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분신들의 고백들
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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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코프 절망은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에서 좀 더 진화한 자아상을 보여준다. 두 소설에서 주인공이 분신 때문에 파멸을 맞는 결과는 같지만 당연히 과정은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의 주인공인 골랴드낀은 사회 속 노예의 삶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해 몰락을 맞았다면, 나보코프 절망의 주인공인 게르만은 자신이 노예의 삶을 살지 않는 영리한 주체라는 자기도취에 빠져 몰락을 맞는다. 더 풀어서 말하면, 골랴드낀은 자신과 닮은 분신의 음모에 당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게르만은 부랑자인 분신 펠릭스를 자신으로 위장해 보험금을 타 자유와 돈을 모두 얻으려 했으나 교수대로 향하게 된다.

근본적인 요인은 우리 안에 있는 파토스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향해 선의와 악의를 잘 구분해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중에 혼재되어 있을 때도 많고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판단들은 상당수 불완전하고 합리적이지 않다. 골랴드낀과 게르만과 나보코프는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은 그보다 나을까. 아니, 나와 타인을 끝없이 구분하며 온갖 차이에 비분강개하며 여러 감정들의 크기를 다르게 표현할 뿐 우리는 매우 닮았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곧 다른 이들에 의해 대체된다. 게르만과 펠릭스를 겔릭스와 페르만이라고 해도 본인들 외에 누가 그리 신경 쓸 것인가. 닮음의 익명성. 존재의 익명성.

 

 

신체상의 이 놀라운 유사성은 아마 내게 미래의 무계급 사회에서 사람들을 결집시킬 저 이상적인 닮음을 약속하는 징표로 (무의식적으로!) 비친 것 같다. 그리고 특정한 경우를 이용하고자 애쓰는 가운데, 아직 사회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하나마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이 닮음을 완벽히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사회적 원인들로만 해명이 가능하다. 나와 펠릭스가 분명히 구분된 상이한 계급에 속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계급투쟁이 타협이 불가능한 첨예한 지경에 이른 오늘날에는 단독으로 계급융합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사실 내 어머니는 태생이 천했고, 친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거위를 길렀다. 그래서 나 같은 기질과 습성의 인간이 내면에 지니게 되는, 비록 아직 완전히 발현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진정한 인식에 대한 염원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바로 나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 신세계를 꿈꾼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게르만과 펠릭스처럼 서로서로 닮았을 것이다. 겔릭스들과 페르만들의 세상. 장비 곁에 쓰러져 죽은 노동자를 그의 완벽한 분신이 평온한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즉시 대체하는 세상. 그래서 나는 소비에트의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경험이 풍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도 아래 이 책이 담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의 기본적인 행보를 따라가보는 것이 상당히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다른 민족들에게도 내 책을 번역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내 책을 읽은 미국인들은 유혈과 폭력에 대한 갈증을 풀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부랑자에 대한 나의 특별한 애착에서 소돔의 신기루를 감지할 것이다. 독일인들은 반()라브적 영혼의 광적인 변덕을 즐길 것이다. 여러분, , 더 읽으시라! 전적으로 반기는 바올시다.”

 

나보코프 절망

 

 

러시아에서 온 망명자라는 설정부터 러시아 전통 문학에 대한 조롱 등 게르만과 나보코프는 또 다른 분신 관계이다. 펠릭스와 게르만의 관계처럼 게르만을 다루고 있는 나보코프가 자꾸 느껴져서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보코프의 글을 바라보고 있는 나. 사슬처럼 연결된 우리의 시선들, 추측들, 판단들. 그러나 나는 나보코프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하찮은 내 글에 상처받지 않게 작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보코프에게 진정한 독자는 바로 작가 자신”(p262)이었다는 해설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덕담으로 끝내려는 건 아니고, 나보코프 절망》은 이 소설이 어떤 것을 분신들의 재료로 썼는지 보여주는 향연이기도 하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각종 문학 모티프들('천재와 죄악', 재능과 거짓', '죄와 벌', '범죄와 분신')이 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독자에게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자신의 게임을 만드는 데, 나보코프가 대단한 작가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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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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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22 22:32   좋아요 2 | URL
우병우 나온다 그래서 하루종일 청문회 보다가 고혈압과 심장병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습니다; 밥 먹으면서 보다가 소화도 안 되던...

겨울호랑이 2016-12-22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망」을 읽으려면 배경지식이 탄탄해야할 것 같습니다..문학의 세계는 심오하다는 것을 Agalma님의 글을 통해 또다시 느끼게 됩니다.^^-: 읽을 책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

AgalmA 2016-12-22 22:38   좋아요 2 | URL
그냥 봐도 재밌지만 나보코프가 워낙 편집증적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 배경지식이 좀 있으면 더 재밌기도 합니다. 아는만큼 머리 아플 수도ㅎ;; 이건 어디서, 저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찾아서 연결해보고 싶어져서 즐겁게 소설 읽기가 힘듭니다 ^,ㅜ...
주석과 인용 찾아보는 철학서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ㅎㅎ;;

2016-12-23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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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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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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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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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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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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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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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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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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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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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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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1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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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23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2016서재의달인 ㅡ발표가 났네요! 휘리릭 가셔서 좋아요 좀 눌러주셔요!^^

