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처럼 우리는 엇갈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너는 2호선 4번 출구에서, 나는 3호선 4번 출구에서 서로를 탓했다. 시스템과 원인을 따지기 보다 우리는 언제나 눈 앞의 것을 더 탓한다.
공간에선 어떤 식으로든 무리를 짓게 된다. 두부 같은 건물들 사이사이를 지나며 나는 어디에 끼게 될 지 몰랐다. 우리는 길 끝에 앉았다. 무리이면서 무리를 거부하고자 하는 위치. 언제든 이탈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ㅡ김중식
지금 생각하면 마지막 행이 석연치 않다. 그것이 과연 자유일까. 자폭은 아니고?
와퍼와 맥주를 먹으며 건너편 포장마차가 장사 준비하는 것을 지켜봤다. 붉은 천막.
검은 천막은 장례식, 흰 천막은 운동회.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저장해둔다는 것을 깨닫는다.
촤악, 촤악, 길에 물 뿌리는 소리. 아주 오랜만이었다. 스프링클러는 한국과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이것도 이 시공간에 갇혀 사는 내 생각의 한계지.
담배를 권하는 네 담배갑엔 딸랑 한 개비가 있었다.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상세히 알려주는 네 의도를 담배갑을 보기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면에선 진화가 잘 되어 있지.
˝제가 어른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 ˝흠, 흠, 어, 어, 이게 어른 목소리가 아니라고요?˝ 웃긴 소리를 하며 인상을 찌뿌려 주름을 만들었던 30초 전을 얘기하며 신분증 요구 때문에 다시 돌아올 뻔 했다고 하자 너는 편의점 직원이 외국인 노동자 아니었냐고 물었다. 이보게, 서로 원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대화했다네. 나는 여기 오는 길에도 목소리가 너무 어리다는 소릴 들었다고 여러 목소리를 내며 장난쳤지만, 내가 결코 노인 목소리를 내진 못한다는 걸 안다. 사기 치기엔 적절하지 않은 조건들이 너무 많지. 결정적으로 순진해. 순진하다는 걸 아는 건 순진한 건가, 이 생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한다. 파스칼과 칸트는 순진하진 않았을 거야.
하나 둘, 우리를 거쳐 무리 속으로 들어오는 저녁이 지나고 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사장님이 디제이인, 지긋지긋한 신청곡 레퍼토리 호텔 캘리포니아나 퀸의 음악을 틀어주는 클라우드 생맥주집. 호텔 캘리포니아나 퀸의 음악이 없었으면 모든 술집의 선곡 레퍼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찌 보면 술집은 음악의 정신병동 같다. 마시는 것도 듣는 것도 반복의, 반복의, 반복.
화장실을 오가다 본 사장님의 등은 많은 돌을 삼킨 연못처럼 검고 쓸쓸했다. 걸맞게 목소리는 걸걸했다.
길고양이가 종종 거리며 내 시선을 뺏아 우리 대화는 산만했다.
유전학, 페미니즘, 채식주의 등등을 말하다가 주의자라고 표방할 때 그것은 금새 배타적이 되고 증식적이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고 언성을 높이다 `수어사이드 랩`이란 화제에서 내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질소를 이용한 죽음. 삶을 위해 우리가 모색하는 방법만큼 죽음을 위해 우리가 모색하는 방법도 무수하지. 양면의 동전. 동전을 끝없이 삼켜 죽은 남자는 무게가 아니라 중금속 중독으로 죽었다. 이 순간에도 실패한 죽음 때문에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을 테지. 고양이가 잽싸게 지나갔다.
서울 아트시네마가 이전한 서울극장을 지나며, 우리는 아주 개인적이고 비밀스럽고 실체가 없어 더 꺼내기 어렵고 일단 꺼내면 버리게 되는 이야길 했다. 새우와 오징어 튀김 전문인 종로 포장마차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자 나타난 포장마차보다 사람 무리가 장관이었다. 누가 누군지 모르게 우리는 무리 속에 섞였다. 자몽 소주라는 것도 있군. 나온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냐며 너는 유자 소주 얘기도 했다.
귀는 이 얘기 저 얘기 가리지 않고 흡수한다. 눈은 얘기의 진원지를 찾아 대상과 결합시킨다. 궁합이니 자기니, 그 사람은...하며 모두가 비슷비슷한 화제로 얘기를 하고 있어 수용소처럼 남녀 구분을 1차로 한다. 차림새와 행동을 2차로 연결한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얼굴은 대개 불콰했다. 혈색이 변하진 않지만 다른 건 숨길 수 없어 나는 나대로 긴장했다. 술이 아니라 사람이 주는 압도감. 이미 자신에게 압도 당해 있지.
˝타자를 향한 박해의 기반은 타자하고 맺은 연대다˝
ㅡ레비나스
그렇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는 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테리 이글턴이 레비나스 문장을 인용하며 사랑과 증오가 한 몸이라고 말한 건 적절했다. 적절한 인용, 적절한 사고, 적절한 삶, 내게 ˝적절˝은 ˝최고˝ 만큼 어렵다.
취기의 무거움에 많은 행동을 줄일 수 있었고 일찍 이불을 끌어 당길 수 있었다. 비슷할까, 그런 생각을 자장가 삼아 잤다.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