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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영화 ㅣ 말들의 흐름 2
금정연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평점 :
FAIR!
자기 암시를 성공 비결로 과대 포장하는 자기 계발서들은 요리조리 끼워 맞추면 뭐라도 하나 맞출 수 있는 오늘의 운세 같다. 그렇다면 서평을 쓰면서 서평을 안 쓴다고 말하는 서평가이고, 실패라고 하면서 계속 글을 발표하고, 문학과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글 또한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금정연의 포즈는 뭘까. 그는 ‘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가 픽션이고, “픽션은 언제나 하나의 현실이고 그것은 현실을 수선”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포즈는 픽션이면서 현실이다.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untruth’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픽션이 아닌 것들이 무수히 많고, 사실에 근거한 명제로만 이루어진 글쓰기도 여전히 픽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픽션은 언어의 인식론적인 위상보다는 독자가 그 언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와 더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픽션은 근본적으로 ‘믿어주기make believe’의 문제이며, 우리는 동화 이야기를 ‘믿어주기’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믿어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적인 목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ㅡ 「89」, 원문은 테리 이글턴 「‘2020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3기 해외석학강좌 제2강 문학의 내면’ 강연자료집」, 25~26쪽
저자는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으로 사용하고, 독자인 우리는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처럼 믿어준다. 금정연 텍스트는 장점이 많지만, 그의 문체가 주는 재미의 주요 기반은 바로 그것이다. 픽션의 무대가 넓어질수록 글 쓰는 이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고, 상상의 폭이 넓어지면 독자도 즐겁다. 사실 중심의 보고서 같은 글은 한정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더럽게) 재미가 없다. “웰즈는 말한다. …… 리얼리티라고요? 그건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물컵에 담긴 칫솔 같은 거죠. 버스표나 월급 그리고 무덤 같은 거요.”(「90」) 모든 일이 그렇듯 픽션이 늘 성공적인 건 아니라서 금정연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 <나랏말싸미>(2018)의 흥행 참패는 그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반복해 오열했다. 영화의 상영 및 해외보급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픽션 같은 파장이었다.
비평가 데이비 히키는 ‘비평은 글을 가지고 하는 에어기타’라고 했다. 작가가 되지 못한 자들의 직업=비평가라는 평은 조롱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비평가가 비평 대상에 대한 기억 속에서 공허하고 공감의 제스처가 난무하며 조용한 발광을 하는 에어기타 연주자이기만 할까. 작가나 영화감독처럼 비평가도 무엇을 보고 어디에 배치할지에 대한 고민은 동일하다. 그들은 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그 속에서 자기만의 α를 말하는가. 튀어 보이려고?(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 않다)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데이비드 실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낡은 시네필리아는 보수적이고 향수적인 구석이 있고, 시네필적 경험(특히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의 경험)은 소중히 간직되면서 신성시되고, 한 사람의 생애를 걸쳐 고정된다”(기리쉬 샴부, 「새로운 시네필리아를 위하여」, 영화 평론가 한창욱의 네이버 블로그 인용을 금정연이 인용)라고 하듯이, 우리의 글은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경험과 상상과 사유의 배수로를 통과해서 나온다. 비평가는 확대경이 될 수도, 현미경이 될 수도 있고, 그저 관심종자가 될 수도 있다. 비평이 단순히 ‘배설’이나 ‘자기충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픽션을 정의하듯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를 카이로스(의미화된 시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현실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픽션(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는 남자가 과거를 돌아보는 픽션)을 만들어내는 <화양연화>와 이미 만들어진 픽션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 현실과 겹치는 이야기(잊고 있던 기억을 누군가 도용해(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는)를 만들어낸 픽션을 보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극장전>을 연결하며 금정연은 ‘담배’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걸 꼬집을 때 비평가는 얼마나 신나는가.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인데, <화양연화>에서 클로즈업된 시계와 담배를 피우는 양조위의 모습이 반복해서 제시되는 것은 영화의 수많은 신들과 조각난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로 매끄럽게 이어주는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현실(혹은 픽션과 픽션)을 연결하는 비평은 꾸러기 같은 재미를 준다.
우리는 내일 당연히 살아있을 것처럼 예상하고 살아간다. 잠에 빠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게 픽션이 아니면 뭔가. 진실과 허구를 명확히 가를 수 없는 픽션처럼 담배도 많은 해석을 양산한다. 애초에 흡연은 태우는 행위인가 피우는 행위인가(두 표현은 엄밀히 다르다). 2018년 4월, 아내의 임신 소식에 금정연은 담배를 끊었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 담배 한 갑(하필 담배 이름이 HOPE!)을 펴서 금(정이 사라진)연의 세계에서 즉시 제명된다.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했으니 흡연자가 되고, 다시 담배를 안 피우면 비흡연자가 되는 게 아니다. 흡연과 금연 사이에는 보완해야 할 많은 결손, 언제든 변할 수 있든 가변성이 상주한다. 중독과 상술로만 말할 수 없듯이 흡연과 금연의 잣대로 담배가 존재하는 세상을 평가할 수도 없다. 다른 어디에서보다 담배는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카메오 출연자였다. 담배는 즉시 시선을 잡아끈다. 금정연은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키스신 모음처럼 흡연 장면만 모았다.
