-26 10:33   좋아요 0 | URL
푸하하 ^^
이렇게 취향이 갈리는군요. ㅋㅋㅋㅋㅋ
 
다중 -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하여 아우또노미아총서 5
빠올로 비르노 지음, 김상운 옮김 / 갈무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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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 책이 딛고 있는 견고한 구조물들과 그 위에 덧세워진 구조물로서의 해당 서적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구조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이리 저리 밀어 보고 두드려 보기도 한 후, 그 미학적 건축학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서적이 학문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런 이유로 나는 학술적인, 특히 사회과학과 관련된 책에 대한 서평을 꺼린다. 그 책의 하부토대를 이루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인 까닭에 저자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고, 따라서 해당 책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서평'하려는 책의 경우에도 사정은 그리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논지를 펴기 위해 끌어들인 정치/철학 사상가 - 맑스, 홉스, 스피노자,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기 드보르, 소쉬르, 시몽동, 벤야민, 칸트, 그리고 들뢰즈 - 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나 읽었더라도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과학을 전공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는 앞으로라도 그러한 사상가의 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단지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 그러나 몇몇 학인들과의 세미나를 통하여 수 주에 걸쳐 '성문종합영어' 보듯 연구하고 수차례 되읽는 동안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지금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려 한다.

네그리로 대표되는 아우토노미아(우리말로는 '자율주의' 쯤으로 번역되는) 운동이 '제국(empire)'과 함께 지적 세계에 유통시킨 유행어인 '다중(multitude)'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한 눈에 직관적으로 집약하여 파악하도록 하는 초광각렌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초광각렌즈를 통해 세상을 압축하여 볼 때 많은 왜곡과 세부사항에 대한 간과가 일어나기 쉬운 것처럼,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이라는 단 한마디에 담을 때에도 많은 오해와 편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컨데,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말에서 극단적인 무질서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개념이 전통적인 노동계급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에 유해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또 한명의 이론가인 빠올로 비르노(Paolo Virno)는 이 책을 통하여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고 다중 개념의 올바른 용례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 Grammar of the Multitude>(원제는 이태리어인데, 비슷한 뜻으로 보인다.)인 것은 그런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중 개념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술어(述語)들을 사용하였다. 다중의 세계에서 생산력을 담당하고 따라서 이윤을 창출해 내는 역량으로 이해되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 그리고 '일반지성'이라는 악보를 바탕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을 펼처가도록 하는 '탁월한 기예'라는 개념이 소개된다. 또한 전-개체적인 유(類)적 역량의 개체화이지만 전-개체적인 면과 개체화된 면이 공존하는 상태로서의 주체와 그 집합으로서 다중이 묘사되다가, 편의주의와 냉소주의, 그리고 잡담과 호기심이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개념이 다중의 특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잡탕스러운 술어들을 통하여 저자는 그야말로 '다중적인' 다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식의 서술은 저자가 바슐라르의 말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철학적 술어들을 통하여 적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양자역학과도 같은 다중의 모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개념을 퍼부어가며 저자가 설명하려는 다중은 헐크와 같은 양가성을 보인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개념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마치 지킬/하이드를 정신분석하는 정신분석가마냥 무척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비르노는 최소한의 흥분만을 띈 채 다음과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 - 다중은 혁명의 방아쇠나 뇌관이 될 수도 있지만, 현재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꼬뮤니즘화된 자본주의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중은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향한 원심력이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행정의 비대화라는 암을 부르는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보여준 <공산당 선언>과도 같은 용광로의 열기와 비교할 때, 같은 대상을 향한 비르노의 태도는 마치 뉴트리노를 설명하는 물리학자의 그것과도 같이 학구적이며 중립적으로 상온에서 맴돈다.

