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살인 위에 죽은 새를 그린 엽서를 둔다 죽은 새 뒤에도 많은 죽은 그림 엽서들이 또 있다 많다 책갈피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듯이 나는 죽은 새가 날아가는 세계도 있다는 걸 믿는다 그곳이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어디에도.

 

자본과 과학 사이 사드(Sade)를 둔다 자본은 계속 팔려야 되고 과학은 계속 복잡해야 된다 그 사이에서 사드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모두 축하할 일 아닌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와 우주 위에 죽은 신해철의 데뷔앨범을 둔다 정말, 죽은 거야 영원한 거야 본질인 거야 껍데기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불가능했던 일이 너무 쉽게 되는 때가 있다 그래서 더 결론을 내리기 싫을 때가 있다.

 

잠 없는 베개 옆에 다이어리와 풍경을 둔다 파도처럼 오고가는 이미지와 글자들, 그 이야기는 음악이다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도 이런 식으로 다시 개정판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을 거 같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쉬우니까 계속 불러보자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름이 어려우니 출발도 까다로운 모양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름을 검색하기보다 그의 영화제목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도착이 좀 까다로운 친구들이지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기 전에 마음껏 불러보자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이드 파이크 아바스야느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

 

피케티씨는 흡사 위대한 개츠비 포즈다. 제가 언제 만나줄지 과학 선생님 좀 만나보고 전해드리죠 기다리세요.

 

그러나 나의 거대한 실수!

인터스텔라의 과학이 까치글방! 까치글방! 까치글방! 왜 출판사를 생각하지 않았어! 아, 저주받은 양식. 초등학교 과학교본 같은 명조체 글자와 조잡한 삽화들...페이지를 넘길수록 울화가 치밀어 분노의 블랙홀@ 각도기 선물세트 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내 분노를 삼각자와 각도기로 측정해 어디로? 동봉하라는 카프카식 심판인지도 모른다.

 

말투가 왜 이래 시인들 탓 그렇다고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시민들 탓도 있으니까 나는 되도록 모두에게 반대하련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알맹이일텐데 그때 나는 무슨 표정일까.

 

어, 컵이 빠졌네 상관없어 컵이 빠지든 네가 빠지든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 없으니까.

 

당신들은 그저 이곳에서 책을 읽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 무언가 하나둘씩 막고 있다 우리 탓이다 속에 얼마나 우리 탓이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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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3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칙글방 대책이없군요. 명조체 하니 갑자기 첵세상에서 나온 니체 전집이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쌍욕을 했는데 이젠 책세상 니체 전집의 촌스러운 명조체가 그립습니다.

AgalmA 2015-01-03 14:54   좋아요 0 | URL
까치글방 참 마케팅 잘 하는 듯. 이런 양식으로도 꼭 봐야할 책들을 내니까 말이죠ㅎ
전 청하출판사요. 니체, 까뮈, 장 그르니에 다 청하출판사의 명조체로 봐서 그 얇고 가벼운 책들 속 잎맥같던 그 글씨체는 좋아했죠. 그 책들 다 어디로 갔나 모르겠어요.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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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인 물리학자들보다 실제 탐사연구자라 확실히 구체적인 설득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분자-원자 구조 생물체인 인간 이성의 한계 또한 보여준다. 물론 칼 세이건은 훌륭한 과학자다. 그가 용매가 필요없는 생물, 전자기호적 생물 상태를 얘기할 때 좀더 파고 들어가주길 바랐지만 칼 세이건은 언질로만 끝맺었다. 그는 실리적 존재방식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기에 당연한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존재 방식은 여전히 이론에 불과하다. 과학의 절대명제인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괘변적 과학자나 미치광이 사이비 종교가가 되기 쉽상이니...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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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스포있으니 안보신 분은 통과하세요)

 

§

당신이 어떤 우주조종사인가에 따라 <인터스텔라> 영화의 의미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어떤 시간대를, 어떤 비행 노선을, 어떤 도킹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텐데, 그것은 '선택한 과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늘 그걸 말해왔다.

