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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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인용들을 보며, 이건 영락없이 모리스 블랑쇼인데...했더니 역시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 비평집도 있었다. 왜 그런지 두 사람의 문장을(특히 블랑쇼의 소설들과) 나란히 읽어보면 당신도 대번에 알게 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하여간 나도 우치다 타츠루씨가 블랑쇼 연구하다 레비나스에게 빠진 것과 똑같이 되려나.......하며 읽어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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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소감은…… 기꺼이 다 읽은 기분이 아니라 다 잃은 기분이다. 허허허....

이 책을 읽/잃기 전에 데카르트의 성찰과 후설의 현상학을 읽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레비나스가 그들의 어떤 점과 맥락을 같이하며 어떤 것을 넘어서려 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그 외 많은 경험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른의 철학이라 말했는지 3장에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하간 텍스트로서는 우치다씨가 잘 짚어주긴 했지만 후설은 부분 인용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 나 자신이 그들을 통해 인지하고 지각했던 걸 뒤흔들어 줄 지진을 느껴야 아마 당신은 레비나스가 뭘 말하려 했는지 더 와닿을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자신이 뭘 잃는지도 모르고, 뭔가 얻어도 간절하지 않아 금방 잊게 된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이 책에 접근하는 독자는 온갖 모호한 아포리즘들과 '우치다 타츠루씨는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군.' '아니, 하루키씨 에세이도 있네!' 정도 외에는 별로 남는 게 없을 거다. 그렇더라도 거의 다 잃고 다시 시작하는 나보다 덜 쓸쓸할 수는 있겠다....

우려는 했지만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1장 타자와 주체

 

 

p37  자신이 랍비이기도 한 마르크-알랭 우아크냉은 '마할로케트(쟁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어떤 사람들의 말, 그것과는 다른 사람들의 말, 그것이 살아 있는 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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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자들의 말과 사상은 앞선 사상에 대한 부정과 혁파를 논한다. 그리고 다음 철학자가 또다시 그렇게 한다. 우치다씨가 레비나스를 우선적으로 격찬한 건 그가 앞선 철학자들을 최대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그 너머로 넘어가려는 매우 겸손한 자세에 있다. 이러한 자세는 랍비 학자다운 면모이기도 하면서 레비나스의 '전언철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 스스로 긍정/부정 그 모두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토록 탈무드적이며 모호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명석한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나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 대화의 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랍비 같은 스승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77  전체성을 지향하는 '자기'에는 '외부'가 없다. 아니, '자기'는 아예 구조적으로 '외부'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성 지향이란 '이해를 초월한 것'을 명명하고, '스스로의 용량을 초월한 것'을 적정한 사이즈로 잘라 줄이는, 맥락 없이 산란한 것을 하나의 '신화같은 이야기' 안에 정리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당찮은 지적능력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p78  이러한 '자기'적인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무한을 지향하는 나'가 구성된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독창에 관련된 주체개념이다. 전체성을 지향하는 주체의 모델이 오디세우스라면, 무한을 향하는 주체의 모델은 아브라함이다.

 

p81  세계라는 틀 속에서 다른 사람은 거의 무와 같다(TI.p.173)

 

p84 '타자'는  '타자성'인 속성을 미리 구비한 자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 자'로서 '향유'되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만나, 내가 '향유'를 망설인 그때에 '타인 자'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타자'의 생성과 아브라함적인 '나'의 생성은 동시적으로 생기한다. '절대적으로 타인 자'인 '타자'는 아브라함을 기습하여, 그의 '세계'에 이해를 초월한 '외부'가 존재함을 고지한다. 이 경험을 아브라함은 어떠한 기지旣知에도 환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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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의 비유 중 하나일텐데, 나는 오디세우스면서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적인 '나'는 '타인 자'를 '향유'하고, 아브라함적인 '나'는 주의 말씀처럼 '타인 자'를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언가를 획득했다거나 하나로 결론 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고작 경험했을 뿐이다.