AgalmA 2016-12-23 20:23   좋아요 1 | URL
오~ 전 올해 알라딘 서재의 달인 안될 줄 알았는데 됐네요^^;;
북플마니아 2관왕도 기쁨ㅎㅎ

[그장소] 2016-12-23 20:27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진걸요 . 듬성듬성 해서..그런데 보니 우리 많이 떠들긴 했나봐요!^^ㅋㅋㅋ 축하드려요!^^

AgalmA 2016-12-23 20:40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은 리뷰 왕창왕 아닙니까ㅎㅎ 여러 이웃 가셔서 말씀도 많이 나누시고. 올해는 제가 서재를 비운 기간이 많아 수다꾼 역할 많이 못했는데 서재 기네스 기록 보니 이웃들이 제 서재 와서 말씀 더 많이 해주셔서 그게 특히 감사하더라는^^

[그장소] 2016-12-23 20:42   좋아요 1 | URL
ㅎㅎㅎ리뷰 왕창 ~댓글도 그런데, 그건 안쳐줍니꽈~^^ 그분이 오시는 날이 따로있거든요! ㅋㅋㅋ
Agalma 님 서재는 늘 도타운 대회로 북적북적 한걸 압니다~^^ 멋진 이웃님들이 많은거죠!
누가 멋져서 그렇더라~^^?

AgalmA 2016-12-23 21:24   좋아요 1 | URL
서재 기네스 보니까 댓글 달인으로도 떠 있으시더만요 ㅎㅎ 제가 6개월 안 쉬었으면 저도 아마 거기 있었을 테지만ㅎㅎ;;
제 서재에서 그장소님이 댓글러 1인자이시죠ㅎㅎ 그장소님 서재는 팬들이 많아 제가 댓글러 1인자가 못되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댓글을 많이 남긴 곳이 그장소님 서재~
일상사 얘기 나누는 것도 좋지만 책과 생각에 대한 대화, 그게 알라딘 서재 매력이랄까요. 좋은 친구를 만나면 더 풍성해지고~
사람이 보석같을 수 있는 곳^^

[그장소] 2016-12-24 09:49   좋아요 1 | URL
댓글의 달인 ㅡ이건 따로 축하해줘야한다는!^^ 푸하핫~ 우리 자축해요. ㅎㅎㅎ
Agalma님 일년간 같이 떠들어줘서 감사했어요 !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AgalmA 2016-12-24 10:16   좋아요 1 | URL
와~ 댓글의 달인이 나타났당~ ㅋㅋ 그장소님이랑은 실시간으로 떠들어야 맛인데 시간이 안맞는 게 흠ㅎ;;
댓글의 달인 이렇게 만나기 어려워서야ㅎㅎ
책 보다가 쓰러지실까 걱정입니다. 몸과 댓글 쓸 손가락 두루 건강 잘 챙기셔야 합니다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12-23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

AgalmA 2016-12-23 21:22   좋아요 2 | URL
전 케익 퍼먹으며 일할까봐욧ㅋㅋ;; 요즘 감기 유행이던데 건강 잘 살피시고요. 나라가 하두 어수선해서 조류독감 사람에게 전이될까 걱정됩니다;
암튼 북다이제스터님도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길요^^ 이웃들에게 찾아가 이런 인사하는 것도 다 정성인데^^

북다이제스터 2016-12-23 21:24   좋아요 2 | URL
넘 슬픈 노동자 현실 ㅠㅠ
조만간 좀 한가해지시면 좋은 책으로 좌담회 한 번 하시죠. ^^

AgalmA 2016-12-23 21:29   좋아요 2 | URL
연말이고 1월1일이고 뭐 상관없이 마구 일하는 작업환경을 제가 받아들인 꼴이니^^;; 싫어도 마땅히 갈 데가 없어요. 아하하;;;
가끔 그런 생각합니다. 꾸준한 독서모임은 좀 부담스럽고 단발성으로 시리즈(문학과 사회의 예술사 같은) 책 모임 한 번 해볼까 싶더라고요^^
암튼^^/

서니데이 2016-12-23 2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AgalmA 2016-12-23 23:13   좋아요 2 | URL
축하드릴 분이 많아 저는 인사하러 다니는 거 생략ㅎ
고맙습니다. 한해동안 서니데이님 이웃 사랑 저도 많이 받았죠^^

서니데이 2016-12-23 23: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간단한 인사 드리고 왔어요.
이웃분이 많아서 간단하게 썼습니다.^^ 아마 내일은 더 많은 이웃의 축하를 받으실것 같습니다.^^
좋은밤되세요.^^

AgalmA 2016-12-23 23:17   좋아요 3 | URL
최다 댓글 작성자, 최다 댓글 수해자이시라 서니데이님은 축하도 많이 받고 하셔야 할 듯ㅎ;
모두 흐뭇한 밤^^/

서니데이 2016-12-23 23:21   좋아요 2 | URL
제가 그렇게 많이 썼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겨울호랑이 2016-12-24 0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즐거운 성탄 되세요

AgalmA 2016-12-24 03:10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도 축하드려요^^
작년엔 선물로 오는 도라에몽 다이어리 아이들에게 뺏긴 이웃들 있으시던데ㅎ 올해는 캐릭터 다이어리 없어서 연의가 탐 안 낼테니 다행인가 불행인가ㅎㅎ;

가족과 즐겁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