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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은 우울증에 대한 전방위적 조망, 더불어 '우울사회'로 지칭되는 이 시대 기운의 해법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는 책이다. 17세기 로버트 버튼이 멜랑콜리에 대한 천 년간의 사상을『멜랑콜리의 해부』(국내 미번역)로 정리한 것만큼이나 현대적으로 훌륭히 계승한 책인 것 같다. 저자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기도 하지만, 학술적 연구 수집만이 아닌 서아프리카 주술 치료 의식 '은두프'를 받으러 세네갈까지 갈만큼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우울증 치료들을 찾아 직접 체험하며 전한다. 또한 인종별, 나라별, 계층별, 성별, 의약별, 생활 사건, 역사적, 정치적 등 세세한 접근점도 놓치지 않는다.

 

BC 5세기 전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정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치료 접근에 지지부진했었다는 게 기가 막히고, 현재의 사회적 이론들과 심리치료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그 양상은 정신생물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나뉘어 치열히 논쟁 중이라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만큼이나 괴리스럽다. 이런 상황을 보자니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까지 의심될 정도다

 

우울증을 바라본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전혀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중세시대 도덕적 박해와 처벌 -> 르네상스 시대의 우울증 미화(일종의 천재병) -> 이성주의 시대(인간의 나약함) -> 18세기 후반 신교 금욕주의(사회의 타락, 귀족병)/낭만주의(직관의 힘) -> 19세기 염세주의/본격적인 뇌 질환으로서의 접근

 

시대에 따라 우울증을 보는 관점이 판이했고, 여전히 우리는 우울증 환자를 기피하거나 불편해하는 거리감을 가지며, 우울증은 자기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의지적 문제라는 편견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앤드류 솔로몬은 동양권에서 특히 이런 편견이 심하다고 한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식한 현대는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전달물질 등과 우울증의 관련성을 찾아내 각종 치료제를 개발해 내놓고 있다. 이제 그러한 약들을 인류를 위해 잘 활용하고 있을까, 그또한 그렇지가 않다.

 

p497 현재 미국에는 빈곤층의 우울증을 발견하거나 치료하는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기 때문에 빈곤층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형편이다. 저소득층 의료보험 프로그램인 메디케이드 대상자의 경우 광범위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본인이 나서서 권리 주장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p499 진보적 정치가들은 빈곤층의 불행을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반면, 우파 정치인들은 그것을 게으름의 결과로 여겨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의 빈곤층에게 그것은 고용의 기회나 일하고자 하는 동기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장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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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 출간되었는데 위에 제시된 미국시점과 지금 한국 사회 우울증 취약계층의 상황이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진 건 모르고, 일자리 창출이나 생활보조비 찔끔 주는 걸로 대책이라 말한다. 불안과 우울이 세대를 거치며 폭력양상화 되고 비관자살, 사망사고가 급격해지고 있는데도 보도 자제를 미봉책으로 삼고 있으니....

 

 

<한낮의 우울>은 우울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분야 견문, 사회적 통찰에는 좋은 책이지만 상담치료 같은 효과를 바라는 독자에게는 썩 부합하진 않는다. 극단적인 우울 상태에 있는 독자라면 700 페이지 분량을 읽어내려가다가 더 우울해질 수도 있다;

시급한 우울 처방이 필요한 사람에겐 디어도어 루빈 <절망이 아닌 선택>을 권한다. 아래에 본문을 살짝 소개해본다.

앤드류 솔로몬이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 받아든 고래수프처럼 당신에게도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ㅡAgalma

 

 

 


 

 

<절망이 아닌 선택> 내용 中

 

 

/자기 파괴를 막아주는 도움/ 

 

어떤 사람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봐야 한다. 그가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대상은 자신을 스스로 이상화한 관념에 미치지 못하는 양상들을 종합한 집성체(集成體)이기가 쉽다. 세상에 대한 분노라던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욕구나, 부활에 대한 착각 같은 부수적인 소득을 염두에 둔 다를 동기들과는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도움’과 연관지어 다시 하겠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를 증오하는 정서적인 좌절감에 시달리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데 대한 당혹감 그리고 자존심의 외곽에 가해지는 모욕감이 인생을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5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중에 300만 달러가 남은 사람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까닭은 그의 자부심 외곽을 이루었던 경영상의 천재성이나 만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입은 손실은 창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취해야 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조처를 설명하겠다. 희생자의 성격이나 이른바 ‘장점’에 관해서 얘기해주려는 유혹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해야만 한다.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그러니까 우선 이렇게 해야 한다.

 

1.어떤 ‘부수적인 소득’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희생자가 이해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2.엉뚱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얘기해줘야 한다. 그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자신을 말이다. 폭군적인 지배자이자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나로부터, 나를 보호할 자는 오직 바보뿐이다.

