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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평점 :

데이비드 리스는 어쩌다 연필 깎기 장인이 되었나. 미국 통계국에서 일하다 연필 깎는 걸 너무 좋아한다는 걸 알게 돼 이 직업을 창안하게 됐다. 2000년대 경기 불황 속에도 연필 한 번 깎아주는 데 12달러 50센트를 받고, 2013년 이 책이 나올 당시엔 35달러를 받았다고 하니 성공한 사업이라고 봐야 할까ㅎ
이 책은 저자가 1940년 대에 나온 랠프 뉴스테드 《오델스 선박 설비 입문: 실무 사진과 함께 보는 현도공, 용접공, 리벳공, 앵글 단조공, 플랜지 배관공, 기타 모든 선반 기계공을 위한 강선 조립 및 수리의 실제》라는 중고책에서 영감을 받아썼다.

책 초반엔 연필의 구조와 연필 깎는 재료 준비부터 각 과정을 꼼꼼히 설명한다. 연필은 홈을 판 두 장의 나무판 사이에 기다란 흑연심을 끼워서 만든다. 주로 육각 축인 것은 둥근 축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고 책상에서 떨어질 확률도 낮기 때문이었다. 연필 제조 공정은 18세기 말 프랑스인 니콜라 자크 콩테가 최초로 개발했고 국제 통용 연필 등급제(ex-2B, H)도 그때 만들어졌다. 미국은 숫자(ex-#2, #3)로 표기하는데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가 도입했다.
연필 깎는 작업 환경, 저자가 개발한 기술과 노하우, 빈티지 연필깎이 구경 등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이 책에 접근한 독자라면 점점 당황할 수 있다. 저자가 위트 넘치는 만화가이기도 해서 여기저기서 코믹한 장난이 넘쳐 이거 다 쇼 아냐! 싶기도 한다. 연필 깎기 장인의 적인 전동 연필깎이가 있는 집을 몰래 찾아가 무자비하게 부수고 메모를 남겨 둔다든가, 폭포수 아래에서 연필 깎기, 유명인 흉내 퍼포먼스 연필 깎기, 턱도 없는 마음으로 연필 깎기ㅋ 등 연필 깎기 진기명기 총출동!


부록에는 연필 맛 와인(사토 그레이사크 2007년산 메도크 AC, 마르크 올리비에 2010년산 ‘라 페피‘ 카베르네 프링 뱅 드 페이 뒤 발 드 루아르 등), 연필 관련 추천 웹사이트, 연필 애호가들의 순례 성지(컴벌랜드 연필 박물관, 폴 A. 존슨 연필깎이 박물관, 에베르하르트 파머 연필 회사 역사 지구 등)을 소개한다.
[연필 깎기 장인에 대한 증언들]
장인이 혼을 담아 깎은 나의 연필은 연구실에 잘 보이게 진열돼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게 웬 거냐고 묻곤 하지요. 이후의 대화는 종종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유익한 방향으로 말예요. 예를 들어 ˝탈산업 시대에 수공예는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 같은 사회학적 질문, ˝연필을 깎는 직업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은 안식일에 허용되는 일인가.˝라는 유대교 율법에 관한 질문, ˝올바르게 깎인 노란색 HB 연필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미학적 질문, ˝장인이 부여한. 뾰족함의 등급(내 연필의 경우 10단계 중 8단계)을 비전문가가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가?˝란 인식론적 질문, ˝줄곧 진열해 놓기만 하는 연필도 ‘도구‘인가? 이를테면 하이데거의 용어로 ‘손안에 있는‘(zuhanden) 것이라 할 수 있나.˝라는 형이상학적 질문 등 다양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죠. 요컨대 나는 그 연필 덕에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줄 기회가 많았습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데이비드 리스 씨의 연필 깎기 서비스를 적극 추천하고 싶어요.
ㅡ론 무라드(종교학 교수)
얼마 전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내 물건 대부분이 못 쓰게 됐어요. 그런데 화재 진압 후 잔해 더미를 샅샅이 살피다가 연필이 무시한 것을 확인하고는 기쁨에 젖었습니다. 장인의 혼이 담긴 나의 연필은 케이스 안에 그대로 들어 있었고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어요. 이내 여러 전문가들이 도착해서 도와줄 채비를 하는데 필기구를 가져온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필기구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장인이 혼을 담아 깎은 그 연필을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두고 몰래 어루만졌습니다. 고마워요. 데이비드 씨.
ㅡ레슬리 A. 하우스(광고 관리자)
캐나다 언론인으로서 장담하건대, 이곳 드넓은 백색의 북쪽 나라에서 데이비드 리스 씨의 연필은 실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매니토바 주에선 겨울이 되면 잉크가 얼기 때문에 펜으로 글씨를 쓸 수가 없거든요. 연필로만 가능하죠. 이 연필이라면 한겨울에 야외에서 인터뷰를 해도 정확하고 완벽하게 받아 적을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언론계의 금언입니다만, 데이비드 리스 씨는 연필이 펜보다도 칼보다도 한 수 위라는 걸 보여줬어요. 고맙습니다.
ㅡ그랜트 A. 해밀턴(언론인)

※ 난 연필 잘 깎진 못했지만 많이 쓰는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