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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 사랑의 화인이 마음 깊은 곳에 아프게 새겨졌던 오래전 그 밤, 더 이상 과거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은 마주침이었고, 실연은 감당키 어려운 낯선 감정이었다. 사랑은 존재를 바꾸는 몸부림이었다. 다시는 사랑 이전의 내가 될 수 없는 변혁이었다.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책’이 자리를 잡았다. 시공을 초월해서 마주쳤던 저자의 사상(思想)을 빠져나오는 순간,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는 ‘나’와 마주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의 세계로 빠져 들듯,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스물에 해독 불능의 암호 같은 마르크스의 원전과 해설서를 넘나들던 혼돈의 겨울밤이 있었다. 사회생활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혼란의 시대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발견한 자기배려의 윤리로 내 삶을 지켜냈다.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던 오만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일상을 의심하고, 반추하며 미시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종속된 자신을 도처에서 발견했던 시절이었다.

 

수줍게 ‘성장’이라고 여겼던 그 감정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사사키 아타루는 ‘혁명’이라고 말한다. 현대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인 사사키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개혁가와 문학가, 철학가를 통해 ‘책이 곧 혁명’임을 주장한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재에 기대어야 책이 쉽게 읽힌다. 귀 기울여 경청하듯 사사키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내 안의 개별적인 추억의 경험을 호출한다. 사사키의 추종자가 될 의사가 없었으나, 그의 책을 이미 읽어버렸으니 돌이킬 수는 없다. 사사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읽고 말았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언어(개념)의 차용이고, 그것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이며, 새로운 세계를 수태(잉태)하여 생명을 낳는 과정이다. 텍스트와 텍스트는 서로를 마주하며 새롭게 창조된다. “한 단어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번역가의 발가벗는 책읽기 방식이 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는 방법도 있다. 두 방식은 모두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연결된다.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쓰는 행위는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다행인 것은 고통을 넘어설 때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학의 승리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는 신(神) 조차 선망하는 일이다. 정보의 명령에 따르는 노예화에 반(反)하여,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문학은 세계를 변혁한다. 둘째, 루터는 문학자이기에 혁명가이다.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루터에게 독서는 기도였고, 시련이었다. 신에게 말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므로, 언어는 하나의 행위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일 뿐, 본체는 텍스트다. 셋째,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신(神)의 말씀을 읽는다. 대천사는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게 한다. 문맹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불안을 낮추도록 용기를 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아내 하디자였다. 이슬람의 최초의 신도는 하디자와 그들의 딸들이었다. 문맹을 극복하고 무함마드는 <코란>을 잉태한다. 넷째, 우리는 이미 읽어버렸다면,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역사적으로 앎이 어떻게 통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문자를 쓰는 것이 특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학은 우리 삶을 통제하는 정보와 구별되어야 한다. 다섯째, 도처에 문학의 사망을 선언하는 말들이 넘실거린다. 이것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이다.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지 20만 가량이 지났다. 한 생물종의 평균 수명이 400만년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아직 돌잔치도 치르지 않았다. 인류에 의해 발명된 지 고작 5,000년인 문학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380만년의 영원할 것이다.

 

기도하는 손은 책을 읽는 손이 되어서 혁명을 꿈꾼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와 독특한 문체로 쓰여 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보여준다. 일본 출판계를 뒤흔들었다던 사사키의 『야전과 영원』의 출판이 은근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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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글로벌 트래킹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일생에 걸친 사회학 여행기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은 현존하는 사회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꼽히는 피터 버거의 지적인 농담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사회학자로 팔순을 넘긴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자신의 사회학 이론과 종교사회학, 지식사회학, 현상학적 사회학에서 남긴 궤적을 회고하는 자서전이다. 『사회학에의 초대』로 피터 버거를 만났던 독자는 자신의 청춘의 한 지점을 되돌아보는 약간의 감상도 곁들이게 되는 책이다.

 

거의 한 세기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로 보낸 팔순 노학자가 삶의 뒤안길에서 쏟아내는 이야기는 탐험가의 기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도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일은 자신의 삶의 과정을 지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피터 버거는 당파성을 부정하지 않고,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펼쳐간다.

