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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시 ㅣ 말들의 흐름 3
정지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평점 :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가 있는데, 정지돈도 그런 것 같다. 작법과 문체가 뚜렷한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는 같은 이유로 싫어하고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인물의 정서나 인물 간의 갈등 중심인 통상적인 소설과 다른데, 낯선 소재(지명, 인명, 역사적 사건, 예술과 문화 가십 등)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먼저 당부할 것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과 거부감은 정지돈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지적 특성에 있다. 인간은 정보 과잉의 피로와 해석의 부담을 싫어한다. 정지돈이 그런 것을 감안해 글을 썼다면 지금의 모습은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돈이 정말 독자나 기성 문단과 싸우자는 걸까. 작가는 영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골몰할 뿐이다. 언어를 전달 매개로 쓰고 있지만 다분히 영화적 사고 특성도 반영되고 있다. 정지돈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런 글을 썼다.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나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 내가 그 거리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빛 때문에, 혹은 인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찍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찍지 않고 그걸 잘라낼 것이다.
(중략)
필립 그랑드리외는 <음지>의 제작노트에 영화를 만들지 마라, 이미지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저절로 프린트되도록 하라, 라고 썼다고 동기는 말하며 영화 이미지란 사진 이미지와 어떻게 다르고 저절로 형성되는 이미지는 시간과 인물 사이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 운동은 시간과 인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운동이 시간과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사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후에 벌어지는 시간이 역사라면 우리는 역사 없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필립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시간과 인물에 전혀 다른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지돈은 소설에 요구되는 사건의 인과와 그에 따른 교훈에는 흥미가 없다. 몽타주처럼 인상적인 무엇들의 배치에 흥미가 있고, 시간과 인물을 교직(交織)하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의 글이 에세이 같은 문예 편력기 같은 것도 이 때문인데, 그래서 정지돈은 소설가보다 창작자라는 게 더 적확하다. 소설이 영화화되고 영화가 소설로 옮겨지는 게 다반사인데, 장르 구분은 작법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찍을 돈도 없고 수많은 스텝을 통솔할 능력도 없는 히키코모리라도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렵더라도 유튜브에 올린 단편 정도는 혼자 만들 수 있다(과연 히키코모리일까??). 노력의 문제일까, 재능의 문제일까, 운의 문제일까를 따지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닥치고 만들어라! 시를 써도 시 같지 않고, 영화관에서 콜라를 보고 미친 듯이 잠을 잘 지라도 정지돈의 소설은 자기 탐닉에 빠진 창작은 아니다.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곧잘 소재로 쓰는 1960년대 뉴욕의 예술과 가십의 세계는 예술에 진지한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에게 “진지함이란 시를 포함한 예술들이 살아남는 최고의 전략이다.”(「점심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시」, 65~66쪽) 무엇과 무엇을 잇는 불가분의 관계는 없고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지만, 이미 이루어졌기에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삶’은 그에게 끝없는 탐구 거리다.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군의 말처럼 ‘꿈’을 가진 우리는 이미 최고의 영화를 소유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꿈을 모방하려는 노력 중 하나다. 우리는 영화에서 수다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품고 있는 진귀한 무엇을 원한다. 시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은 감정이나 영원성의 결여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21쪽)이듯, 우리는 안개 너머의 진짜를 원한다. 정지돈은 시와 관련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두 권을 꼽았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회상』을 써서ㅡ“예술가에게 세계 탐지 감지는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와 마찬가지로 무기이자 도구다. 그리고 유일하게 실제적인 것은 작품 자체다(아크메이즘의 아침)”ㅡ 남편 오시프 만델슈탐의 작품이 조명되도록 만들었다. 시인 이장욱은 『혁명과 모더니즘』을 써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과 이론가들을 소개했는데, 정지돈은 이장욱의 평론을 통해 ‘아름다움과 분석적인 것은 반대 항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과 편파적인 것 역시 반대가 아니다’라고 느꼈다.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좋은 글이었다고 평가하며, 말을 하기 위해서 배제와 적대가 가치처럼 쓰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결여나 허물도 인정하는 게 좋은 글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이 두 책을 고른 정지돈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글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상통한다. 묵혀 있는 걸 찾아내고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 분주한 세계 탐지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다름 아닌 그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 그가 원하는 ‘순수한 긍정과 기쁨’을 얼마나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환멸 속에서도 계속 쓰고 있는 건 성공적이란 소리가 아닐까. 마감과 밥벌이에 쫓겨서만 썼다면 몇 년이나 가겠나.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또는 일부만 진실이다. 언어는 아무리 완벽해도 50퍼센트 부족하며 수사는 100퍼센트 오류다. 언어가 100퍼센트 진실일 때는 오로지 언어가 언어 그 자신으로 작동할 때뿐이다. 이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진실에 대한 감각은 뭘까. 어떤 언어를 접했을 때 정확히 표현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 것일까.”
ㅡ 「나는 ~한다, 로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 ~다.」, 43쪽)
정지돈은 예술의 진정성에 기대지 않고 신변잡기적이고 가십에 가까운 시를 쓴 프랭크 오하라를 옹호했지만, 위의 문장을 보면 그가 문학의 진정성 딜레마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그는 낡은 시네필리아, 작가주의, 기성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문체는 모로 가는 반항적 글쓰기가 아니라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탐구의 글쓰기다. 그가 소설가든 창작자든 문제 될 건 없다.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ps) 정지돈, 금정연, 이상우, 오한기 등의 작가들이 ‘후장 사실주의’를 기치로 소통하는 게 흥미롭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던 기성 문단과 얼마나 다른 변별을 보여주는지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이슈가 됐던 ‘미래파’가 자멸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그들도 문단을 이루는 한 흐름이고, 권력도 없는 우리에게 뭘 바라나! 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