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ebs 세계의 명화 방영 라인업, 훌륭하다.
이번주는 지아장커의 <세계>, 18일은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그리고 25일은 <토니 타키타니>.
<토니 타키타니>는 국내 상영되었을 때 놓쳤던 작품인데,
아 고맙게도 ebs에서 방영해주네.
무겁고 우울할 뻔 11월, 영화들이 나에게 다정한 위안을 전해주네.
11월 19일은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의 날. 평일엔 시간이 안되니 이날 몰아서 3편이나 본다는...ㅜ.ㅜ
지루한 무채색의 날들에 한줄기 축복같은 영화가 있어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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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Tony Takitani
감독 : 이치카와 준
출연 : 미야자와 리에, 오가타 잇세, 유미 엔도, 니시지마 히데토시
제작 : 일본, 2004년
방송길이 : 76분
줄거리
재즈 트롬본 주자 쇼자부로(오가타 잇세)는 상하이에서 청춘을 보낸다. 귀국한 그는 결혼을 하지만 아내는 토니를 낳자마자 죽었다. 그렇게 아버지도 재즈 연주로 항상 집을 비우는 가운데 어린 토니는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면서 탁월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토니는 아담한 체구에 단정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에이코(미야자와 리에)란 여성에게 불현듯 마음을 뺏겨 결혼에까지 이른다. 그녀의 아름다운 옷맵시는 완벽한 이미지의 신봉자 토니를 단숨에 매혹시켰다. 이제 그의 삶은 변화했고 난생 처음으로 생의 떨림을 맛보았으며 다시는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이코에게는 유명 디자이너의 옷들을 구매하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녀의 쇼핑에 대한 집착은 점점 커져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토니는 걱정이 되어 그러한 충동을 억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얘기해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토니는 멍하니 앉아 아내가 남긴 옷장을 바라보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옷들이 마치 그녀의 유령을 보는 것 같아 괴로움에 빠진다. 토니는 결국 아내와 완벽히 일치하는 치수를 가진 여성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내게 되고 한 여인이 찾아온다.
주제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로 토니 타키타니였다.” 영화는 원작과 똑같은 문장으로 서두를 연다. 이후로도 영화는 마치 소설을 읽듯이 줄거리를 내레이션으로 읊으며 인물들과 거리를 둔다. 단순하고 여백이 많은 원작의 맛을 살리기 위해 남다른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야기는 대사 대신 내레이션으로 전개되고, 인물들의 공간은 연극 무대처럼 단순하며, 카메라는 수평 이동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토니 타키타니>의 주제는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22회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한 이래 하루키는 현대 젊은이들의 내면에 도사린 공허함과 상실의 감정을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쥐락펴락하며 단숨에 '하루키' 시드롬을 낳았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편뿐 아니라 기발한 상상력에 간결하면서도 행간에 미묘한 뉘앙스를 꼭꼭 담아두는 단편들 역시 그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장르다. 종종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은 있지만 그의 단편 중 영화화에 성공한 것은 <토니 타키타니>가 유일하다. 이 작품 역시 하루키 세계 깊숙이 자리한 상실에 대한 담담한 어조를 바탕으로 고독한 남자와 참한 쇼퍼홀릭 여성과의 기발한 러브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감상 포인트
이치카와 감독은 기존의 사실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간 결국 하루키의 팬들을 배신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촬영 방식이었다. 우선, 영화 속 인물과 거리를 두기 위해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 주인공이기도 한 니시지마 히데토시를 내레이터로 기용했고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두 번째로는 도시 생활의 외로움과 공허함, 정서적 침체를 화폭에 담기 위해 각각의 장면에 의도적인 여백을 두어 하루키 특유의 상실감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또한 마치 <도그빌>의 경우처럼 연극 무대 개념을 도입하여 영화의 대부분을 요코하마시 교외의 넓은 초원에 지어진 무대 위로 한정 짓고 앵글과 의상에만 변화를 주었다. 참고로 <토니 타키타니>의 네 인물은 오가타 잇세와 미야자와 리에가 각각 1인 2역을 했다. 묘한 분위기, 유사한 공간 안에서 1인 2역을 하는 인물들을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레이션과 리듬을 맞추어 흐르는 가냘픈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솜씨다.
감 독
1948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이치카와 준은 화가를 꿈꾸고 도쿄예술대학 서양화과를 지망했지만 결국 4년 동안의 재수생활을 한 뒤 도쿄영상예술학원에서 영상을 전공한다. 이른바 ‘자주영화’라 불리던 독립영화가 붐이었던 당시 8밀리, 16밀리 영화를 만들어 각종 필름페스티벌에 출품하기도 한 그는 졸업 후 CF제작사에 입사해 칸국제광고영화제 금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조용하고 차분한 청춘영화 <부수>(1987)로 데뷔했으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말기암 환자를 그린 <병원에서 죽는 것>(1993)으로 일본영화 비평가 대상, 오를레앙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영화감독으로 떠올랐다. 이후 <도쿄 남매>(1994), <도키와장의 청춘>(1996), <도쿄 야곡>(1997) 등 이른바 ‘도쿄 3부작’이라 불리는 작품을 통해 그만의 따뜻한 시선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중 <도쿄 남매>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와 이후 <라스트 사무라이>에 출연하기도 했던 사나다 히로유키가 신경질적인 중년 남자를 연기한 블랙코미디 <다돈과 치쿠와>(1998)는 그의 또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사카 이야기>(1999)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주목받았으며 하야시 마리코의 단편소설 <한해의 뒤>를 원작으로 삼은 <도쿄 메리골드>(2001)는 이치카와 준의 작품세계를 집약하는 느낌을 줬다. 매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미야자와 리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토니 타키타니>(2004)로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