 

사회학가 되는 ‘우연의 과정’에서부터, 세상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느꼈던 흥분을 낱낱이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어메리칸이 된 피터 버거는 루터파 사제가 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막 이주한 미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학을 배우게 되었다. 우연하게 시작된 사회학과의 만남은 평생에 걸친 학자의 길로 이어졌다.

 

우연히, 실수로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것은 유쾌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마지막 페이지의 장난감 전차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선물해준 전차 장난감에서 피터 버거가 느낀 호기심은 기차가 레일을 달린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타고 있을 승객들이었다는 점이다.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년은 사회학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사례 발표다.

 

피터 버거는 사회학자로서 심심할 겨를 없이 인간이 모여 살며 만드는 현상을 연구해왔다.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이 사회학을 지루한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량적 연구만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와 이데올로기 구호로 선동의 역할에만 치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질병과도 같은 사회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연구 방법이 바로 ‘사회학적 관광’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현장에서 경험한 사례를 분석의 기초로 삼았다.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강단 사회학자로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트레킹 사회학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사회학적 방법론인 ‘사회학적 관광’으로 온 세계를 탐험했다.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자전적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사회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커피를 앞에 두고 대화하고, 모임을 만들고, 연구를 하고,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커피 하우스’라는 방법론을 선택하였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가 내린 결론 언저리에서 얻은 답은 “이 사회는 인간이 만든 세계이므로 우연적이며 유동적이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행위가 일어나기 전의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방어기제가 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서전은 자기 변명과 옹호로 일관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피터 버거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본주의와 근대 계몽주의를 끝까지 고수하고, 종교와 사회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 ‘방법론적 무신론’을 채택하는 버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진보적인 경제학자도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보다 덜 진보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피터 버거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다. 그가 하버드신학대학원생과 런던정치경제대 학생들과 갈등을 겪는 부분을 읽으면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긴장 보다는 보수 꼴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럼에도 이 책의 최고의 미덕은 독자가 느끼게 될 적당한 심리적 무게감이다.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으나 경박하지 않고, 사회학 이론과 만나는 과정이 의미 있게 기록되었으나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다. 그가 사회학을 정의하는 방식 또한 신선하고 명쾌하다. “사회학은 인간 세상의 거대한 파노라마에 변함없이 끌리는 사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는 사람, 그래서 필요하다면 열쇠 구멍이라도 들여다보고 남의 편지라도 훔쳐보는 사람에게 매우 적합한 학문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나와 만나는 관계성에 대한 성찰적 사유 없이 사회학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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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3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엇보다 피터 버거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 점이나 시도들을 높이 샀어요.
어깨에 힘을 빼고 좀저 가까이 유머스러하게 다가섰다는 점이죠.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나와 만나는 관계성에 대한 성찰적 사유 없이 사회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마지막 문장에 빚대어 보자면 피터 버거는 어느 정도 접근하지 않았나 싶어요.

무척 덥네요..어떻게 지내고 계세요?,,저는 숲으로 떠나고 싶어요.. 바다 가까이 살고는 있지만 바닷가 나갔다가는 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구마구 밀려오네요.
저는 본디 숲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계곡물에 탁족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맴맴맴...아 급 행복해지네요...^^

더불어숲 2012-08-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자가가 보수적이기는...너무도 힘든 일인데, 피터 버거 안의 종교의 힘일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가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은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가 사라진 도처에서 종교가 되어 있는 것...
판단 중지 상태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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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입 장마는 1월 폭설만큼이나 독서하기 좋은 조건입니다.

아스팔트 빗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들릴만큼 정적 가득한 심야,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의미있는 일을 찾기도 어렵겠지요?

앉아서 여행하는 독서로 의미있는 7월이 되길 바라며, '책을 위한 책'을 추천합니다.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 - 로쟈의 책읽기』

  이현우 지음, 현암사, 2012. 6.