3.사람에게는 자아가 여럿이며, 한 자아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하나는 살아남지만, 그것은 육체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얘기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4.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은 논리적인 이유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통제가 가능하고, 제거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실질적인 유예(猶豫)희망을 제공해야 한다.

5.우리는 당장 그를 ‘인간화’하고, 인간이란 정말로 무엇인지 현실을 깨우쳐주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단점과, 한계성 따위의) 인간적인 속성들에 관해서 얘기했지만, 이렇듯 강렬한 절망의 반응에 임했을 때는 우리들의 간섭이 각별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자기 수용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증오를 크게 희석시키는 자비의 힘을 위한 효과적인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자기 이상화라는 형태의 간접적인 자기증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영광으로부터 더욱 몰락하는 부수적인 위험을 막아주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에게, 특히 아주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 왜 우리들은 ‘좋은’ 성품을 강조하기를 조심하고, 우선 다섯 단계의 조처부터 충분히 실시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가장 심한 좌절감을 느낄 때, 우리들은 자신에 대한 증오와 가장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래서 우리들의 증오가 정당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철저히 인간적인 단점을 강조함으로써 증오를 정당화하고, 그들이 당연히 그런 인물이 되었어야 한다고 믿게끔 자신을 착각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형과 비교하면서, 실제의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느냐 하는 차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타인들로부터 듣게 되는 얘기의 내용을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냐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 좌절한 기분에서는 우리들이 그런 자질이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나아가서 우리들은 그런 자질들을, 우리들로서는 성취할 능력이 없는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순종을 여전히 요구하는 무서운 감독관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성품'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적인 감독관이 되고, 거기에서의 탈출은 마비시키는 절망감이나 죽음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한낮의 우울>
P201 "연민이 아니라 수고가 치료법이다. 수고는 뿌리 깊은 슬픔의 유일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 샬로트 브론테
P203 "어떤 병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라면 그 병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 안톤 체호프

<한낮의 우울>
P242 "내가 목발을 짚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춤추러 가자고 하지 않겠죠." 가족들이 기분 전환을 시켜 주겠다고 자꾸 나가자고 졸라서 못 견디겠다는 한 여성의 말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보이지 않는 깁스를 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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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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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인용들을 보며, 이건 영락없이 모리스 블랑쇼인데...했더니 역시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 비평집도 있었다. 왜 그런지 두 사람의 문장을(특히 블랑쇼의 소설들과) 나란히 읽어보면 당신도 대번에 알게 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하여간 나도 우치다 타츠루씨가 블랑쇼 연구하다 레비나스에게 빠진 것과 똑같이 되려나.......하며 읽어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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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소감은…… 기꺼이 다 읽은 기분이 아니라 다 잃은 기분이다. 허허허....

이 책을 읽/잃기 전에 데카르트의 성찰과 후설의 현상학을 읽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그들의 어떤 점과 맥락을 같이하며 어떤 것을 넘어서려 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그 외 많은 경험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른의 철학이라 말했는지 3장에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하간 텍스트로서는 우치다씨가 잘 짚어주긴 했지만 후설은 부분 인용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 나 자신이 그들을 통해 인지하고 지각했던 걸 뒤흔들어 줄 지진을 느껴야 아마 당신은 레비나스가 뭘 말하려 했는지 더 와닿을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자신이 뭘 잃는지도 모르고, 뭔가 얻어도 간절하지 않아 금방 잊게 된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이 책에 접근하는 독자는 온갖 모호한 아포리즘들과 '우치다 타츠루씨는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군.' '아니, 하루키씨 에세이도 있네!' 정도 외에는 별로 남는 게 없을 거다. 그렇더라도 거의 다 잃고 다시 시작하는 나보다 덜 쓸쓸할 수는 있겠다....

우려는 했지만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1장 타자와 주체

 

 

p37  자신이 랍비이기도 한 마르크-알랭 우아크냉은 '마할로케트(쟁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어떤 사람들의 말, 그것과는 다른 사람들의 말, 그것이 살아 있는 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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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자들의 말과 사상은 앞선 사상에 대한 부정과 혁파를 논한다. 그리고 다음 철학자가 또다시 그렇게 한다. 우치다씨가 레비나스를 우선적으로 격찬한 건 그가 앞선 철학자들을 최대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그 너머로 넘어가려는 매우 겸손한 자세에 있다. 이러한 자세는 랍비 학자다운 면모이기도 하면서 레비나스의 '전언철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 스스로 긍정/부정 그 모두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토록 탈무드적이며 모호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명석한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나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 대화의 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랍비 같은 스승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77  전체성을 지향하는 '자기'에는 '외부'가 없다. 아니, '자기'는 아예 구조적으로 '외부'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성 지향이란 '이해를 초월한 것'을 명명하고, '스스로의 용량을 초월한 것'을 적정한 사이즈로 잘라 줄이는, 맥락 없이 산란한 것을 하나의 '신화같은 이야기' 안에 정리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당찮은 지적능력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p78  이러한 '자기'적인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무한을 지향하는 나'가 구성된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독창에 관련된 주체개념이다. 전체성을 지향하는 주체의 모델이 오디세우스라면, 무한을 향하는 주체의 모델은 아브라함이다.

