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배우 : 장 뒤자르댕, 베레니스 비조

 

올해 2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는 전 세계, 전 세대를 아우르며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 층은 새로움을 발견했고, 중장년층은 어렸을 때 감동을 주었던 고전 영화의 재현을 경험한다. 진 켈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같은 뮤지컬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화면비율 4:3의 이 흑백영화는 영화 기술의 정수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는 21세기를 잠시 잊게 만든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댄스, 음악은 1920~30년대 헐리웃 영화 전성기에 제작된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혀 새롭지 않은 플롯과 연출에서 사람들은 ‘과거’라는 달콤한 마술을 경험한다. 반대로 고전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가 ‘새로움’으로 다가서면서 즐거운 꿈의 세계를 선사한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헐리웃을 배경으로 한다. 무성영화계 최고 스타였던 한 남자의 흥망성쇠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성 영화 시대에 최고의 흥행 가도를 달리던 배우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은 흑백 영화의 쇠퇴와 함께 부와 명예도 전락한다. 기존 영화 제작 방식을 고수하며 지키려했던 조지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점 침울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를 흠모하며 배우로 성장하고 있는 신출내기 페피 밀러(베레니스 비조)는 조지의 몰락과는 반대로 신예로 떠오르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는 조지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의 재기를 돕는다. 페피는 파산으로 극한의 선택을 하려는 조지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함께한다.

 

무성 영화 형식을 취한 <아티스트>는 소란한 일상을 잠시 잊게 한다. 음악과 댄스는 대사가 주는 피로함을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2012년 아카데미는 <아티스트>의 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4회 칸영화제에서 <트리 오브 라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양보했지만, <아티스트>는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의상상, 작곡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장 뒤자르댕은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게리 올드먼, <디센던트>의 조지 클루니와 같은 경쟁자를 누르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서만 알려졌던 배우 장 뒤자르댕의 수상에 대한 이의는 별로 없는 듯하다.

 

유성영화를 연기해온 배우가 무성 영화의 연기로 몸을 언어화하는 것은 힘겨운 작업이다. 장 뒤자르댕은 원맨쇼 코미디를 연기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던 경험은 무성 영화 시기에 최고의 스타 조지를 연기하는데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감정을 체화하여 다양한 몸짓과 표정을 만들어냄으로써 무성영화의 답답함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그는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장 뒤자르댕과 베레니스 비조는 현장에 흐르는 음악에 맞춰 감정을 조절하고, 표정과 눈짓으로 대사를 대신했다.

 

거의 무성 영화에 가깝게 제작된 이 영화는 음악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과 영화 음악가 루도빅 바우스는 고전 헐리웃 작품들을 감상했다. 음악이 대사와 음향 없는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방식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다. 대사가 없는 상태에서 자막까지 최소화하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테크닉에 있어서 음악이 무척 중요하다. ‘페니 프롬 헤븐’과 ‘주빌레 스톰프’와 같은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되었다. 압권은 영화의 마지막 2분 동안 펼쳐지는 음악에 맞춰 두 배우가 추는 탭댄스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은 흑백 무성 영화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이 장면을 얼굴과 몸을 한눈에 보여주는 롱 쇼트로 촬영했다. 조지와 페피가 유성 영화를 찍으며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이 장면을 위해서 다섯 달 동안이나 탭 댄스를 연습했고, 장면을 촬영하는데도 열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찍었다고 한다.

 

<아티스트>는 단순히 과거로만의 회귀가 아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음악을 예상하는 순간에 음향으로 반전을 끌어오기도 하고, 배우의 입이 클로즈업 된 상태인데 자막이 깔리지 않기도 한다. 기대와 어긋나는 엇박의 리듬이 관객의 집중을 유도한다. <아티스트>는 1920년대의 스타일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음으로써 21세기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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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우정 - 전신마비 백만장자와 무일푼 백수가 만드는 감동실화!
필립 포조 디 보르고 지음, 최복현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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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농담의 내적 치유력, <언터처블: 1%의 우정> (Untouchable, 2011),

