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전체가 스포이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 중 한 가지라도 본 분만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 [언더 더 스킨](소설)에서 더 진화한 [언더 더 스킨](영화)

엄밀히 따지면 조나단 글레이저의 영화 [언더 더 스킨]은 미헬 파버르의 소설 [언더 더 스킨]의 2부다.

(이후, 영화[언…], 소설[언…]이라고 표기)

소설[언…] 말미에서 히치하이킹 사냥꾼 이설리와 함께 일할 다른 '그녀'가 곧 배치될 것이라고 통보되었듯

영화[언…] 초반에 (그녀에 앞선 사냥꾼이었을) 죽어가는 여자의 옷을 차례로 벗겨 로라(스칼렛 요한슨)가 다시 입는 장면은, 그 통보 이후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영화[언…]은 소설[언…]의 진화를 보여준다.

소설[언…]에서 이설리는 꼬리와 귀와 척추를 잘라내고 각종 실험적인 성형수술을 받아 겉보기에도 불구형 인간이지만, 영화[언…]에서 로라는 그런 단계를 거칠 필요 없이 아름다운 여성의 피부를 잠수복처럼 입는다. 신체조건과 지구 적응이 불완전한 이설리는 시내 중심가 쇼핑은 엄두도 못 내고 볼품없는 시골뜨기 차림새로 도시외곽의 히치하이커들만 노리지만, 로라는 대형 쇼핑몰을 당당히 누비고 다니며 각종 패션 용품들로 치장한 뒤 도심 속 남자들을 사냥한다.  

소설[언…]에서 이설리는 닛산 스테이션왜건이나 개조되어 덜컹거리는 코롤라를 불안하게 타고 다녔지만, 영화[언…]에서 로라는 남자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커다란 밴을 느긋하게 몰고 다닌다.

그러나 아무리 진화된 '그녀들'이 나타나도 그들은 인간이 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도 없다. 

'인간들의 (오염된)음식을 먹을 수 없는 문제'는 인간 삶을 선택할 수도 없는 '정체성'의 문제를 불러오고(지구 식문화의 뿌리 깊은 유대를 생각해보라), '생식'에 관한 어떤 기능도 탑재되어 있지 않으므로(필요가 없으니까) 어떤 '性'도 될 수도 없다.

 

 

 

§§ 감정의 전쟁들 - 모멸과 선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우리의 불안은 또 하나의 노정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 피부 아래 있는 모멸감 말이다.

유럽에서 아랍인들의 테러들, 미국의 총기 사고(인종차별,왕따…), 대한한공 땅콩 회항, 국내 갑들의 횡포, 각종 자살 …… 이 사태들에서 나는 대부분 모멸들을 읽게 된다. 모멸감은 인간다운 반응과 인간다운 표출을 낳는다. 남녀노소, 인종과 종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힘없는 자는 모멸감 앞에 속으로 삭이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의 자기 파괴밖에 선택하지 못하지만, 힘 있는 자들은 자기가 받은(착각일 지라도) 모멸을 되돌려 줄 방도가 아주 다양하다. 대항할 엄두도 못 내게 으름장을 놓거나 폭행을 하고, 누군가를 시켜 총을 쏘고, 고소와 사회적 제재를 가하는 등 수단은 얼마든지 강구된다. 권력이 클수록 그 위력은 더 대단해지고 감정까지 실리니 그야말로 BOOM! 폭탄이 된다. (실리 욕심은 살짝 접어두고) 911 이후 이라크가 어찌 되었는가. 한 개인부터 기업, 국가까지 우리는 참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인든) 인간답다. 세계는 점점 다문화권으로 되어가고 있고, 타 문화를 포용하든 억압하든 자본주의 불균형의 피해자측 인간의 모멸 문제는 점점 더 불거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그녀'들은 어떤 감정으로 움직일까.

영화[언…]에서 죽어가는 여자의 옷을 벗겨 입을 때 로라는 어떤 동정이나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넘어져도 로라는 아무런 창피함도 느끼지 않았다. 

홀로 있는 로라의 차량에 덤벼든 불량배들에게 그녀는 위협을 느꼈지 여성으로서의 모멸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부부가 파도 속에 서로를 구하려고 하든 말든 그들의 아이가 해변에 버려지든 말든, 그들을 구출하려다 기진맥진해 있는 제 3의 남자를 로라는 기다렸다가 잡아오면 끝이었다.

