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피만 본다면《아라비안 나이트》는 이슬람교 사상에 바탕을 둔 외설, 라스 폰 트리에 영화 《님포매니악 볼륨 1 & 2》는 기독교 사상을 유희하는 외설일 것이다. 금욕주의자 셀리그먼과 여자 색정광 조라는 구도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왕비 때문에 여성 혐오에 빠진 샤리야르 왕과 치료자이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샤라자드의 변형이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과 이미지를 통해 조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르가슴을 계시로 비유하기, 악마로 간주되는 ‘웃는 아기’ 낳기, 바흐의 성가 구조를 성교 관계로 비교하기, 조의 인생 역정을 예수 수난에 빗대기 등등 종교 세계에서는 신성 모독이 될 이야기를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 세계로 가져와 거침없이 풀어낸다. 이야기의 유희와 성의 유희가 맞물려 있는데, 조가 방안에 있는 물건으로 엮어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다. 특히 조의 연인이었던 제롬의 등장이 모두 우연인 것을 셀리그먼이 지적하는데, 그도 우리도 이야기 주체인 조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이야기와 성의 주체가 남성 중심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설정은 라스 폰 트리에가 철저히 주체 역전을 이끌어내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셀리그먼이 역사와 철학 등을 언급하며 해석을 추가할수록 이야기는 분명해지기보다 모호해진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왜 이 이야기들이 끝없이 부활하는가이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性은 生의 모습 그대로라는 듯.
《님포매니악》은 뉴턴 ‘낚시’부터 첫 장을 펼친다. ‘강태공’이나 ‘어장 관리’라는 말도 있듯이 ‘낚시’는 인간의 여러 습성을 나타낸다.
척수 끝에 달려 있는 1.4 킬로그램의 뉴런, 신경 섬유와 섬세한 화학 반응으로 이루어진 뇌야말로 가장 뛰어난 최고의 낚시 도구다.
ㅡ 폴 퀸네트 《인간은 왜 낚시를 하는가》 중
폴 퀸네트는 고대 이집트 달의 여신이 절반이 물고기 모습이었으며 이것이 인어의 시초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물고기는 예수의 상징이기도 한데, 중세 찬송가에서는 예수가 ‘동정녀가 잡은 작은 물고기’로 언급되었다. 고대 로마 시절에는 물고기 그림이 크리스트교를 상징하기도 했으며, 교회 건축에서 들어가는 입구가 아치형 양식인 것은 물고기 형상에 바탕을 둔 것이란 미학 해석도 있다.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이자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물고기 형상이 많다. 유대교 안식일에 생선요리를 올리는 것 때문에 그는 잉어를 자주 접했고, 동네 꼬마들에게 물고기를 먹는다는 걸로 놀림당하며 ‘물고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게리는 무신론 입장이지만 그의 물고기 디자인은 집안의 종교 영향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는 ‘오랜 기간 진화해 온 자연의 창조물이자 지속적인 형태’를 띤 물고기의 특성을 미래 대안으로 보고 물고기 디자인을 각종 형태에 도입했다.
이렇듯 우리의 생활, 풍습, 이야기 속에는 종교가 스며들어 있다. 무신론자라고 하면서도 셀리그먼은 종교적인 것들에 심취해 있고, 조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사드 《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의 참회 구도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셀리그먼은 시종일관 조의 삶이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성 문제 원인도 모른 채 휘둘리기도 하고 억제하려 노력도 하면서 치열하게 산 조의 삶에 대한 공감이자, 피할 수도 모른 채 할 수도 없이 자신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 삶에 대한 이해였다.
종교뿐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는 셀리그먼을 통해 제논의 역설, 자연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피보나치의 수열, 볼셰비키 혁명, 프루지크 매듭, 007 리볼버 총 등 온갖 이야기들을 性과 접합한다. 이 연결들이 참 근사해 (내 주제에 어쭙잖게도) 김기덕 감독이 이걸 배운다면 좋을텐데 했다.
性은 트라우마이자 트리거(방아쇠)가 될 수밖에 없을까.
조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셀리그먼을 인생의 첫 친구로 받아들이는 순간, 금욕을 자신하던 셀리그먼은 그녀를 겁탈하며 배신한다. 마지막 이야기 소재가 총이었던 이유이고, 등장한 총은 발사된다. 연극 무대처럼 하룻밤 동안 펼쳐진 이야기는 허망하게 끝난다. 그러나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의 결말이기도 하다. 종교와 성이라는 금기를 무던히 해체하려 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구축된 세계를 와장창 부수는 결벽쟁이 예술가이다. 초기 영화에서는 무력한 수난의 주인공이었던 여성들이 《도그빌》, 《멜랑콜리아》, 《안티 크라이스트》, 《님포매니악》 등을 거치며 점점 주체적인 여전사의 면모를 갖추어 온 건 시대의 영향일까, 라스 폰 트리에의 요구일까.
킴 베이싱어가 주인공인 라스 폰 트리에 2014년 작 <I am Here>를 아직 보지 못 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여성을 통해 꾸준히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낚시꾼이기도 했던 마크 트웨인이 “상상력이 빈곤해지면 판단을 미루라”고 한 말에 따라.
《님포매니악 2》
자신의 나무- 영혼을 찾는 기나긴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