 

 

p87 유일한 신에게 이르는 도정에는 신 없는 역참이 있다.(DL, p.203.)

 

  이 '신 없는 역참'을 지니는 자의 고독과 결단이 주체성을 기초지운다. 이때 주라고 하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아브라함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 불가능한 유책성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일어선다. 이렇게 해서 자립한 자를 레비나스는 '주체' 혹은 '성인adulte'이라 부르게 된다.

 

     질서 없는 세계, 즉 선이 승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의 희생자의 위치를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 어떤 형태로든, 구주救主로서 현현하는 것을 거부하며, 지상적 부정의 책임을 일신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요구하는 신을 개시開示하는 것이다.(DL, p.203.)

 

 

'성숙한 인간', 그것이 아브라함적 주체의 별명이다.

 

 

     부재한 신에 여전히 믿음을 둘 수 있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약함을 헤아일 줄 아는 자를 말한다.(DL, p.205.)

 

 

'신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구주가 현현해서 현실의 인간적 부정을 바로잡아준다고 믿는 자나, 역사의 심판력이 언젠가 모든 것을 정돈해준다고 믿는 자, 그들은 전체성을 믿는다. 그런 합당치 않은 경신이나 절대적 이성에의 귀의는 결코 주체성을 기초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행위를 '신/역사가 명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그런 무-책임으로부터는 어떠한 유책적 주체성도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주체성은 이해를 초월한 주의 말씀을 오직 혼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오직 혼자의 책임으로 해석하고, 살았다는 '대체불능의 유책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초지어진다. 이 주체성은 신이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었기 때문에 획득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무근거를 견뎌냄으로써, 그가 신과 가까이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접근 안에서 절망적인 고독을 맛봄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2장 비-관조적 현상학

 

 

p100 현상학은 회의론보다 더욱 깊고 강하게 이성의 깨어남을 의심함으로써, 회의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는 확실한 실재를 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 무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회의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전부정 안에 머무른다. 그 양면을 기각하고자 하는 현상학은 "확실한 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우리의 불능은 어떠한 양태를 취하는가"라는 물음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낸다.

   이성은 분명히 속는다. 이성을 속이는 작용은 '이성 그 자체 안에서, 이성의 이성적 발걸음에 저촉되는 일 없이, 이성이 모르는 곳에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명석성 그 자체에 거슬러, 이성의 자연발생적이고 무반성적인 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성을 작용시키는 일이 필요해지는 것이다.'(DDQV,p.41.)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우리는 ……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경험적 가능사의 집적으로써 체계를 구축한다. 그것에 대해 회의론은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불능의 어법을 펴서 그 체계를 쳐부수고자 한다. 현상학은 그 모두를 물리치고, '우리는 ……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스스로의 이성이 지닌 불능의 모습에 대해 이것을 '기술 할 수 있다'는 것을 철학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p102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그들 가치판단의 어느 것인가에 가담한다든지, 판단에 즉해서 살고 있다.' 레비나스의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시선은 '그 대상에 의해 막혀 있'(EL,p.76)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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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까지 정말 신나게 읽어내려갔는데, 3장에서 갑자기 김샜다. 앞서 우치다씨가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를 양축으로 해서 발전해 나갔다고 했으니 3장에서는 이제 하이데거!...그러나 나를 기다리는 건 보바르와 이리가라이가 페미니즘으로 레비나스 공격하는 이야기; ... 별로 이런 걸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 제목에 '사랑'까지 있는데 나는 왜 '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걸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그 사태에서 진정한 여성 언어란? 시사점을 던져 준 건 유익했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타자와 사자死者:라캉에 의한 레비나스』, 『시간론』레비나스 3부작을 계획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만 번역된 것 같은데 나머지 책들도 궁금하다.

『시간론』에선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본격 비교해 줄 거 같아 기대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너무 안 읽혀서 말이다.ㅜ...개론서는 더 재미없고. 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나름 인기있지 않았나 싶은데, 어서 나머지 출판을/~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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