감독 : 올리비에르 나카체 , 에릭 토레다노, 출연 : 프랑수아 클루제, 오마 사이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계층의 두 남자가 만났다. 프랑스 최상류층인 필립(프랑수아 클루제)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다. 소외계층인 드리스(오마 사이)는 흑인 슬럼가에서 부랑아처럼 떠돌고 있다. 부유한 필립은 교양과 고급취향을 소유했지만,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드리스는 젊고 유쾌하지만, 범죄 경력을 가진 가난한 흑인 이민자다. 필립의 간병인을 뽑는 인터뷰에서 필립과 드리스는 처음 만난다.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그 자리를 탐내는 지원자는 많지만,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 돈이 목적이거나, 장애인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는 그 자리를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참가한 드리스는 다른 후보들처럼 일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필립이 거절하면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이 목적이다.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것은 ‘연민’ 없고, ‘검열’ 없는 드리스의 유쾌한 삶의 태도 덕분이다.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대책 없는 드리스와 가까워지면서 필립은 점점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언터처블>은 이미 프랑스 박스오피스 10주 연속 1위의 기록을 세우고 있고, 국내에서도 관객의 발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상, 뤼미에르영화제 남우주연상에 이어 ‘프랑스의 아카데미’인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감동과 울림이 크다. 실제로 필립은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 샴페인 회사의 사장이다. 선조인 칼 앙드레아 포조 디 보고는 정계,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최상류층으로 황제 나폴레옹의 친구였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코르시카 섬의 수상이기도 했다. 가문의 부, 명예, 전통은 필립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음악 또한 큰 역할을 한다. 무사무욕적인 사치취향을 가지고 있는 필립과 대중 취향의 드리스가 서로를 존중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음악을 활용한다. 단순히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기능을 뛰어 넘는다. ‘따분한’ 클래식만을 고집하는 필립이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난 뒤에 드리스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주기를 요구한다. 그때 선곡한 곡이 바로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Boogie Wonderland’이다. 펑키한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드리스를 따라 점잖았던 파티장의 분위기가 반전한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펑크 역사상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그룹이다. 그래미 어워드 10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4회를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음반을 많이 판매한 아티스트로 평가되고 있다. 밴드의 리더이자 창시자인 모리스 화이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보컬그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유머와 재치로 가득 차 있다.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하는 <언터처블>의 미덕은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립이 드리스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리스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전신마비 환자라는 것을 잊게 된다. 육체는 비록 한계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정신은 주체적인 선택 여부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들은 통속적인 격식을 깨트리면서 탈선과 자유를 넘나든다. 그것은 의도의 결과가 아니라, 드리스의 타고난 품성의 몫이다. 품성의 발현은 수평적 관계에서 시선을 맞추는 필립의 심성이 반영된 결과다. <언터처블>의 - 부자와 빈민, 이민자와 정주민, 흑인과 백인의 - 이분법이 불편할 수 있지만, 그들의 관계성은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상생을 성찰하게 해준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자원을 의심과 두려움 없이 나누는 건강한 우정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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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 2012-04-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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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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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최종규 씀, 호미, 2012.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 없이 표상할 수 없는 무수한 관념이 세상에 존재한다. 사물화 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개념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름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희망, 유토피아, 신(神)과 같은 추상의 개념은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 언어를 넘어서 -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한다. 관념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아간다.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성찰의 시간 동안 사람은 성장하고,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욕망을 형상화한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배우고 흉내 내며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저자 최종규님의 강직함과 올곧음이 그대로 베어나는 『뿌리깊은 글쓰기』는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하고 쓸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을 반성하게 한다. 말이 곧 글이 되는 일인 미디어 시대, 개개인의 사사로운 글들이 퇴고(推敲) 없이 네트워크에 쏟아지고 있다. 최종규님은 글밭 일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책무성의 준엄한 자기 검열의 기준을 제시한다. 고약하다 싶을 만큼 고치고 다듬어서 우리글에 맞는 적확한 문장을 구성한다. 그는 불편함 없이 우리가 입어왔던 옷을 새롭게 고쳐서 더 편안하고 멋진 옷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솜씨를 갖추었다. 그런 일을 업(業)으로 삼는 이는 고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책날개에 담긴 저자 최종규님의 얼굴빛이 참으로 맑고 곱다. 갓 쓰고, 도포 입은 구태의연한 외양을 생각한다면, 그의 실체와 멀어도 한참 멀다.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살아난다. 마음 씀과 글 씀이 그대로 형상화한 느낌이다. 그가 엮어 가는 착한 넋, 착한 말, 착한 삶이 활자로 살아난다. 인용된 글의 저자들 역시 그가 다듬어 준 새 문장에 빈정거릴 수 없는 까닭이 바로 그가 갖추고 있는 ‘진정성’과 ‘올바름’이다.