 

지난 십년동안 유일하게 별 다섯을 충족시켜주는 인터넷 쇼핑은 유일무이하게 ‘도서 구입’이었다. 책 박스를 열고, 잘 만들어진 몇 권의 반듯한 책을 마주할 때 느끼는 쾌감은 얼마의 돈으로 저자의 사유를 소유하게 된 자가 느끼는 승리감 비슷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될 동물 사냥에 나선 사냥꾼의 심정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빵으로만 살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책은 심성 뿐 아니라, 물질적 성질로도 우리를 충분히 흥분시킨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과 나의 서재에 꽂힌 책의 무게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서재는 그 주인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의 ‘책사랑’이 하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이현우의 서평 모음집『책을 읽을 자유』가 나왔다. 이현우는 단단하고 독하게, 종횡무진 전 방위의 독서를 하는 인터넷 서평군‘이다. 책을 읽고 그 나름의 의미를 담아내는 일에 각자의 품격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서평가들의 本이 된다. 삶이 이어지는 한, 희망이 사라진 지점에서도,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제 곧 휴가. 이 소중한 시간을 책과 연애할 사람의 첫 번째 미팅으로 좋을 책이다. 삶과 책에 대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성찰을 하게 해줄 선물 같은 책이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민음사, 2012. 6.

 

CBS 라디오 프로듀서인 저자 정혜윤의 특강을 들었던 적이 있다. 정혜윤의 범상치 않음은 사람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혼용하는 그녀의 ‘말’은 글만큼이나 - 글보다도 - 매혹적이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큰 키와 눈망울, 개성과 관능을 겸비한 차림새는 ‘책을 사랑하는 서평가’ 이전에 정혜윤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다. 그녀를 향한 궁금함이 너무 사적인 것들인지라, 누군가 대신 질문해주기를 바라는 소심함으로 겨우 체면을 유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만큼 그녀가 매력적이었음을 고백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개인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책을 연애하듯 만나는 그녀의 독서에 신선한 감동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제목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책은 우리의 삶을 바꾼다. 생각을 바꾸고 바뀐 생각은 우주를 바꾼다. 영화나 공연과 달리 독서는 어디에서나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고, 밑줄 긋기와 접기를 통해서 독자 스스로 강조점을 찍으며 자신만의 책으로 재편집할 수 있다. 여의치 않은 상황이 아니라면, 한권의 책은 온전히 한명의 독자와 독대하는 시간을 갖게 마련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서의 본질적 성격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만의 독서법과 취향으로 책과 연애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독서는 삶과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속성을 갖는다.

 

 

『내가 쓴 것-잘생긴 천재의 삐딱하게 영화 보기』

  이지훈 지음, 이매진, 2012. 6.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간 젊은 작가의 유고집은 단순히 ‘책’이라고 명명할 사물이 아니다. 기형도의 시(詩), 김광석의 노래에 깃들어 있는 처연함이 현재형이듯, 이지훈의 『내가 쓴 것-잘생긴 천재의 삐딱하게 영화 보기』 역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독자와 만난다. 글은 온전히 작가의 삶 전체를 박제한다. 서둘러 떠난 죽음 앞에서 그가 혼신을 다해 기록한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제의(祭儀)를 갖추는 일이다.

 

《FILM2.0》의 글들 속에서 영화평론의 허기를 채우며 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은 모두 이지훈을 기억할 것이다. 그를 통해서 영화는 ‘작가’의 ‘예술 작품’이 되었다. 2011년 6월 30일, 세상에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난 그의 원고 모음은 『내가 쓴 것』과 『해피-엔드』라는 두 권의 유고집으로 독자와 마지막 만남을 갖는다. 그의 글은 가벼운 듯하지만, 깊은 여운이 있고, 엉뚱하지만 새로움이 있다. 서툴지만 자유롭다. 자기 나름의 영화 해석은 창조에 버금간다. 아마 이 점이 그가 당당하게 오독을 사랑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관심은 '사회'로...

 

『신 없이 사는 법』

  로널드 애론슨 지음, 김세진 옮김, 상상과표현, 2012. 6.