 

p81  세계라는 틀 속에서 다른 사람은 거의 무와 같다(TI.p.173)

 

p84 '타자'는  '타자성'인 속성을 미리 구비한 자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만나, 내가 '향유'를 망설인 그때에 '타인 자'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타자'의 생성과 아브라함적인 '나'의 생성은 동시적으로 생기한다. '절대적으로 타인 자'인 '타자'는 아브라함을 기습하여, 그의 '세계'에 이해를 초월한 '외부'가 존재함을 고지한다. 이 경험을 아브라함은 어떠한 기지旣知에도 환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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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의 비유 중 하나일텐데, 나는 오디세우스면서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적인 '나'는 '타인 자'를 '향유'하고, 아브라함적인 '나'는 주의 말씀처럼 '타인 자'를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언가를 획득했다거나 하나로 결론 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고작 경험했을 뿐이다.

 

 

p87 유일한 신에게 이르는 도정에는 신 없는 역참이 있다.(DL, p.203.)

 

  이 '신 없는 역참'을 지니는 자의 고독과 결단이 주체성을 기초지운다. 이때 주라고 하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아브라함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 불가능한 유책성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일어선다. 이렇게 해서 자립한 자를 레비나스는 '주체' 혹은 '성인adulte'이라 부르게 된다.

 

     질서 없는 세계, 즉 선이 승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의 희생자의 위치를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 어떤 형태로든, 구주救主로서 현현하는 것을 거부하며, 지상적 부정의 책임을 일신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요구하는 신을 개시開示하는 것이다.(DL, p.203.)

 

 

'성숙한 인간', 그것이 아브라함적 주체의 별명이다.

 

 

     부재한 신에 여전히 믿음을 둘 수 있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약함을 헤아일 줄 아는 자를 말한다.(DL, p.205.)

 

 

'신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구주가 현현해서 현실의 인간적 부정을 바로잡아준다고 믿는 자나, 역사의 심판력이 언젠가 모든 것을 정돈해준다고 믿는 자, 그들은 전체성을 믿는다. 그런 합당치 않은 경신이나 절대적 이성에의 귀의는 결코 주체성을 기초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행위를 '신/역사가 명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그런 무-책임으로부터는 어떠한 유책적 주체성도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주체성은 이해를 초월한 주의 말씀을 오직 혼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직 혼자의 책임으로 해석하고, 살았다는 '대체불능의 유책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초지어진다. 이 주체성은 신이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었기 때문에 획득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무근거를 견뎌냄으로써, 그가 신과 가까이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접근 안에서 절망적인 고독을 맛봄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2장 비-관조적 현상학

 

 

p100 현상학은 회의론보다 더욱 깊고 강하게 이성의 깨어남을 의심함으로써, 회의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는 확실한 실재를 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 무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회의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전부정 안에 머무른다. 그 양면을 기각하고자 하는 현상학은 "확실한 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우리의 불능은 어떠한 양태를 취하는가"라는 물음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낸다.

   이성은 분명히 속는다. 이성을 속이는 작용은 '이성 그 자체 안에서, 이성의 이성적 발걸음에 저촉되는 일 없이, 이성이 모르는 곳에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명석성 그 자체에 거슬러, 이성의 자연발생적이고 무반성적인 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성을 작용시키는 일이 필요해지는 것이다.'(DDQV,p.41.)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우리는 ……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경험적 가능사의 집적으로써 체계를 구축한다. 그것에 대해 회의론은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불능의 어법을 펴서 그 체계를 쳐부수고자 한다. 현상학은 그 모두를 물리치고,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스스로의 이성이 지닌 불능의 모습에 대해 이것을 '기술 할 수 있다'는 것을 철학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p102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그들 가치판단의 어느 것인가에 가담한다든지, 판단에 즉해서 살고 있다.' 레비나스의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시선은 '그 대상에 의해 막혀 있'(EL,p.76)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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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까지 정말 신나게 읽어내려갔는데, 3장에서 갑자기 김샜다. 앞서 우치다씨가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를 양축으로 해서 발전해 나갔다고 했으니 3장에서는 이제 하이데거!...그러나 나를 기다리는 건 보바르와 이리가라이가 페미니즘으로 레비나스 공격하는 이야기; ... 별로 이런 걸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 제목에 '사랑'까지 있는데 나는 왜 '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걸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그 사태에서 진정한 여성 언어란? 시사점을 던져 준 건 유익했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타자와 사자死者:라캉에 의한 레비나스』, 『시간론』레비나스 3부작을 계획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만 번역된 것 같은데 나머지 책들도 궁금하다.