 

 

§§

널리 알려진 고대 그리스 격언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 입구 현판에 새겨진 문구다.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사실이 아니다. 현재 위키백과에는  이 경구의 출처로 6명을 거론하고 있다. 스파르타의 킬론,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아테네의 솔론, 밀레투스의 탈레스가 그들이다.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에서 라블레는 킬론의 격언으로 거론하고 있다. 

인간처럼 그 기원이 불명확한 '너 자신을 알라'는 언어로 만들어진 우주선이다. 나는 이 우주선에 탑승한 상태에서 <인터스텔라>와 도킹하게 됐고 예상치 못한 인셉션에 빠졌다. '아니, 이건! … 아니, 이건! … 아니, 이건….' 계속 그 상태로 3시간 내내 부들부들 무슨 전기충격요법을 받는 듯이. 게다가 블랙홀 이름은 왜 가르강튀아로 만들어가지고 어휴. 어제까지만 해도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은 무수히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신나게 말했다가 이렇게 우주 폭풍을 만날 줄이야;

라깡, 니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 쉽지 않은 리좀 산맥을 돌아다닐 일거리가 생겨버렸다. <코스모스>도 다시 들춰봐야되고... 정리가 언제 어느 정도 될 지 미지수. 친절하게도 <인터스텔라의 과학>이 나와 있으니 일거리가 좀 수월할지도. <솔라리스>가 렘의 원작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것과 달리 <인터스텔라>는 킵 손과 협력이 잘 된 모양이다.
어쨌거나 내게 이 영화는 우주과학도, 사랑도, 지구종말의 구원 얘기도 아니었다.

<인터스텔라>는 인간 기원이라는 영원한 물음이 매트릭스화된 세계였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1972)는 상징계 속의 분열을 보여줬다. 법, 질서가 와해된 솔라리스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죽음(자살/살인/희생 어떤 형식으로든)과 은폐는 인간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두 영화 곳곳에서 당신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 영화 다 주인공 아내의 빈 자리를 설정해뒀는데, 인간이 모태상실 속에서 오이디푸스적 현실과 만난다는 상징계 분석과도 맞아떨어진다. 인간의 위치는 이미 일어난 일이자 항상 무언가를 좌충우돌 해결해야 되는 '머피'(자아)이자 '쿠퍼'(초자아)였다.

 

다르게는 쿠퍼를 '오뒷세우스'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전쟁 후 귀향(일리아스)했다가 다시 길을 떠나는(오뒷세이아) 두 번의 여행을 거친다. 오뒷세우스, '미움을 받는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그는 결코 안주할 수 없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쿠퍼도 온갖 역경 끝에 (우주시대이므로 위치가 바뀐)고향과 자식에게 도착하지만 원형적 모태 '브랜트 박사'를 찾아 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

 

 

§§§§

"생명의 기원, 지구의 기원, 우주의 기원,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등을 밝혀내는 일이 인간 존재의 근원과 관계된 인간 정체성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ㅡ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리가 우주로 가고자 함은, 인식과 시간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존재론적 정복과 다름 없다.

인간 내에서 어떻게 완벽하게 인간을 조망할 수 있겠나. 지구에서 우리는 이 한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중력' 때문에. 이 과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원죄는 '중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밖을 그토록 원하게 된다. 인간이라서 신을 찾듯, 삶이 있어 죽음을 향하듯.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신은 죽었다'를 21세기 어법의 영화로 선언한 셈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에게 답을 주는 것은 '유령'이거나 '외계인'이라 불렀던 차원 너머의 인간이다. 우리가 神이라 부르던 그 영역에서 온 존재는 바로 인간이라는 것, 이 설정은 SF 영화에서 제법 제기되었지만 <인터스텔라>는 가장 완성도높은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 무훈 같은 <인터스텔라>의 끝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아주 오래된 물음도 같이 출발한다. 첫번째 전쟁을 성공시켰던 '사랑' 또한 시공간을 움직이는 인간내 중력 중 하나일 뿐이다. <인터스텔라>는 미래에서 보기엔 원시적인 방정식에 불과하지만, 동시대 인류인 내가 보기에 인간 근본에 대한 처절한 사투임은 분명하다. 