 

『뿌리깊은 글쓰기』는 오랜만에 독한 자아비판을 쏟게 한다. 글씨를 배워 읽고 쓸 줄 알게 된 이후로, 을 매개로 세상을 배웠던 나는 ‘번역서’를 창작 소설보다 먼저 읽었다. 대부분이 한자어인 우리 글, 서양의 동화책에서 출발한 책읽기, 번역서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던 나의 글에서 뿌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고민과 퇴고의 절차 없이 썼던 글은 오문(誤文)과 비문(非文)이 가득하다. 읽은 사람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고 쓴 자기 과시의 글들도 더러 있다. 우리말 사이사이에 영어와 한자를 섞어서 현란하게 쓰는 것이 학력과 문화라는 통념의 반향이기도 하다. 이 책은 펼치는 순간 한숨에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채워주셨던 한시절의 소중한 가르침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그분들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며 살고 있는 나에게는 두 큰 어른의 부활로 느껴졌다. 최종규님은 그분들의 언덕에서 숲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반듯하고 곧게 자란 한그루 나무 같다. 우리글을 향한 저자의 ‘생각’, ‘사랑’, ‘뿌리’는 언어를 통제하는 제도 권력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강인한 내공과 생명력을 담고 있다. 그는 한글을 모국어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좋은 선생님이시다.

 

누군가가 한글만을 고집한다면, 시류를 거스르는 유통성 없는 사람쯤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우리말을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순혈주의, 인종주의,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언어 권력의 지배를 간과한 비판이다. 불과 19세기에도 서구 지배계급은 ‘라틴어’를 가지고 명문대 입학을 조절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21세기 한국은 기득권으로의 진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변인이 바로 ‘영어’다. 듣고 말하는 영어 능력이 대학 입시, 취업, 전문대학원 입학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말은 더욱 더 경시 당한다. 언문(諺文)이라고 하여 우리말을 천시하고, 한문만을 고집했던 이조 양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뿌리를 가진 공동체의 언어를 억압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순혈 인종주의 침략자들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오롯이 새겨진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대주의를 가지고서 자문화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늘 당장 컴퓨터를 셈틀로, 다운로드를 갈무리로, 디저트를 입씻이로, 디테일을 구석구석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한자어를 모두 폐기하거나, 일본말과 영어식 어투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로 잡을 수는 없다. 뿌리가 잘린 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좋은 토양에 뿌리를 깊게 내린 글쓰기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겠다는 다짐 하나 세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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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따뜻한 경쟁』 맹찬형, 서해문제, 2012. 2.

 

무한 경쟁, 승자독식의 신화가 우리 사회의 지배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과열 경쟁의 결정 변인은 노력의 대가가 이전보다 적어졌기 때문이다. 내기물을 욕망하는 사람은 많고, 가질 수 있는 분량이 적어지면 경쟁은 가속이 붙고, 점점 치열해진다. 우리나라 자영업 비율은 24%이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미국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자영업 비율은 전체 국민의 7%다. 미국인 한명이 돈벌이를 하는 공간에서 우리나라는 네 사람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인간적인 삶을 꿈꾸기에 사회 시스템이 너무 열악하다. 한국인은 남보다 더 일찍 일을 하고, 더 늦게까지 가게를 열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현재는 미래에 저당 잡혀 있다. 대한민국 군인 숫자와 맞먹는 사람이 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얼추 6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많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을뿐더러, 열악한 조건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다.

 

과열 경쟁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일을 성취하는 내적 추동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학문적으로 검증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만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바로 ‘담론’의 힘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차가운 논리가 우리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학교, 직장과 같은 삶의 현장에서 책무성은 높아지고 사회적 보장은 약화되고 있다. 스펙을 쌓지 않으면, 자연도태 될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수한 ‘상징 자본’이 ‘돈’으로 정량화되고 있다. ‘연봉’ 하나로 좋은 직장을 이야기한다. 경쟁하지 않는 직장을 ‘철 밥 통’이라고 비난한다. 생존을 위한 직장은 있으나, 자아성취와 성장의 꿈 터전이 되어줄 곳은 별로 없다.