요컨대, 이 책을 통하여 저자 비르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스위스칼처럼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지닌 무기로서의 다중인데, 그는 그것이 '좋은 편'과 '나쁜 편' 중 어느 편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급진적인 좌파운동가로서의 저자가 중립적인 주심노릇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책을 관통하며 한 사람의 사상가를 꾸준히 소환하는데, <자본>의 저자로서가 아닌, <요강>의 저자로서의 맑스가 바로 그다. 실패한(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 기획자로서의 <자본>의 저자 맑스를 넘어서, 새로운 유토피아, 즉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꼬뮤니즘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이는 <요강>의 저자 맑스를 통해, 러시아에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혁명 - 그것은 일어난다면 아마도 68 혁명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 을 모색하는 것은 비르노와 같은 극좌파 반체제 혁명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조심한다. '다중을 이끄는 스탈린'을 염려했던 것일까? 아니, 그가 염려하고 무서워한 대상에 대한 보다 적절한 비유는 '스탈린이 된 다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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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8-03-31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방금, 겨울잠에서 깨어났습니다.

2008-03-31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4-0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가워요.
기다렸어요.

전자인간 2008-04-01 17:17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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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지젝의 조합은 언제나 이렇듯 전복적 쾌감을 주는 것일까? 최소한 알라딘 내에서는 'How to Read'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판매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수백 킬로미터의 속도감과 중력에 반할 때의 현기증으로, 매 페이지마다 한 번씩 뒤집히는 롤러코스터같다. 라캉과 지젝을 본격적으로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정신분석학적 놀이공원같은 이 책의 성격이 라캉과 지젝 중 누구에게서 주로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간혹 메스컴에서 눈에 띄는 그의 책에 대한 리뷰와 가장 유명한 알라디너 중 한 분인 로쟈님의 열정적인 소개에 힘입어, 그 성격 중 많은 부분이 지젝에게서 왔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매 장 처음에 등장하는 라캉의 원전과 그 외 부분의 비교이다. 지젝의 글이 르네 마그리트의 투명하고 명료한 초현실주의적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면, 라캉의 글은 무의미한 잉크 흘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잭슨 폴록의 추상화와 같다. 지젝의 글은 건빵처럼 텁텁한 라캉을 청량감 넘치는 복숭아향으로 전환하여 즉자적으로 뇌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힘이 있다. 많은 지적 독자가 반할 만한 현대적 덕목. 말하자면 이 책은 지젝이 현대 인문/사회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파퓰러한 위치를 보여주는 스냅샷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의외의 곳에 숨어 있다. 바로 역자 후기. 수십 번 전복되다시피하는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의 사파리 짚차를, 역자는 측면에서 코뿔소처럼 강하게 들이받아 끝내 뒤집어 버리고 만다. 후기에서 한참을 라캉과 지젝에 대해 비판적으로 써내려 간 역자는, 마침내 "리비도적 충동으로서의 욕망! 한 번 더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필요하다."고 라캉 없는 프로이트를 구호처럼 부르짖기에 이른다. 어째서 역자는 자신이 공들여 번역한 책의 주제를 완전히 뒤엎는 후기를 쓴 것일까? 아니, 어째서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한 것일까? 수유+너머의 '안티-오이디푸스' 강의에서 역자가 라캉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잠깐 비췄던 것이 떠오른다. 그 때 그는 라캉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했었다. 또한 지젝에 대한 비판도 떠오른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지젝을 '한 때의 유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때 이미 지젝의 다른 책(<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을 번역했었고, 지젝에 대한 책(<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도 번역한 바 있지만, '어떻게 지젝을 번역한 사람이 지젝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또, 그는 지젝을, 그리고 라캉을 번역했다. 이는 "환상적 악몽의 공포를 회피하는 방법으로서 이행",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지배하는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를 몸소 보여준 것인가?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끔찍스러운 성적 환상의 악몽에서 깨어난 톰과 니콜이 '섹스'라는 해법을 제시한 것처럼, 역자도 라캉과 지젝의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전복적 후기'라는 이행을 감행한 것인가?