 

김형경의 『사람 풍경』, 『좋은 이별』, 『천개의 공감』에 이어 『만 가지 행동』을 읽으면서 성찰과 치유를 경험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작가의 글에서 자존감을 세우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 · 동감하였으리라. 그것은 종교가 주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울림이었다.

 

그러나 네 권의 ‘치유 시리즈’를 섭렵한 끝에서 만나는 하나의 불편함은 - 내게 주어진 화두일 수도 있는 - 바로 신(神)이었다. 실존적 한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결코 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우리는 신의 디자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종교가 없는 자리에는 또 다른 것들이 ‘유사 종교’의 형태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죽음과 같은 절대적) 두려움과 한계 상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 한다.

 

문명은 진화했으나,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의 기원으로 가득 찬 종교를 볼 때면 인간의 종교적 성찰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넘어서서 다시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어서 추천한다.

 

 

 『노동의 배신-'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부키, 2012. 6.

 

『긍정의 배신』을 통해서 ‘긍정’이 힘이 아니라 우리의 발등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했던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이번에는 노동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배신하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의 워킹 푸어 생존기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에 걸쳐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가정집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매장 직원 등으로 일하며 최저 임금 수준의 급여로 정말 살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했다.

 

연봉과 월급을 받는 현대인은 일을 하는 자유인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고용직 노예와 다름없을 수 있다. 중산층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정당하게 자기 권리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곳곳에서 최저생계비를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위에 자신의 권리가 보장받고 있다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다. 『노동의 배신』은 대중의 배설물을 치워주는 하층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어나게 한다. 또한 우리 모두 어떤 행동으로 우리 각자의 삶이 지켜나갈 것인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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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7-1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항~ 두 권이 겹쳤군요...ㅎㅎ
이렇게 정성들여 페이퍼를 쓴 보고 가끔 반성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생략! 생략을 하죠..반성만 하는 인간은 발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흑흑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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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적 주체, 부정과 긍정의 詩人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강신주 지음, 천년의상상, 2012.

 

6월은 뜨거운 태양을 위무하는 바람이 있다. 혁명의 기운을 품었던 한국 근현대의 5월과 6월은 그 뜨거움으로 어지럽게 들뜬다. 그 역사의 한 지점에 태양 아래 고결한 한 줄기 선명한 바람결 같은 시인, 김수영이 있다. 삶에 직면하여 자기 길을 개척한 시인은 자기 초월을 통해서 영원회귀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이 아니라, 불모지를 개척하여 자신만의 길을 내어 당당하게 걸어갔다.

 

192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8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그의 삶은 격정으로 가득했다. 초기 김수영은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하는 모더니스트로 주목을 끌었다. 교편, 잡지사, 신문사를 오가며 시작(詩作)과 번역에 전념하던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의 한계 상황에서 사랑을 잃었고, 4·19혁명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 시인이 되었다. 그가 경험한 포로수용소라는 극단적 공간은 실존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바닥을 내려가 본 사람은 관념으로 시를 쓸 수 없다. ‘반공 포로’가 가지는 정신적 혼란과 고뇌가 그의 시를 다른 시인의 것과 차별화한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연애시를,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의식과 체험으로 가득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했다.

 

몇 편의 시로 ‘김수영’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나를 반성하게 한 책이 바로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이다. 김수영을 통해 한 뼘은 성장했다는 강신주는 자신의 마음 키를 높여준 “김수영을 위하여” 고단했을 10주의 강의를 녹취하고, 정성들여 편집하여 한권의 책으로 박제했다. 아마도 기념비를 세우는 심정이었으리라. 김수영과 함께 기억해야 할 연도, 김수영의 나이를 자신의 것과 비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제한다. 그것은 외부적 압력에 주눅 들어 위축된 삶을 사는 ‘독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선물이기도 하다. 삶, 사랑, 시 쓰기의 매뉴얼을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 참조할만한 매뉴얼은 없으나 -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참아서 유목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 어깨를 토닥여준다.