 

 

ㅡAgalma

 

 

 

 

 

 

 

 

 

 

 

솔라리스 행성처럼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인터스텔라> 속 행성들

 

 

 

 

 

<솔라리스> 오프닝씬에서 불가해한 신비처럼 펼쳐져 있던 숲

 

 

<인터스텔라> 인간의 마지막 생명줄인 옥수수 밭

와, 이 밭 위로 날아가는 무인정찰기를 따라 차를 몰고 들어갈 때 기절할 듯 좋았다.

머피가 막상 잡혀버린 무인정찰기에 대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시 보내주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쿠퍼가 그 쓸모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하던 장면은 정말 '인간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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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타르콥스키 솔라리스와 램 솔라르스 둘 다 접했지만 둘 다 뛰어난 걸작입니다. 램은 카로큽스키 영화 보고 성질을 냈다고 하지만, 이살 솔라리스만한 영화도 걸작이죠. 아직 인터스텔라를 접하지 못했네요. 아직도 극장에서 하나요

AgalmA 2015-01-02 17:41   좋아요 0 | URL
네, 걸작들이죠. 이견없어요^^.
상영관 아직 많아요. 디지털로는 어렵지 않게 보실 거예요. 시간대는 이제 좀 뒤로 밀려난 감이 있지만요. 전 아이맥스로 한번 더 보려고요.

고양이라디오 2015-11-18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맥스로 보셨나요? 전 <인터스텔라> 아이맥스로 봐서 너무 좋았어요ㅠㅠ

아~! Agalma님 저도 옥수수밭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 정말 너무 신나고 좋았어요!!!

리뷰 너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AgalmA 2015-11-20 08:28   좋아요 0 | URL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놓쳤어요; <그래비티>는 아이맥스만 보고...영화관에 두 번 가는 게 은근히 어려워요.
아, 옥수수밭 씬 때문에 아이맥스를 진짜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ㅜ

고양이라디오 2015-11-20 10: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인터스텔라 한 번 더 보려했는데 안되더라고요ㅠㅋ
 

 

 

 

 

 

 

 

 

 

 

 

 

 

 

 

(※ 글 전체가 스포이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 중 한 가지라도 본 분만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 [언더 더 스킨](소설)에서 더 진화한 [언더 더 스킨](영화)

엄밀히 따지면 조나단 글레이저의 영화 [언더 더 스킨]은 미헬 파버르의 소설 [언더 더 스킨]의 2부다.

(이후, 영화[언…], 소설[언…]이라고 표기)

소설[언…] 말미에서 히치하이킹 사냥꾼 이설리와 함께 일할 다른 '그녀'가 곧 배치될 것이라고 통보되었듯

영화[언…] 초반에 (그녀에 앞선 사냥꾼이었을) 죽어가는 여자의 옷을 차례로 벗겨 로라(스칼렛 요한슨)가 다시 입는 장면은, 그 통보 이후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영화[언…]은 소설[언…]의 진화를 보여준다.

소설[언…]에서 이설리는 꼬리와 귀와 척추를 잘라내고 각종 실험적인 성형수술을 받아 겉보기에도 불구형 인간이지만, 영화[언…]에서 로라는 그런 단계를 거칠 필요 없이 아름다운 여성의 피부를 잠수복처럼 입는다. 신체조건과 지구 적응이 불완전한 이설리는 시내 중심가 쇼핑은 엄두도 못 내고 볼품없는 시골뜨기 차림새로 도시외곽의 히치하이커들만 노리지만, 로라는 대형 쇼핑몰을 당당히 누비고 다니며 각종 패션 용품들로 치장한 뒤 도심 속 남자들을 사냥한다.  

소설[언…]에서 이설리는 닛산 스테이션왜건이나 개조되어 덜컹거리는 코롤라를 불안하게 타고 다녔지만, 영화[언…]에서 로라는 남자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커다란 밴을 느긋하게 몰고 다닌다.