결국 이 책은 두 메시지가 기묘하게 공존한다. 'How to Read 라캉'과 'Don't Read 라캉'. 더 기묘한 것은, 역자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도, 지젝이나 라캉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도, 모두 이 책을 흥미로워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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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7-09-18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책 찜해놨는데,,요즘 읽을게 넘 많아서
곁눈질도 못주고 있어요.
님의 리뷰로 읽고 싶어졌어욥!!!ㅎㅎ

전자인간 2007-09-18 18:27   좋아요 0 | URL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라캉 원전 대목에서 조금 막히기는 합니다만... :)
라캉, 지젝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길..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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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 사이에서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많은 명제들 중에서도, '혁명같은 사회 변혁기에는 강력한 지도자의 독재가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은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는 진부한 격언에 비춰보거나 스탈린 또는 모택동의 사례를 볼 때는, 혁명 후의 첫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강력한 지도력으로 일정 기간 밀어붙이지 않고서 혁명이란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즉, 이런 의문들 말이다. - 로베스피에르 없이 프랑스 혁명이 수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카스트로의 장기집권 없이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조금 다른 의미일 수는 있어도,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연적 또는 필수적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 하나 답하기 어려운 명제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혁명 이후가 그 이전에 비해 풍요로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또는 주변의 강력한 제국주의 때문인가?'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가 혁명 이후에 엄청난 고도 성장을 이뤘고 결국 고도 산업국가가 되었던 것을 보면, 혁명이 민중을 배고프게 하기는 커녕 훨씬 풍요롭게 한다고 봐야 하겠지만, 혁명이후 두어 세대만에 벌어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혁명의 비교열위를 나타낸다고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소련 체제는 혁명이 지향했던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바 경제가 낙후한 이유는? 쿠바가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룩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같은 수퍼파워가 금수조처를 취해서 무역으로 인한 부의 창출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쿠바가 그나마 이만한 복지를 갖추고 버텨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 생각된다.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리라. '주위에 미국같은 훼방꾼이 없고 인접한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과 사회주의적 무역이 가능했다면, 쿠바는 진정한 민중들의 지상낙원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란 없기에 역사적으로는 무의미한 추측이지만, 대단히 도발적이고 파괴력 있는 정치적 수사일 수는 있다.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고서 느꼈던 당혹감은 바로 전술한 두 가지 명제가 내포하는 당혹감과 일맥상통한다. 그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차베스의 혁명은 초기의 강력하지만 건강한 권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차베스의 혁명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막강한 도전을 꿋꿋이 이겨내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전자는 혁명 내적인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 후자는 혁명 외적인 방해세력에 대한 조바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볼리바리안 혁명은 민중이 지켜낸 혁명이므로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최소화될 수 있으며, 정당성이 담보된 혁명은 중남미에 혁명의 도미노와 거대한 연대를 이루어 낼 것이므로 방해세력에 대한 조바심도 최소화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다.

저자들의 자신만만한 주장처럼 볼리바리안 혁명은 지속가능한 것일까? 전술한 두 가지 명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좌파의 견해, 즉 '외부로부터 교란받지 않는 진정한 사회주의적 혁명은 자본주의보다 비교우위에 있지만 (그것이 꼭 경제적인 효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님),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적 독재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차베스의 혁명이 조금은 위태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차베스가 장기 집권 전략을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아옌데의 칠레 좌파 정권이 미국이 배후에 있는 쿠데타에 당했듯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리바리안 혁명의 현재까지의 모습은 희망적이다. 국영석유회사(PDVSA) 수익을 바탕으로 한 '미션 로빈슨', '미션 리바스', '미션 수크레' 등의 빈민 교육 개혁, 그리고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라는 무상의료 제도의 도입이 보여주듯, 그 혁명은 매우 순수하게 민중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만명의 의료인을 지원해 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 제 2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진행중인 에보 모랄레스의 볼리비아 등, 미국과 맞짱뜰 수 있는 좌파 연대가 점점 세를 불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베네수엘라가 지속가능하고 전염성 강한 진짜 혁명을 완수하여 내 가슴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의구심과 조바심을 일소해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은 그러한 희망을 불순물없이 열정적으로 농축하여 독자의 가슴에 심어 놓는다. 그 순진하리만치 높은 순도가 우려스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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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2007-07-2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중의 독재, 필요하다]