 

“방법을 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삶을 기획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자신이 경험했던 청춘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여 효율적으로 살아가도록 모든 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설계사와 투자자 역할을 자청한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성공적인 삶은 과시하고 싶은 욕망과 자신의 노후의 안정된 삶을 지키려는 무의식이 일정정도 작정한 것이겠으나, 그 표면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생은 - 불행인지, 다행인지 - 단 한번으로 완성된다. 동일한 전제를 이유로 - 모험하지 않는 - 안정적인 매끈한 길을 갈수도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길에서 타자와 부딪히고 어긋나면서 고단한 창조의 삶을 살 수도 있다. 리스크를 최소화한 삶, 정해진 길을 가는 삶은 타자와의 충돌로 미끄러져 가는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없다.

 

시대를 앞서 온 시인은 詩를 통해서 새로운 물결을 만든다. 시대의 요구에 반하는 시인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체제에 맞춰 순응하며 살아갈 수 없는 세포로 구성된 이질적 생물체가 된다. 체제의 억압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려는 주체만이 자각할 수 있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자각하는 사람만이 창조하는 삶을 산다. 그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상처 가득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사랑을 한다.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 서로 안에 갇힌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참조한 자기 세계를 깨트리는 사랑을 한다.

 

진정한 자유인은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시나 사랑이 가능하려면 타자나 자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격렬한 사랑의 끝에서, 한 세계를 무너뜨린 시인은 사랑을 잃고 시를 쓴다. 더 이상 서정의 시대는 없다. 우주를 뒤흔들었던 창조의 여진은 시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블루에서 레드로

 

김수영은 나에게 ‘블루’였는데, 저자 강신주와 편집자 김서연에서는 ‘레드’였나 보다. 표지와 간지를 채운 빨간색을 보며, 열정에 비례하여 고단한 삶을 살았을 김수영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퀭한 눈빛의 김수영은 이른 새벽의 창백한 블루다. 그의 눈을 스치면 사물은 다른 존재가 된다. 비, 거미, 팽이가 시인 김수영의 처지를 함의하고 있었듯이 사물은 시인 그 자신이 된다.

 

시인 김수영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자기만의 삶을 단독적으로 살다 갔다. 중심을 해체한 리좀적 주체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창조했다. 한번으로 해독되지 않는 글, 얇은 반투명 껍질 속에 내밀한 고통이 알알이 박혀 있는 시 세계를 창조했다. 답을 주지 않지만, 길을 보여주는 그는 현란한 언어로 모자이크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매혹적이다. 김수영은 각자의 삶을 꿈꾸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불멸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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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6-1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앙으앙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맛깔나에 쓰셨는지요?....
숲님을 위하여~~ 추천을 열 번이라도 누르고 싶어요.
리뷰를 어느 관점에서 쓰는가에 따라 책의 내용이 풍성해 지는가 하면 또 쫀쫀해진단 말입니다
블루에서 레드로 는 압권입니다. 공감합니다...^^

더불어숲 2012-06-1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가 하수에게 분발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데요..ㅎ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꽃도둑 2012-06-26 23:37   좋아요 0 | URL
이 무슨 해괴한...^^
같은 하수끼리 왜 이러십니까?,,,,ㅋㅋㅋ
제가 오프라인 모임 중 하나가 '주류와 떨거지 사이에서'인데요...어떤가요?
이제 고수라는 말 못하겠죠?,,,ㅋㅋ
아, 오늘 김수영을 위하여 드뎌~ 올렸어요,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요..
좋은 밤, 웃긴 꿈 꾸세요..(저는 잘 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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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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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정의의 정치 철학자가 펼치는 도덕 논쟁 - 돈과 시장의 역할에 대하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2012.

 

2005년 센델 교수의 한국 방문 시 특강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롤즈의 『정의론』을 가지고 스터디를 하던 학구적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하버드 최고의 교수’로 유명한 샌델의 명강의를 듣고 싶었던 열망도 컸다. 그는 롤즈의 『정의론』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했다. 롤즈는 개별적인 원리를 적용하여 보편적인 정의의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센델의 비판은 그가 한동안 롤즈가 강조한 ‘무지의 베일’과 ‘무연고적 자아’라는 게임적 실험에 천착했음을 의미한다. 깊은 생각 끝에서 끊어 나오는 샌델의 강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침착하고 엄중했으며 강렬했다.

