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가 스타일이다
플로베르의 말을 김화영 번역가가 해설에서 정리했듯 “작품은 스타일의 힘으로 지탱되어야 하지만 그 힘은 생각과 혼연 일체가 됨으로써 생겨나는 <내면적 힘>"이다.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에서 내가 눈여겨 본 스타일은 자유로운 시점 이동과 생략의 묘사와 플롯이다.
소설을 써본 사람은 알 텐데 내 생각엔 의식의 흐름기법보다 효과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여러 시점을 병행하는 게 더 어렵다. 여러 시점을 쓰더라도 장이 바뀔 때 화자를 바꾸지 보통 같은 장에서 시점을 잘 바꾸지 않는다. 전개가 난삽해 보이지 않으려면 치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1년(1856년 탈고)에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니 신선하다. 플로베르는 첫 문장에서 1인칭 복수형(우리) 시점으로 시작해 샤를르 보바리를 소개한다. 그의 특성을 관찰하게 하는 멋진 장치다. 3부 마지막 장에서 남은 이들의 삶을 차갑게 보여주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 이르기까지 흥미롭게 변주되고 있다.
묘사와 플롯은 찬탄이 절로 나온다. 《마담 보바리》가 재판에 회부된 요인 중 하나인 풍기 문란죄에 해당하는 ‘마차 장면’은 구체적인 내부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시내를 내달리는 마차와 창밖으로 내민 손으로 정황을 극대화한다. 엠마(보바리 부인)와 로돌프가 숲 속에서 처음 갖는 정사 신도 정황만 암시된다.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을 안 보여 주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속물이라고 평가하며 소설을 읽고 있을 독자의 속물적 욕망을 플로베르는 채워주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의 백미를 플로베르가 가장 공들인 ‘농사 공진회 장면’으로 꼽고 싶다. 군중들의 각양각색의 모습 속에서 상류층 인사의 허례적인 연설과 보바리에게 루돌프가 수작을 거는 말을 교차편집해 특별함과 우스꽝스러움의 대비를 고조시키고 있다.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세기에 걸친 노예 생활’의 보답으로 상을 받는 시골 노파의 모습과 부르주아 로돌프가 즐기다 버릴 생각으로 엠마를 유혹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은 정확히 상응하고 있다. 두 번째 백미는 알다시피 레옹과 엠마의 ‘노트르담 밀회에서부터 이이지는 마차 장면’이다. 마차의 질주와 정사가 역시 상응하고 있다.
●숙명의 문제인가 선택의 문제인가
쥘 드 고티에의 명명으로 “보바리즘(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잃고 수도원에서 소녀 시절을 보낸 엠마는 낭만적 소설을 읽으며 허영과 환상의 세계에 빠져 현실의 욕구 불만을 그릇되게 풀어가다가 수많은 실패 속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과연 그녀만 그럴까. 엠마의 내면은 전혀 볼 줄 모르면서 자신의 일과 가정 속에서 행복하다고 믿은 샤를르는? 자신의 재력으로 여성 편력을 재미 삼아 살아가는 로돌프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엠마를 천사로 만들고 사랑하다 장래를 생각해 그녀를 버린 레옹은? 오로지 돈의 축적만 노리며 악랄한 고리대금업으로 사업 확장만 생각한 뢰르는? 종교에 맹목하면서 고지식한 훈계를 늘어놓는 부르지니엥 신부는? 과학과 진보를 부르짖지만 권력과 이익을 계산하기 바쁜 약제사 오메는? 그들은 보바리즘적 인간이 아닌가? (자꾸 바보리즘이 나오려고 하네;)
욕망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관건은 어떤 선택이 아니라 선택 뒤 어떤 반성적 삶을 사는가이다. 엠마의 잘못은 선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의 엔트로피로 치닫기만 했다는 것.
자코 반 도마엘 영화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2009)는 플로베르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다. 9살 니모는 부모의 이혼을 겪게 되는데, 부모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아버지를 선택했을 때는 우울 장애 앨리스를 사랑하게 되고 다큐멘터리 진행자가 되는 인생, 앨리스에게 차여 사랑하지 않는 진과 결혼해 오로지 성공을 목적으로 사는 공허한 인생, 어머니를 선택했을 때는 새아버지의 딸 안나를 만났다가 헤어져 오랜 이별 끝에 사랑에 성공하게 되는 인생.
세포 재생 기술이 개발되었음에도 2092년 니모는 118세로 자연사를 선택하는 최후의 인간으로 이슈가 된다. 그에겐 수수께끼가 있는데 자신의 진짜 인생을 알지 못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데 그가 말하는 어떤 인생에서든 그는 34살에 이미 죽었다.
앨리스를 만난 인생에서는 그녀의 유골을 뿌려주기 위해 탄 화성행 우주선과 운석의 충돌로, 진과의 인생에서는 권태를 모험으로 풀려 했기에 암살로, 안나와의 인생에서는 수영장 관리사까지 했으면서도 익사로, 그가 선택한 인생이 부른 죽음의 모습이다. 매우 도식적일 수 있지만 감독은 니모와 관객의 선택 범위를 확대시켜 놓았다. 현실적으로 보면 니모의 이 많은 기억은 치매에 따른 혼란 증상일 수 있고, 평행우주 개념으로 보면 동시에 다른 세계를 산 그의 여러 삶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9살 소년의 니모 시점으로 보면 아직 선택하지 않은 미래상일 수도 있고, 15살 니모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세계일 수도 있다는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고 가능성은 다양하다. 《마담 보바리》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엠마의 삶이 다르게 풀릴 수도 있었다. 운이 나빴다거나 여성이어서라거나 시대가 그랬다고 말하기보다 나는 인간의 근본적 슬픔을 더 생각해본다. 19세기 엠마의 고민은 인과율이었다. 그녀는 과거를 되돌릴 수 있길 얼마나 바랐던가. 아직 많은 가능성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소녀 시절, 샤를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가능성, 하나의 선택 뒤 파국으로 치달아가기만 한 선택들. 21세기 니모도 불우한 어린 시절과 안타까운 사랑,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지만 엠마와 달리 모든 인과를 경험해본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거를 되돌리기도 하면서 가능한 삶을 다 살아봤고 결국 모든 선택이 다 의미 있었다고 긍정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자는 말은 단순한 결론이다. 카오스(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나비 효과)나 비둘기 심리이론[*]처럼 선택에서 확률적 변수는 늘 존재한다.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지만 샤를르가 맞는 비극이 바로 그런 예이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인간이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 몰두하는 배우이며 등장하는 시간과 퇴장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엠마는 자신의 출생을 정할 수 없었고 니모는 자신의 부모를 골라서 태어났다. 엠마는 자살을 택했고 니모는 자살 같은 자연사를 택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죽지 않을 수 있는데 죽음을 택하는 게 우리의 유일한 진짜 선택인지도 모른다. 우유부단하고 생각 많았던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로 그토록 고민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수축되어 빅 크런치로 끝난다는 종말론이 아니더라도 삶을 알아갈수록 존재는 종국엔 소멸로 가는 거 같다. 다만 엠마와 니모, 플로베르와 자코 반 도마엘의 비교처럼 우리의 사유, 스타일, 태도가 다양해진다고 봐야 하겠다. 22세기 인간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 당신은?
[*] 비둘기 심리이론: 행동심리학자 스키너의 심리 상자 실험을 통해 잘 알려진 예로, 날개를 퍼덕이거나 버튼을 누를 때 먹이가 지급되면 비둘기는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나 비둘기의 선택으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나타날 근거는 없다. 불확정성원리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