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쿤 올람tikkun olam은 유대교의 핵심교리인 ‘세상을 바로잡는다’란 뜻이다. 마크 로스코는 사나운 세상에 던져졌지만 주어진 대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삶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나 언제나 예술가였다.
§ 미국에 도착한 마크 로스코
본명 마르쿠스 로트코비치(1903~1970)는 제정 러시아 시절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간 많은 러시아계 유대인 중 하나였다. 미국 이민 후 청년기까지는 마커스 로스코위츠로, 화가 데뷔 후 다시 마크 로스코로 개명했다. 어떤 국적의 흔적도 내비치지 않기 위한 최종적 도착. 그의 작품 대부분이 무제목(Untitled), 번호 제목(number 시리즈)인 것은 예술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욕망을 꺾고자 함이기도 하고, 그의 삶에서 나온 이름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이민 전, 노동자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지식인이자 약사였던 아버지 야코프 로트코비치는 반유대주의 문화와 강제 징집을 걱정해 넷째이자 막내인 마크 로스코를 탈무드 토라 학교에 보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로트코비치 일가는 탈출하다시피 이민을 갔지만 미국에 도착해 얼마 되지 않아 야코트 로트코비치는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빈민으로 추락한 마크 로스코는 언어의 벽, 계층의 벽, 인종 차별의 벽, 수많은 벽들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큰 뜻을 품고 예일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지만, 그 지성의 장소에서도 앵글로 색슨계 차별의 벽은 건재했고 로스코는 결국 중퇴했다.
Family portrait taken in Dvinsk. From the left: Albert and Sonia Rothkowitz, a first cousin, and Marcus and Moise Rothkowitz, c. 1912, courtesy Kenneth Rabin
(맨 앞에 앉아 있는 아이가 마크 로스코)
§§ 예술에 도착한 마크 로스코
사회에 대해 복수심을 품은 저항자, 마크 로스코는 유대계 예술가 공동체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같은 유대계 이민자이자 미술 선생이었던 맥스 웨버를 통해 당시 미술계의 우위였던 프랑스 미술 - 세잔의 구도와 마티스의 색감에 대한 충고를 듣는다. ‘예술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야 하며, 예술가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 p75)
이후 만나게 된 화가이자 스승, 밀턴 에이버리 역시 마티스와 세잔의 중요성을 로스코에게 강조했다.
초기 정착민들의 청교도적인 편협성과 유럽 예술을 추앙하는 미국에, 로스코는 모더니즘을 전파하는 투쟁적인 화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마크 로스코는 1930년대 말까지 화가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나갔다. “구상화에서 출발해서 1940년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1944년에는 초현실주의로, 1946년에는 멀티폼multiform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9년에 색 면 추상으로 옮겨갔다(『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 p88).”
§§§ 예술의 전당 《마크 로스코전》(2015.3.23.~6.28) (※ 현재 전시 중인 그림들 중심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추상표현주의 마크 로스코의 국내 전시는 그의 그림 추이에 맞춰 6개의 테마로 이루어졌다.
<신화의 시대 - 색감의 시대 – 황금기 - 벽화의 시대 - 로스코 채플 - 부활의 시대>
<신화의 시대>는 지하철 안 인간군상, 정물, 구상 그림들이다.
프로이트가 심리학을 표현하며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을 사용했듯이 당시 1940년대 뉴욕 예술가들에게 그것이 주요소재였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상황임을 생각해 볼 때 인간성의 회복 상황에서 주로 대두되는 '그리스 신화, 종교성, 철학'이 큰 주조가 되는 것은 이해되는 부분이다. 로스코의 정물들은 상투화된 배치와 물질성보다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비극적인 색감이 두드러진다.
로스코는, 그당시 유럽 남부에서 소일하며 자족해 사는 피카소, 미로 같은 예술가들을 비난하며, <안티고네> 같은 작품에서 동시대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세계의 비극성을 재현하려 했다. 알다시피 안티고네는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고행에 동행하며 도와주었고, 반역자로 처형된 오빠의 시신을 법을 어기고 몰래 묻어주었다가 크레온왕에게 처형당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고통에 처한 인간이면서도 타인을 돕고 義를 따르는 박애주의를 보여준다. 즉, 마크 로스코의 신념인 티쿤 올람tikkun olam을 대변해주는 인간상이다.
Mark Rothko, <Subway> 1940, oil and canvas, ⓒ National Gallery of Art
Mark Rothko, <Antigone> 1939-1940, oil and canvas,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 / ARS, NY / SACK, Seoul
<색감의 시대>는 ‘멀티폼(커다란 캔버스에 공간과 색을 배치)’ 제작 시기다.
색채와 구조에 운동감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의미를 지워버리려는 의도인 무제목(Untitled), 번호 제목(number 시리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면의 크기와 색 농도가 무수히 조합되는 직관의 세계이자 유기체적 세계이다.
1943년 로스코는 자신이 발표한 [예술에 관한 성명]에서 복잡한 생각을 심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단순함'이라 언급했다. 그리고 "환상을 없애고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평면에 몰입하게 된다.
“하나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그때부터 생명력을 갖게 돼.
회화적 형태란 의욕과 자기주장을 위한 열정을 가진 유기체들이야.
이것들은 익숙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순응하거나 위반할 필요 없이 내적 자유를 갖고 움직이지.
내 말은 말이야.... 모든 형태들은 모든 생명체가 타고 나는 다양한 결합들을 불러일으켜 유기적 실체가 된다는 거야.