 

2010년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정의란 무엇인가』가 저녁 식탁에 오르는 빵처럼 팔려 나갔다. 당시 나는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졌던 마이클 샌델의 책과 그의 사상이 한국에서 이처럼 주목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고민의 끝에서 신자유주의 대세에 멀미를 느낀 많은 사람들의 암묵적인 의사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적 가치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물질적인 재화 뿐 아니라, 가족, 대인 관계, 시민사회까지 침투해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서구보다 늦게 시작되었으나, 빠르게 번지며 지배적인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의 결과였다. 지배 담론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적 토론에 대한 강한 열망이 한국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한때는 그 결과가 진보교육감의 당선에 영향을 미치고,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정치철학자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우주를 바꾸는 것만큼 격정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세상은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2년 4월,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샌델의 특강에는 만사천여명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샌델 교수 역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얘기했다. 그가 자유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얻게 된 ‘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처럼 과도한 에너지를 품어내는 한국의 집단 사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우정, 교육, 의료, 사랑, 시민 의식

 

오 헨리의 단편소설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에서, 재벌 아버지는 돈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아들은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둘은 내기를 하게 되고, 아들은 자신이 사랑을 쟁취했다고 믿는다. 사실 그 사랑의 이면에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둔 ‘돈’이 있었다. 풍자 가득한 이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주장에 ‘철학’의 외피를 두른 것이 바로『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서 돈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영역까지 시장이 침투했을 때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게 되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중요해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덜 가진 사람을 소외시킨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만연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삶을 영위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또한 ‘돈’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장적 가치가 교육, 의료, 시민의식, 우정과 같은 비시장적인 영역까지 밀고 들어온다. 돈으로 목적을 달성하면,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가 훼손되고, 우리가 갖게 된 재화의 본질이 변질된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고유한 가치가 모두 돈으로 수량화하면서 재화의 고유한 가치는 변질된다.

 

뛰어나지 않은 학생이 부모의 능력으로 입학하는 ‘기여입학제’,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장학금’, 봉사활동을 점수로 환산하는 ‘학교생활기록부’, 직장인의 연수 실적을 승진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 국가대표 선수의 메달에 상응하는 연금 등은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를 야기한다. 성과금으로 노력의 댓가가 주어지는 순간,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잃게 된다. 한국사회를 비롯한 세계는 ‘지구화’의 미명 아래서 시장사회가 되고 있다. 이는 시장 사회를 넘어선 시장사회이다. 시장경제는 효율적이고, 경제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사회는 삶의 모든 영역이 거래된다. 시장 가치인 돈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샌델 교수가 왜 하버드 최고의 교수로 평가 받는지 알게 하는 요소가 이 책 안에 가득하다. 이론 그 자체에 천착하기 보다는 ‘게임 이론’을 적극 활용하여 시장과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독자를 세우고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이때 독자는 적극적 행위자로 위치한다. 시장과 도덕이 충돌하는 딜레마 상황은 함께 고민하고 보편적 준칙을 세우는 공론장이 된다.

   

샌델은 아산재단과 함께 미국과 한국사회의 사회적 인식 조사를 했다. 미국인 다수가 미국 사회가 정의롭다고 응답한 반면, 한국인은 74%가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답했다. 이것은 시민의 인식에 관한 리서치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인식 조사는 한국이 미국 보다 ‘공정 사회’에 대한 고민이 크다는 것을 함의한다. 또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하다. 공정성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취약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활발하게 논의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좋은 사회는 ‘돈’뿐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공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때 좋음은 올바름과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다. 나는 샌델을 “좋음과 옮음의 철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가 강조하는 행복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복은 “인간의 삶이 가지는 내적인 경지를 무한히 실현하는 것”이다. 정의는 “좋음이 아니라, 옮음”에서 출발한다.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한국사회가 - 옳음과 좋음의 간극을 좁혀서 - 재화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고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공론장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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