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현재를 향한 영원한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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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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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네거트, 유머를 잃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세상을, 시대를, 현재를, 타인을, 나를, 걱정할수록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니까요. 그래서 재밌는 소설을 읽고, 쓰고 싶은 걸 테죠.
그런데요. 재밌으면서 괴로운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요. 계속 그래요. 그리고 말 좀 그만하라고, 내 목을 조르고 싶다니까요. 지금도.
우린 왜 그렇게 웃기고 싶었을까요. 알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사실 희극과 비극은 같다는 걸.
유머로 무장한 당신과 철학으로 무장한 비트겐슈타인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둘이 너무 다르잖아? 하면서.
* 상상력이 없으니 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할 수 없었다.(『타임 퀘이크』, p37)
ㅡ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생각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던 부분과 비슷했죠.
* 옥스퍼드 인용사전 제3판에 영국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의 이런 말이 소개되어 있다. “불신을 자진해서 잠시 정지하는 것, 거기에 시적 신뢰가 있다.”(『타임퀘이크』, p117)
ㅡ당신이 인용한 새뮤얼 콜리지의 이 말도 비트겐슈타인 또한 얼마나 갈망했던지.
하지만 같은 시기 전쟁의 참상을 겪고 화학을 소재로 써도, 당신과 프리모 레비는 얼마나 다른지요. 원소들의 특성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화학적 반응을 보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의 말(『타임 퀘이크』, p94)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모독입니까. 당신은 "이 친구, 나랑 유머가 통하네, ㅋㅋ" 해줄 거 같은데 말예요. 하지만 당신은 없어요.
죽은 작가의 글을 읽는 게 솔직히 마음이 편해요. 당신이 죽어서 좋다는 말은 아녜요;
살아있는 작가들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종신형을 사는 죄인 처지 같잖아요. 살만 루시디는 대표적 예이기도 하죠.
작가의 글쓰기는,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이고 그 이후를 감당해야 하는 속죄이자 굴욕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길 바랄 뿐. 필시 그렇겠지만. 이 비유도 이미 죽은 비유죠. 그런데 작품에서 완전 범죄는 가능한 걸까요? 우리는 그럴 자격이 정말 있는 걸까요?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모조리 옮겨 놓고 멋지군~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 조이스 프라이드의 승무원들은 조종사에게 인터컴을 통해 자기들도 그만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하늘엔 그들뿐이었다. 그들은 전투기의 엄호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일본군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미 끝나 서류 작업만 남은 상태였다. 사실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도 상황은 명백히 그랬다. 킬고어 트라우트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었다. 나가사키 싹쓸이도 그랬다. 그것은 ‘잘했어요. 양키스 선수들’이었다. 그것은 이제 쇼 비즈니스였다.”
트라우트는 ‘웃지 못할 일’에서 쓰기를, 조종사와 폭격수가 그전에는 임무를 수행할 때는 어딘지 신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사람들이 떨어뜨릴 물건이 고작 소이탄과 재래식 고성능 폭탄뿐이었다. “그때의 신은 작은 신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복수와 파괴밖에 모르는 작은 신들로 여겼다. 그러나 하늘에 자기들만 있으면서 비행기 아래 자주색 제미럴 것을 달고 있을 때는 저 우두머리 신 하나님처럼 느꼈다. 전에는 누려 본 적이 없는 선택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타임 퀘이크』, p37)
우리가 글을 쓸 때 신처럼 느끼는 건 한순간이죠. 수많은 고됨 끝에 오는 잠깐의 보람. 그 뒤 현실과의 괴리감, 몰려오는 미흡함, 자괴감.
보네거트, 당신은 그런 불협들을 동시에 모으며 써내려갔죠. 현실과 환상을 마술 고리들처럼 자유자재로 붙였다 뗐다 하면서. 우리가 소중해하는 현실과 의식이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보물이기에, 당신은 소설 속에 가차 없이 투하했습니다. 원자탄은 이 소설 속에서 영원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시공간들이 반복되었죠. 당신은 그림의 한 귀퉁이를 살짝 바로잡는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마련한 소설의 자리에서 저는 기쁘게 바라 보았습니다. 현실을 난도질하는 서툰 살인자가 아니라 소설의 화가이자 언어의 마술사인 당신을 향해 웃으며.
* 그는 그 그림을 다시 걸고 바로잡기까지 했다. “그게 어쩐지 중요한 일 같습니다. 그 그림을 다른 그림들과 간격을 맞추어서 비틀어지지 않게 거는 것 말이오. 최소한 나는 혼돈한 우주의 그렇게 작은 부분만은 제대로 바로잡을 수 있었어요. 내게 그렇게 할 기회가 있었던 게 고마울 따름이오.”(『타임 퀘이크』, p196)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