“또 다른 기억들: 담배를 피우는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으며 등장해 담배 연기를 뱉으며 죽는 장 폴 벨몽도(<네 멋대로 해라>). 턱을 괸 채 훗날 헵번 파이프라고 불리게 될 기다란 담배 홀더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오드리 헵번(<티파니에서 아침을>), 정장을 빼입고 침대에 누워 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알랭 들롱 (<고독>), 복제인간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를 받으며 불안을 감추기 위해 두꺼운 궐련을 피우는 숀 영(<블레이드 러너>),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윤발(<영웅본색>). 하얀 러닝셔츠에 브리프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며 날개 없는 새에 대한 독백을 하다가 뜬금없이 탱고를 추던 장국영(<아비정전>).야구모자를 거꾸로 쓴 채 택시를 몰며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지상의 밤>). 1966년 포드 썬더버드를 타고 달리며 담배를 피우는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델마와 루이스>), 담배를 입에 물고 대화를 나누던 개 같은 남자들(<저수지의 개들>), 사람들 가득한 극장 관객석에 앉아 시가를 피우며 큰소리로 웃는 로버트 드니로(<케이프 피어>). 침대에 엎드려 정면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우마 서먼(<펄프 픽션>). 살인 업무를 앞두고 금색 가발에 선글라스를 쓰고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앉아 긴 담배를 짧게 피우는 임청하(<중경삼림>). 이어폰을 꽂고 오토바이에 기대 눈을 감고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정우성(<비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따로 또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국영과 양조위(<해피 투게더>), 연신 담배를 피우던 양조위와 딱 한 번 담배를 입에 문 장만옥(<화양연화>), 60년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스파게티웨스턴)와 70년대의 잭 니콜슨(코에 반창고를 붙인 채 담배를 피우며 무섭게 웃는 <차이나 타운>), 80년대의 알 파치노(특히 <스카페이스>)와 90년대의 브루스 윌리스(물론 <다이하드> 시리즈). 함께 출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에 따르면 영화에서 한 일이라곤 담배를 피우는 것밖에 없었다던 빌리 밥 손튼(<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정신병동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는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처음 만나는 자유>), 담배를 피울 때마다 헵번 파이프를 잊지 않던 1940년대풍의 스칼렛 요한슨(<블랙 달리아>), 해변을 바라보며 데킬라와 함께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뇌종양에 걸린 틸 슈바이거(〈노킹온 헤븐스 도어>). 자신이 흘린 피에 마지막 담배를 비벼 끄던 폐암 말기의 키아누 리브스(<콘스탄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조각난 기억을 더듬으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리프라이즈>) 혹은 공원 벤치에 앉아 친구의 충고를 따라 인생을 먼발치에서 돌아보며 담배를 피우는 안더스 다니엘슨 리(<오슬로, 8월 31일>) 담배를 피우며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받아쓰는 엠마 스톤(<헬프>). 침대에 누운 채 한 손으로 지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는 라이언 고슬링과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엠마 스톤(<갱스터 스쿼드>), 2000년대의 공효진(<품행 제로>와 <행복>), 2010년대의 고아성(<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위 문장은 언어로 된 영화 액자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담배의 효과가 그렇듯 라쿠나(Lacuna,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저 이미지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있지만 불러내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처럼 영화가 제시하는 이미지들도 라쿠나를 살리는 마술이다. 감독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FAKE가 가미되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실존적 공허함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는데, 궁극적으로 무의미할 뿐인 인간의 이야기는 시작, 중간부, 결말을 산뜻하게 지닌 질서 있는 유기체를 기만적으로 엮어낸다. 이렇듯 예술은 형식이 지닌 위안적 힘을 활용한다. 허구의 연금술은 사소한 일상사를 문학 속의 모험으로 변모시키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이야기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모든 내러티브는 기표들의 시간적 연속체를 상상된 사건들의 연속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자들이 post hoc ergo propter hoc('이 이후에 있는, 따라서 이 때문에)이라고 부른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기도 하였다. 단순히 연결된 것을 실제 결과로 혼동함으로써 내러티브는 단순한 반복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에 대해 인과법칙을 강제로 부여한다. 따라서, 모더니즘적인 예술의 '탈인간화에는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소망성 - 심지어는 가능성 - 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 함축되어 있다. 허구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비판을 과격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 제안한다.
*더욱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한데, 결국 모든 인간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로버트 스템,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위작 예술의 거장이었던 엘미르 드 호리를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명작을 만들었지만 장 뤽 고다르의 잔인한 인성과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가 그것을 덮어줄 면피는 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걸 뭉텅 그려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소문난 골초였던 프로이트는 의사들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금연을 거부하다 그로 인해 구강암으로 사망했다.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을 충실히 돌봤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한 실패담일까. 한 사람의 삶은 이렇듯 많은 이율배반, 이해하기 어려운 불협들도 이뤄진다. 금정연이 절필하고 싶다! 책을 태워버리고 싶다! 노래를 하면서 글을 쓰듯이. 피우고 끊기를 반복하는 담배처럼, 평생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듯이, 금정연의 실패 담론은 불가능의 다른 말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공간이 필요한 담배 같으니까. 연기와 꽁초와 냄새는 나중 문제고 기어코, 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