『시간론』에선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본격 비교해 줄 거 같아 기대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너무 안 읽혀서 말이다.ㅜ...개론서는 더 재미없고. 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나름 인기있지 않았나 싶은데, 어서 나머지 출판을/~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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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이 가능한 것의 끝까지 여행하는 것을 체험이라 부른다"

   -조르주 바타유

 

 

 

「하늘의 푸른빛」

 

  나는 그 남자 앞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왜 그는 내가 입을 맞출 수도 있을 한 여인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일까?

  신성은 존재가 음란함과 잔인함과 조소와 공모할 것을 요구한다

 

  -조르주 바타유

 

 

 

 

 

 

§

유연한 잔인함...

그에 비하면 사드는...  

잔임함은 내려치는 칼날에 있지 않다.

그 뒤 내내 우리 맘 속에 맴도는 정념 속에 있다.

 

 

얼마전 오프라인 중고서점에서 「릴라는 말한다」를 보았다.

그냥 두었다.

눈처럼 떠돌다가 녹아버리게 놔두는 책도 있는 것이다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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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는, 행위와 작품이 모두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행위자가 완전한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본질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데이비드 린들리 <불확정성>

 

"하이젠베르크는 많은 할 말을 발견했다. 그의 이론은 혁명적이고 심오하기 이를 데 없지만 완전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용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당신은 입자의 속력이나 위치를 측정할 수 있지만 둘 다 측정할 수는 없다. 혹은, 위치를 더 정확하게 알게 될수록 속력은 덜 정확하게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좀더 간접적이고 덜 명확하게 말하자면, 관찰 행위는 관찰되는 물체를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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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책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어떤 본질을 만나면, 또렷해지는 게 아니라 아득해진다. 왜 그럴까.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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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남 - 폭발적으로 깨어나고 눈부시게 되살아난 사람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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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음악이 생기를 주는 예술이라고 했죠"

"기억을 잃으면 우리는 누가 될까"

"음악을 들려줄 땐 그 사람 가까이 앉아야 해요. 그냥 음악만 들려준다고 되는 게 아녜요.

 내 마음도 열어야해요. 그러면 상대도 마음을 열죠."

 

2014년 선댄스 관객상 수상작인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Alive Inside: A Story of Music & Memory>에서 나오던 대사다.

이 영화는 파킨슨병 환자들에게 음악치료를 시도하는 다큐멘타리다.

 

http://youtu.be/5FWn4JB2Y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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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버 색스 <깨어남>은, 1960~70년대 뇌염후증후군, 파킨슨병 환자에 대한 내용이다. 뇌염이나 독감 등을 앓은 뒤 기면증 또는 불면증 등을 비롯해 소소한 신경증이 하나둘 나타나다가 구제할 길 없는 마비 증상으로 빠져드는데, 신체 뿐 아니라 정신 마저 마비시켜 좀비처럼 만드는 병이니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공포 그 자체인 병이다. 행복? 그러한 개념조차 일시에 날려버린다. 환자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꿈 속 아득함 같아 실감이 잘 안난다. V는 코를 긁기 위해 팔을 들어 코로 가져가기까지 해가 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본인은 1초가 걸렸다고 생각한다. R은 당시 신약이었던 엘도파 투여 후 35년 만에 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지나간 시간은 수치적 앎일 뿐이고 여전히 20대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외양적으로는 정신병 환자와 거의 다를 바 없지만 그 무너짐 안에서도 돌연 자신을 지켜보는 정신은 있다는 게 오히려 끔찍하게 느껴진다. 얼음마비 상태로 꼼짝 못하던 환자가 옆에서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줘도 가뿐히 움직이고, 인류에게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동물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던 환자가 음악소리를 듣게 되자 그 음조를 따라 흥얼거리며 차분해진다. 

최근 로빈 윌리암스의 자살 요인이 파킨슨병 초기 우울과 불안에서 비롯됐을 거라는 기사와 함께 이 병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도 있는데, 페니 마샬 <사랑의 기적>(1990)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킨슨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역으로 로빈 윌리암스가 출연했다. 이 얼마나 짖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올리버 색스의 이 임상사례들을 보며 현실 속의 우리는 정말 깨어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깨어있는 상태가 나자신일까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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