 

우리는 내적 동기를 없애고, 주체를 타자화 하는 경쟁에 대해서 180도 다른 ‘성찰’을 해봐야 할 중요한 시점에 있다. 스위스 특파원 맹찬형의 『따뜻한 경쟁』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스위스를 바라본다. 그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우리 사회를 ‘패자 부활’의 기회를 보장하는 스위스와 비교한다. 제대로 된 복지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는 우리는 북구형 복지국가들을 교과서적으로만 알고 있다. 그 앎에는 분명 적지 않은 ‘냉소’도 깔려 있다.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경쟁’에 있다는 신념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이 없으면 나태해진다’는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타인의 성공을 비하하는 공동체 문화를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거나, 개인의 인성 문제로 귀인하는 수준으로 봉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 더불어 - 배울 점이 있다면 토양이 다른 우리 땅에 맞게 수정하면 될텐데 - 스위스와 같은 북구형 복지국가의 사례를 이야기하면, 문화 사대주의라는 냉소적인 태도도 있다. 여행 수준에서 경험했던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경험으로 그 세계를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판단은 잠시 괄호 치고 한국과 유럽을 비교 분석하여 ‘성찰’을 도출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병든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근현대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생존했던 방식이 ‘경쟁’이었다면, 이제는 ‘성장’ 보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따뜻한 경쟁』은 서문부터 한없이 따뜻하다. 글밭을 일구는 사람은 알고 있다. 인쇄 활자로 박혀 나오는 ‘글’은 말과 달리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자신의 글에서 발견될 오류와 비약에 따른 비판이 두렵지만, 해야 할 말은 반듯하게 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사람, 그들이 작가다. 기자 출신인 맹찬형의 글쓰기 방식은 독자의 접근을 편안하게 이끈다. 어디에서 펼쳐 들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스위스 패러독스’, 높은 대학 진학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를 가진 우리와 비교해서 쓰이는 말이다. 대학 진학률은 낮더라도 평생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나라, 가정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엄마의 행복을 보장하는 나라, 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 불편해지더라도 마트 연장을 반대하는 시민, 반려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시민의 참여로 명품 국가가 탄생한다. 그런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능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복지 국가는 관념이 만들어낸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가고 싶은 나에게 수용할 수 없는 부분 역시 상당 부분 존재한다. 그는 ‘나가수’와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경쟁에 대한 반성과 전환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등수 매기기 보다 더 재미있는 게 경쟁의 내용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경쟁’을 통한 내용일 뿐이다. 경쟁은 ‘나가수’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수많은 이란성 쌍둥이를 만들어냈다. 물론 언더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지켜왔던 가수를 프라임 시간대에 만날 수 있는 기쁨이 컸고, 그들이 노래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출연했던 가수들이 감내했던 긴장과 강박의 후일담을 듣다 보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당시 그들의 콘서트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가수’가 고공행진을 하던 초기에 출연 가수의 공연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 사이사이 브릿지 마다 ‘나가수’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나가수’가 없었다면 오늘의 공연도 없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와 ‘나가수’ 출연의 후일담이 대부분이었다. 콘서트에서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나가수’ 사전 녹화가 바로 있기 때문이란다. 공연 보고 난 후의 뒷맛은 참으로 썼다. 경쟁을 순화했다고 해서, 경쟁의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생산적 복지’가 유사 신자유주의인 것처럼, ‘따뜻한 경쟁’이 경쟁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의 사다리에는 위계에 있으나, 아무리 올라가도 끝은 없다. 경쟁은 또 다른 경쟁으로 이어지며, 우리의 삶을 피폐화한다.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개인이 사다리를 걷어찰 용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경쟁은 나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맹찬형의 글을 읽고도 미진함은 남는다. 『따뜻한 경쟁』의 한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독자에게 - 오래전에 출판된 - 알피콘의 『경쟁을 넘어서』를 추천한다. 교육심리학자인 알피콘은 인간이 원래 경쟁적이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증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신화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존(自存)은 경쟁을 통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협력은 모두의 성장을 담보하고,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실수는 배움으로 남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안철수는 실패를 용납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벤처 기업들이 사라졌다. 부도가 나면, 재기의 기회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실패는 재도전하여 성공의 동력으로 쓰여야 한다. ‘경쟁’의 비효율성과 문제점을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고, 협력의 신화를 새로 쓴다면, 우리는 적은 비용과 노동으로도 인간다운 삶이 담보하는 행복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누구도 패자가 되지 않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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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4-0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다운 리뷰를 쓰셨네요.,,좋은 리뷰에요,,^^
전 마감 10여분을 남기고 후다닥 한 권을 마무리 했네요,
뭘 썼는지 모르겠어요...ㅡ.ㅡ
하지만 한 권을 마무리 했다는 이 홀가분함을 아시는지요?ㅎㅎㅎ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리뷰 적는 일은
아주 뜸하니까 나름 고통스럽긴해도 즐겁네요...
숲님도 잠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는 걸로 봐서는 리뷰보다는 책 자체에 애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닌건지..
저 역시 그렇지만...