그러나 아무리 진화된 '그녀들'이 나타나도 그들은 인간이 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도 없다. 

'인간들의 (오염된)음식을 먹을 수 없는 문제'는 인간 삶을 선택할 수도 없는 '정체성'의 문제를 불러오고(지구 식문화의 뿌리 깊은 유대를 생각해보라), '생식'에 관한 어떤 기능도 탑재되어 있지 않으므로(필요가 없으니까) 어떤 '性'도 될 수도 없다.

 

 

 

§§ 감정의 전쟁들 - 모멸과 선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우리의 불안은 또 하나의 노정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 피부 아래 있는 모멸감 말이다.

유럽에서 아랍인들의 테러들, 미국의 총기 사고(인종차별,왕따…), 대한한공 땅콩 회항, 국내 갑들의 횡포, 각종 자살 …… 이 사태들에서 나는 대부분 모멸들을 읽게 된다. 모멸감은 인간다운 반응과 인간다운 표출을 낳는다. 남녀노소, 인종과 종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힘없는 자는 모멸감 앞에 속으로 삭이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의 자기 파괴밖에 선택하지 못하지만, 힘 있는 자들은 자기가 받은(착각일 지라도) 모멸을 되돌려 줄 방도가 아주 다양하다. 대항할 엄두도 못 내게 으름장을 놓거나 폭행을 하고, 누군가를 시켜 총을 쏘고, 고소와 사회적 제재를 가하는 등 수단은 얼마든지 강구된다. 권력이 클수록 그 위력은 더 대단해지고 감정까지 실리니 그야말로 BOOM! 폭탄이 된다. (실리 욕심은 살짝 접어두고) 911 이후 이라크가 어찌 되었는가. 한 개인부터 기업, 국가까지 우리는 참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인든) 인간답다. 세계는 점점 다문화권으로 되어가고 있고, 타 문화를 포용하든 억압하든 자본주의 불균형의 피해자측 인간의 모멸 문제는 점점 더 불거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그녀'들은 어떤 감정으로 움직일까.

영화[언…]에서 죽어가는 여자의 옷을 벗겨 입을 때 로라는 어떤 동정이나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넘어져도 로라는 아무런 창피함도 느끼지 않았다. 

홀로 있는 로라의 차량에 덤벼든 불량배들에게 그녀는 위협을 느꼈지 여성으로서의 모멸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부부가 파도 속에 서로를 구하려고 하든 말든 그들의 아이가 해변에 버려지든 말든, 그들을 구출하려다 기진맥진해 있는 제 3의 남자를 로라는 기다렸다가 잡아오면 끝이었다.

그녀들에게 인간 세계는 삶이라는 터전이 아니라 사냥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고 선의가 없을까.

도로에서 꽃을 파는 아랍인 청년이 심부름으로 건네준 장미꽃 포장지에서 로라는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를 발견한다. 그녀는 당황해하면서도 그 피의 질감을 만진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하 때문에 밤늦게만 시장을 보러 간다는 기형 얼굴의 남자를 잡아왔다가 로라는 몰래 탈출시킨다. 그는 예쁘장한 인간의 탈을 쓴 채 굴욕적으로 살아가는 로라 자신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세계의 규칙은 그의 탈출도, 그녀의 감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도 본래 자신의 세계에도 적응할 수 없고 어떤 정체성도 가질 수 없는, 이설리와 로라는 스코틀랜드 자연 속으로 도망친다.

 

 

 

 

 

 

 

§§§ 그런데 왜 여성인가

소설[언…] 말미에서 상부로부터 다른 명령이 떨어진다. 이제 여성 인간을 산 채로 자신들에게 보내 달라는.