베네주엘라에서 볼리바리안 혁명이 가능했던것은
민중이 베네주엘라 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었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에서 사회변혁이 성공한 후에도 그 성과를 이어가자면,
여전히 민중을 그 변혁운동의 주인으로 세우는 계속적인 개혁과 혁명적 조치들의 필요한 것이겠죠.
그 내용은 여러가지 있을 것입니다.
남미에서 반제국주의 공동 연대전선을 구축하는 문제, 내부의 개혁과제, 자기 대오를 정비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이어가는 문제, 낡은 반변혁세력의 공격을 방어하는 문제, 경제문제 등 책임질 문제가 많겠지요.
그런 걸 책임지기 위해선 민중의 독재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중의 독재는 자본가를 억압하고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지
1인의(또는 일단의 정치세력) 정치강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과정은 민주적인 의사수렴과 민중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전자인간님이 흔히 자본가들이 이야기하는 대립구도:
자본주의는 민주적이고
사회주의는 독재적이라....는 그들의 편견과 주장에 포로가 된 것은 아닌지?


혁명이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그들이 단지 정권을 바꾼게 아니라, 누대에 걸쳐 지속되어온 가진 자들의 질서와 체계를
완전히 뒤엎은 것이기에 레볼루션이라 하지 않을까요???

그걸 완강하게 지키자면 민중의 독재- 민중성을 기반으로한 정권창출, 통치행위, 반민중세력에 대한 민중의 독재-는 필연입니다.

그리고 너무 조바심치지 마세요.
아무리 나빠도 지금보다는 낫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면 어떨까요?

천성이 낙천적이지 못한 저이지만
...운동하면서 그나마 낙관적으로 살아갈수 있는건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낫다'는 확신과
또 '그럴 때까지 내가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거든요.

전자인간 2007-07-2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가들이 심은 편견의 포로가 된 것은 물론 아니고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베네수엘라 혁명이 민중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차베스에 의한 혁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스탈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저 역시 러시아의 혁명이 민중에 의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스탈린에 힘이 집중된 결과, 결국은 스탈린에 의한, 스탈린을 위한 혁명으로 모양새가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우려는 이런 것이고, 그것은 천성적으로 노파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에서도 썼지만, 아직까지 베네수엘라는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

하늘지기 2007-08-1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제 책상위에서 몇달째 뒹굴고만 있어요^^

전자인간 2007-08-17 10:20   좋아요 0 | URL
맘만 먹으면 하룻밤만에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매끄럽게 읽히는 책은 아니긴 합니다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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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맥주 한 파인트를 들고 머리가 둘 달린 토끼를 쫓아 가다가 뒤죽박죽 무정부적인 우주를 헤메고 나서 냉소적인 표정을 머금고 썼을 법한 소설. 플롯이란 것 자체가 이 소설이 조롱하듯 풍자하는 대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연성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를 거부하며 벌어지는 SF. 자기모순적이고 우스꽝스럽지만 스스로를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표현, 즉 '갈수록 부적절한 제목인 히치하이커 삼부작의 다섯번째 책(The fifth book in the increasingly inaccurately named Hitchhiker's Trilogy)'이 표지에 인쇄되었던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약어는 HHGTTG 또는 H2G2, 이하 '안내서')를 쓴 더글라스 아담스 (Douglas Adams)는 코믹 SF계의 셰익스피어다. 그의 모든 문장은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키면서도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바로크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만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한 번 보자.(실제로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적는 것이다.) - '아서는 하마터면, 어느 날 밤 벽난로 옆에서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서 린다(폴 매카트니의 아내)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인세 수입으로 다음에 뭘 살까, 아무래도 에식스 지방을 통째로 사는 게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폴 매카트니를 상상할 뻔했다.', '아서와 트릴리언은, 심야의 도로에서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헤드라이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노려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토끼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디오 코미디 방송으로 1978년 처음 선보인 <안내서>는 라디오에서 시작된 폭발적이고 매니아적인 인기에 힘입어 1979년부터 1992년까지 5권의 소설으로 쓰여지게 된다. 사실 <안내서>는 라디오 코미디나 SF 소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러 미디어에서 각색된 바 있다. - 수많은 연극, TV 시리즈, 컴퓨터 게임, (우리가 잘 아는) 헐리우드 영화, 그리고 두 종의 '타월 시리즈'. 이것은 <안내서>가 전세계 맥도널드 매장마다 제다이 그림이 그려진 컵을 뿌려댔던 <스타워즈>나, 현대의 가장 큰 컬트 현상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 <스타트렉>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어 모은 SF 시리즈임을 뜻한다.