더불어숲 2012-04-01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암만 생각해도 '문자적 인간'인듯 합니다.ㅎㅎ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즐겁습니다.
꽃도둑님 말씀처럼..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역설이 존재하지요.
<뿌리깊은 글쓰기>를 읽으며, 글과 말이 곧 '저'라는 생각을 곱씹었지요.
언젠가 저도 최종규님처럼, 헌책방의 주인장이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묵은 책의 냄새가 그립습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자동차와 민주주의』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2. 03.

 

  

이시대의 지성, 강준만 교수님의 안식년의 성과인 『자동차와 민주주의』가 나왔다.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에 이어 『자동차와 민주주의』가 출판되었다. ‘자동차’를 수단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한국 사회를 생각할 때, 탐구 가치는 충분하다. 중화학공업의 모토로 경제 성장과 국가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자동차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국가 산업이다. 또한 ‘드림’은 -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중심축이 바로 ‘소비’이기 때문에 - 실체의 효용성으로 계산되지 않는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자동차의 문화사를 촘촘하게 살펴보면 자본주의 실체를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 데일 마하리지 지음, 김훈 옮김, 마이클 윌리엄슨 사진, 여름언덕, 2012. 02. 

 

강준만 교수님의 『자동차와 민주주의』가 외부자적 시선으로 미국 역사를 탐색한다면, 『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는 내부자적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위기를 진단한다. 정의(正義)와 부(富)의 상징이었던 아메리카 드림이 세계를 장악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 미국은 거듭된 불황으로 껍데기만 남았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저자들은 미국이 겪고 있는 현재 상황을 대공황에 비유하며, 1980년 레이건 이후 누적된 결과라고 단언한다. 저자들의 30년에 걸친 연구의 성과라고 한다면 신뢰할만하지 않은가? 데일 마하리지는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현장을 기록하였다. 미국 현실과의 직면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90% 학생이 불행한 교육의 풍경 『최고의 학교』남승희 지음, 인카운터, 2012. 03.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학교의 풍경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을 성찰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교육문제의 모든 책임을 교사와 공교육에 전가시키는 사회적 담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 『최고의 학교』다. 학교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공간이 아니다. 상징자본이 붕괴되어 버린 학교는 ‘입시 준비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학교의 사회화와 선발의 기능에 매몰되어서 학교는 비판적 사고 자체를 마비시켰다. 한명의 엘리트가 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만 명의 행복한 인재를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학교』는 도구적 기능인으로 계량화하는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기회가 될 것이다. 교육 문제가 정치경제에서 기인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희망을 발견한다.

 

 

 

 

 

『학교폭력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문재현 지음, 살림터, 2012. 02.

 

 

 

『최고의 학교』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노력하는 교사와 전문가들의 연구팀이 펴낸 책이므로, 청소년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교폭력은 사실 사회폭력의 축소판이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계급사회를 경험한다. 학교의 문화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알게 될 것이다.

 

 

 

 

 

 

 

『영어 계급사회』남태현 지음, 오월의봄, 2012. 02. 

 

 

한국 교육의 최고 정점에 영어가 있다. 현재 수학능력시험의 영어 듣기를 50%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고, 난이도에 따라서 다른 문제를 학생들이 선택하게 된다. 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전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치러야 할 관문에는 ‘영어’가 있다. 얼마전 일요 스페셜에서는 소방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서른세 살의 청년이 등장했다. 다른 과목은 모두 통과할 자신이 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포기한 영어 때문에 공무원이 되지 못하는 청년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영어 없이는 다른 능력을 갖춘다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학교와 직업을 가질 수 없다. 광기에 가까운 한국의 영어 사교육과 국가 정책,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영어를 통한 계급 간 구별 짓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리얼 유토피아』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음, 권화현 옮김, 들녘(코기토), 2012. 02.

 

"정당하고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정표를 제공하기 위한 책이 나왔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전세계를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바운더리로 통합하는 듯 보였다. 사회주의 붕괴가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있지 않다는 것은 바로 드러났다. 지역 간, 인종 간, 계급 간의 양극화가 첨예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조적 악순환에 절망한 채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진정 리얼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는 없을까? 미래는 희망의 꿈을 놓지 않는 자(者)의 것이다.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면, 유토피아는 real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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