내게 소설[언…]의 설정은 대단히 작위적이었다. 왜 굳이 여성 사냥꾼이 위험을 감수하며 굳이 남성만을 잡아들여 고기로 만드는지에 대한 개연성 없이 굴러가는 이 소설의 작동에 동의할 수 없었다(근육은 질겨서 거세수소를 만드는 판에 근육질의 남성만 골라 잡는다는 설정이라니?). 어린이를 잡아다가 기른다거나 우리가 동물원이나 농장에서 그러하듯 남녀 한 쌍을 잡아다가 교배시켜 키우면 될 것을 왜? 또한 인간 음식에 탈이 난다는 그들이 왜 소나 고래가 아닌 잡식성 (오염된)인간을 취하는, 복잡한 장치를 작가는 만들었을까.

이쯤 되면 작가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데, 팜므파탈이니 남성적 자본주의 폭력성에 대한 응징이니로 확대해석은 하고 싶지 않다(물론 작가는 그런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훌륭한 소설은 그런 걸 넣어야 하니까?). 

내가 보기에 작가는 (인간에 대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에 집중해, 불완전한 이설리라는 여성성과 익파투아로 남자를 제압하는 장치로 만들 수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이 있을까로 출발한 것 같다. 그녀 차에 타는 낙오자들이 말하는 이 세계, 잡힌 남자들을 소비할 저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거대 자본가의 상속자로 나오는 매력적인? '암리스 베스'는 거창한 말을 지껄이고 있지만 할리퀸 소설보다 나을 게 없는 멍청이 남성캐릭터였다. 이 인물을 통한 (애매한 자본주의, 애매한 로맨스)설정 때문에 미헬 파버르 작가와 소설에 대한 내 신뢰는 급감하였다. 영화에서 이 부분을 싹 빼버리고 진짜 비정한 세계를 보여준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 안목은 탁월했다. 납치된 인간을 디지털적으로 흡수하는 방식 또한  미헬 파버르보다 해석면에서도 우수했다.

 

 

 

 

 

 

 

 

§§§§ 3부 또한 진행형일 뿐 …

소설과 영화 모두 여성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나약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지만 결국 자살이자 희생이며 파멸이었다.

역사가 그러했듯 욕망이 변함없듯,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어떤 인물(외계인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새로운 형태의 3부가 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겪을 뿐일 것 같다. 무사히, 한 차례, 개인적인, 지구 반대편에서, 뉴스화된, 뭐 그런 식의 꼬리표를 달고서 계속……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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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09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친절하십니다 !_! 책을 읽지 않아도 맥락이 이해가 됩니다.^^
생경하고 낯선 이야기라 괴상하게 느껴질 영화였는 데도, Agalma님의 리뷰를 보면 절대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군요!
영화를 보고 저는 한참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아야 했을 정도로 혼란의 정도가 심각하였는데,
그때 이 리뷰를 읽었더라면, 오랜시간 방황하지 않고 정리를 빨리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입니다.
충고하신데로 책을 읽는 시간은 절약하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해요~!!


붙임. 저도 Agalma님이 첨부하신 리뷰의 마지막 이미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고 그렇네요.^^ 하하!

AgalmA 2015-07-10 02:13   좋아요 1 | URL
영화 정말 잘 만들었죠! 저 이미지는 누구라도 그랬을 듯~ 이런 이미지 잡아내는 게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이죠!!