하지만 <스타워즈>, <스타 트렉> 등의 비교적 평범한 SF와 비교하기에는 <안내서>는 그 색깔이 너무나도 독특하고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렇다고 필립 K. 딕이나 아서 클라크, 어슐러 르 귄 등 거장들의 꼼꼼하고 단단한 SF와 비교하기에 <안내서>는 너무나도 성기고 자유롭다. 뭐랄까, 백남준의 '헐렁함'과 니체의 염세적 형이상학, 샤갈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제이 리노 쇼의 수다스러움을 블렌딩해서 '아무 이유없이' 허무하게 빚어 낸 슈뢰기랄까?

이 책은 구매만 해 놓고 읽기 전에, 나의 다른 글에서 '최강의 뽀대'라고 추천한 적이 있다.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그 추천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의 서재에서 이 책은 전화번호부 따위(그것도 요즘의 얄상하게 다이어트된 동네 업종별 전화번호부 말고, 한 때 서울의 집집마다 비치하고 있던, 상하권으로 나뉘어진 서울 인명부 전화번호부)는 가볍게 제압하는 늠름한 두께(1235 페이지)와 재기발랄한 소설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별자리 폰트로 장식된 깜찍한 책표지로 '가장 사랑스러운 도서 콜렉션'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단, 이제 그 추천이 계속 공표되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모든 사람을 만족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오덕후'스러운 내용과 서술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이 리뷰를 빌어 이 책을 사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고하려 한다.

"당신이 다음 중 하나에 해당한다면 이 책을 구입하는 것을 자제하기 바랍니다."

1.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영화판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
  - <안내서>의 영화판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무정부적 요소가 상당부분 탈색된 버젼이기는 하지만, 그 황당함은 꽤 잘 살아 있다.

2. 행성 하나 용량의 두뇌를 갖고 있지만 우울증을 앓는 로봇에는 관심이 없다.
  - 결단코 '마빈'은 이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이토록 애착이 가는 투덜거림은 들어본 적이 없다!

3. '불가능 확률 추진기'나 '나쁜 소문을 추동력으로 사용하는 우주선' 같은 개념은 개소리다.
  - 이 책은 개소리의 연속이다. ^^

4. 지구가 파괴되는 결말은 죽어도 싫다.
  - 내 기억으론 지구가 최소한 두 번은 파괴된다!

5. 소설은 개연성이 생명이다.
  - '개연성 제로'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차례를 옮겨 본다. 차례 한 페이지만 읽어도 이 책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내서에 대한 안내 | 작가가 말하는 별 도움 안 되는 이야기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젊은 자포드 안전하게 처리하다
  대체로 무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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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7-2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의 소설은 읽기가 쉽지 않아요.
플롯도 지켜지지 않고, 대화체도 제 맘대로 써버리고,
소재도 놀랍구요.
그래서 베스트 셀러중에서 고르고 골라 읽다가 실망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지요.
독자들이 그런걸 원해서 그렇게 쓰는건지,
작가들의 지향이 그런건지 모르겠어요.
웬지 비주류로 밀리는 느낌....이 요즘 나오는 책을 볼 때마다 들어요.

그런데,이 책 재밌나요?

전자인간 2008-07-29 11:27   좋아요 0 | URL
사실, <안내서>는 그리 '최근'이란 말이 어울리는 소설은 아닙니다만, 저는 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최근의 소설'에 더 몰입이 되더라구요.

암튼, 이 책, 저는 재밌었습니다.
님은 왠지 별로 재미없어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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