그녀들에게 인간 세계는 삶이라는 터전이 아니라 사냥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고 선의가 없을까.

도로에서 꽃을 파는 아랍인 청년이 심부름으로 건네준 장미꽃 포장지에서 로라는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를 발견한다. 그녀는 당황해하면서도 그 피의 질감을 만진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하 때문에 밤늦게만 시장을 보러 간다는 기형 얼굴의 남자를 잡아왔다가 로라는 몰래 탈출시킨다. 그는 예쁘장한 인간의 탈을 쓴 채 굴욕적으로 살아가는 로라 자신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세계의 규칙은 그의 탈출도, 그녀의 감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도 본래 자신의 세계에도 적응할 수 없고 어떤 정체성도 가질 수 없는, 이설리와 로라는 스코틀랜드 자연 속으로 도망친다.

 

 

 

 

 

 

 

§§§ 그런데 왜 여성인가

소설[언…] 말미에서 상부로부터 다른 명령이 떨어진다. 이제 여성 인간을 산 채로 자신들에게 보내 달라는.

내게 소설[언…]의 설정은 대단히 작위적이었다. 왜 굳이 여성 사냥꾼이 위험을 감수하며 굳이 남성만을 잡아들여 고기로 만드는지에 대한 개연성 없이 굴러가는 이 소설의 작동에 동의할 수 없었다(근육은 질겨서 거세수소를 만드는 판에 근육질의 남성만 골라 잡는다는 설정이라니?). 어린이를 잡아다가 기른다거나 우리가 동물원이나 농장에서 그러하듯 남녀 한 쌍을 잡아다가 교배시켜 키우면 될 것을 왜? 또한 인간 음식에 탈이 난다는 그들이 왜 소나 고래가 아닌 잡식성 (오염된)인간을 취하는, 복잡한 장치를 작가는 만들었을까.

이쯤 되면 작가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데, 팜므파탈이니 남성적 자본주의 폭력성에 대한 응징이니로 확대해석은 하고 싶지 않다(물론 작가는 그런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훌륭한 소설은 그런 걸 넣어야 하니까?). 

내가 보기에 작가는 (인간에 대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에 집중해, 불완전한 이설리라는 여성성과 익파투아로 남자를 제압하는 장치로 만들 수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이 있을까로 출발한 것 같다. 그녀 차에 타는 낙오자들이 말하는 이 세계, 잡힌 남자들을 소비할 저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거대 자본가의 상속자로 나오는 매력적인? '암리스 베스'는 거창한 말을 지껄이고 있지만 할리퀸 소설보다 나을 게 없는 멍청이 남성캐릭터였다. 이 인물을 통한 (애매한 자본주의, 애매한 로맨스)설정 때문에 미헬 파버르 작가와 소설에 대한 내 신뢰는 급감하였다. 영화에서 이 부분을 싹 빼버리고 진짜 비정한 세계를 보여준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 안목은 탁월했다. 납치된 인간을 디지털적으로 흡수하는 방식 또한  미헬 파버르보다 해석면에서도 우수했다.

 

 

 

 

 

 

 

 

§§§§ 3부 또한 진행형일 뿐 …

소설과 영화 모두 여성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나약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지만 결국 자살이자 희생이며 파멸이었다.

역사가 그러했듯 욕망이 변함없듯,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어떤 인물(외계인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새로운 형태의 3부가 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겪을 뿐일 것 같다. 무사히, 한 차례, 개인적인, 지구 반대편에서, 뉴스화된, 뭐 그런 식의 꼬리표를 달고서 계속……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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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09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친절하십니다 !_! 책을 읽지 않아도 맥락이 이해가 됩니다.^^
생경하고 낯선 이야기라 괴상하게 느껴질 영화였는 데도, Agalma님의 리뷰를 보면 절대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군요!
영화를 보고 저는 한참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아야 했을 정도로 혼란의 정도가 심각하였는데,
그때 이 리뷰를 읽었더라면, 오랜시간 방황하지 않고 정리를 빨리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입니다.
충고하신데로 책을 읽는 시간은 절약하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해요~!!


붙임. 저도 Agalma님이 첨부하신 리뷰의 마지막 이미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고 그렇네요.^^ 하하!

AgalmA 2015-07-10 02:13   좋아요 1 | URL
영화 정말 잘 만들었죠! 저 이미지는 누구라도 그랬을 듯~ 이런 이미지 잡아내는 게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이죠!!

도움이 되셨다니 미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