도움이 되셨다니 미소 :)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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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해석들에 반, 아니 불만스럽다.
(수전 손탁<해석에 반대한다> 다시 읽어봐야 되는데...)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
1차 감상자들 반응은 엽기, 폭소, 조롱으로 끝. 라블레가 서문에서 주의를 줬는데도 그런 답밖에 못 가져가다니 애석한 일이다. 애들 때만큼이나 참 똥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순수니 본능이니로 위장하지 말기를, 언제나 해석은 독단과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2차 독해자들 또한 역시나 라블레가 서문에서 주의를 준, 플라톤 [국가]2부에서 나오는 개처럼 그 속 골수만 빨아먹으려는 자세다. 바흐친, 카니발리즘, 르네상스와 위마니슴...대단한 알레고리가 그 속에 숨어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그 자체에서만 무언가를 얻으려는 독법. 독자들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맞나 싶다. 왜 자기 해석은 없고 기존 이론에 대입하려고만 하는가. 정치적 대입은 그나마 현실적 접근은 해보려고 한 것 같다.
3차 독해자들이 보이지 않는 게 내가 눈이 어두워서인지 모른다(사실은 찾기 귀찮아서). 역시나 내가 논문을 쓸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의 단편만 남긴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16C)과 후대 작품인 <걸리버 여행기>(18C초), 사드(18C 후반) 비교분석이 요구된다(17C <돈키호테>와는 비교재미는 없을 거 같은데... 칭송하는 고전들이니 서구에서는 여러모로 분석했을 거다. 뭘 발견했을까) 라블레 저서는 금서가 많이 돼서 당시 파급력은 강하지 않았을 거 같지만 작가층에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을 거 같다. 후대 작품이 각 시대 사조로 인해 어떤 걸 더 표방해 발전했는지 비교해볼 지점이 있다. 계몽주의 추종자였던 사드는 해학과 웃음보다 사디즘으로 발전했다(당연히 라블레처럼 금서 조치) 조만간 <걸리버 여행기> 원전번역을 읽어봐야 할 일거리가 또 생겼다. 취미생활 맞나.

라블레가 의사였던 만큼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과 현대의 몸철학, 현상학 관련해 달리 살펴볼 수도 있다. 몸을 통해 세계를 보는 작가의 인식들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가, 요즘 내가 작품을 볼 때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밀란 쿤데라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에서 왜 전립선 비대증 오줌싸개 칼리닌을 통해 칼리닌그라드를 구축했는지, 칼리닌그라드는 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는지, 작가의 의도가 흥미롭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밀란 쿤데라는 라블레적이다. 소련에 대한 풍자. 전체 작품의 카니발리즘적 기조. 그가 자신의 작품 주석과 해설을 거부하는 것 또한 라블레가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서문에서 밝힌 바를 계승하고 있는 것 같으니 관련지어 생각할 수 밖에. 나는 이런 괘변적인 비교들이 재밌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에서처럼 행동으로 극단의 재미를 추구할 순 없지 않은가. 토마스 만 최근 번역작 <뒤바뀐 몸과 마음>도 이런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워 장바구니~ 토마스 만 <마의 산>,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 그의 소설 많은 부분이 병을 통한 신체 관찰-정신 흐름의 고찰이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은 여러모로 대입해 볼 것이 많아 작품 속 내용보다 더 생동하는 작품이다. 500년 전 사람이 이렇게 현재적으로 즐겁게 만들다니, 역시 소설은 놀랍다.
현재 한국엔 위무를 위한 작품보다 이런 작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격이라 해도 생동하지 못하고 고여있다. 단지 시대분위기 때문일까. 안주하려는 생각들을 자꾸 깨워줄 장치들이 많아야 한다. 울며 위안만 해서는, 똥만 보고 조롱하다 끝나서는 이 현실에서 어떤 맷집도 키울 수 없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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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르팡디아를 초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삽화 많은 어린이용 가르팡디아였습니다.
물론 어린이용 축약본이기는 하나, 그때 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AgalmA 2015-01-08 16:54   좋아요 0 | URL
곰곰 생각하는 발님과 참 어울리는 작품이죠. 이 책 읽을 때 곰곰 생각하는 발님 문체가 오버랩이 되기도 했어요 ㅎ 어릴 때부터 본인 취향을 제대로 아셨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9 09: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그렇습니까 ? 얼른 사서 봐야겠네요. 기억은 안 납니다만. 하여튼 무지 많이 먹고 무지 많이 똥 싸고.. 뭐 그런 내용만 기억이 납니다.

AgalmA 2015-01-09 13:25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곰곰 생각하는 발님이 라블레를 엄청 좋아하셔서 그런 문체이신 건가 했을 정도. 원작 꼭 보세요. 곰곰 생각하는 발님의 잃어버린 형님 만난듯 반가울, 아니 닮아서 싫을래나ㅎ 잊지마세요. 나랑 한몸 같은 작가 만나기가 그리 쉬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