바로 이런 것들 나에게 가장 기초적인 의식의 기원을 만들어주지.”
ㅡ Mark Rothko
Mark Rothko, <Untitled> Multiform, 1948, oil and canvas, ⓒ Collection of Kate Rothko Prizel
<황금기> 49년 후반부터 마크 로스코의 독특한 특징이 부각된 명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멀티폼 그림의 색 덩어리 수가 줄고, 모양도 사각형으로 확정되었고, 캔버스 크기도 확장되었다.
"이것 봐,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사유야.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나?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순간은 10%에 불과하잖아? 나머진 기다림이야"
ㅡ Mark Rothko
"나는 색의 관계나 형태, 그 밖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기본적인 인간 감정들, 그러니까 비극, 황홀, 숙명 등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ㅡ Mark Rothko (셀던 로드먼과 인터뷰 中)
Untitled, 1949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 / ARS, NY / SACK, SEOUL
Untitled, 1953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 / ARS, NY / SACK, SEOUL
우리 내면은 핵심을 알 수 없이 깊지만 그 표피는 아주 얇다. 로스코의 거듭된 얇은 붓질 사이로 색을 입은 내면들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서광이자 황혼이다. 로스코가 심취했던 니체의 저작들처럼.
“요즘 어때요?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지금 기분 어때요?
세상은 갈등이 넘치지... 어감이 넘치고 문제도 많아 병들어있고, 너무 불행해... 적어도 난 괜찮지 않아. 아니, 우리 모두 괜찮지 않겠지. 우리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괜찮아요" 라는 말은 아니야. 이 그림들을 한 번 봐. 보란 말이야! 출입구 같은 어두운 사각형 보이지, 저기 구멍은 나와 현재를 뛰어넘는 무언가. 황홀함의 신음. 신성하거나 저주받은 무언가. 불멸한 무언가. 너만의 슬픔을 숨기고 있지.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 줄 아나? 기쁨, 밝은 색깔, 그들은 그냥 사물들이 예쁘고 아름답기만 원해. 생명이 없는 그림들 말이지... 내 그림은... 그건 예쁘지 않고 괜찮지도 않잖아.. 하지만 난 너의 심장을 멈추기 위해 여기 존재하는 거야. 난 너를 깊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라고... 너 스스로 생각하고, 위로하기 위해... 예쁜 그림이나 만들러있는 게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ㅡ Mark Rothko
보통 우리는 그림의 중앙, 대상에 집중한다. 그러나 로스코의 제작방식을 알고 접하게 되면 가장자리의 아스라함, 선과 색이 만나고 뭉쳐지는 가느다란 접점,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흩어지기 직전 같은 분위기에 몰입하게 된다. 거기 중심도, 핵심도 없다. 대상없는 집중. 그때 나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아니, 읽고 싶다는 생각을 잊는지도 모르겠다.
“회화란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침묵과 고독을 끝내고 다시 한 번 숨을 내쉬고 자신의 팔을 쭉 펴는 것이다”
ㅡ Mark Rothko
Henri Matisse <The Red Studio> oil on canvas, 1911, ⓒ MoMA
로스코가 추상의 세계로 전환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앙리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이다. 강렬한 색채와 흡입력, 강력한 평면성, 빙글빙글 원형으로 읽게 되는 사물들의 이야기들.
이 작품은 로스코 미술의 기원과 끝의 비밀을 함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스코의 수많은 붉은 그림들과 그가 자살하기 전 완성한 마지막 작품 "피로 그린 그림"의 눈부시지만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을.
<No. 5>, 1958. Oil and acrylic on canvas,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Gift of the Mark Rothko Foundation, Inc. (1986.43.162). Courtesy of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벽화의 시대> 는 로스코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창과 문이 모두 벽돌같이 막힌 느낌.
시그램 벽화 스케치, 1959
로스코가 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시그램 빌딩의 레스토랑 벽화시리즈 의뢰를 수락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앉은 이들이 밥맛이 뚝 떨어지게끔 그림을 그리려던 것이었는데, 작업 중 돌연 포기한다. 그것에 대한 로스코의 자세한 심경은『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에 잘 나와 있다. 책장사는 아니고; 아래 진행해야 할 얘기가 많아서 일일이 하기가;_;) 아래 이야기를 보시다보면 감이 잡히실 듯~
전시장에서 실제 시그램 벽화 스케치들을 보며, 나는 용암이 들끓는 지옥의 오래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붉은 흙 속에 갇힌 인간을...
하버드 벽화 스케치, 1962
하버드대학 벽화 스케치는 냉철함을 요구하는 듯 붉은 바탕에 푸른 획 세 개를 배치해 어떤 권좌를 연상시켰다.
이 외에도 하버드에는 여러 작품이 있는데, 강한 빛에 훼손되어 치웠다가 기술이 개발되자 복원한 후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로스코 채플>은 로스코가 시그램 빌딩 레스토랑의 벽화시리즈를 거부하고 떠난 여행에서 영감을 완성하게 된다.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고, 그는 어둠에서 빛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주시하게 됐다. 다크 페인팅 속에서 떠오르는 색감의 메시지를... 모든 것들이 공존하며 화해할 수 있는 공간을.....
석유사업가 드 메닐 부부의 제안으로 로스코는 휴스톤에 로스코 채플을 완성하게 된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곳. 수피 댄스가 이뤄지고, 달라이 라마가 설법을 하고, 카톨릭 예배, 결혼식과 장례식 모든 것이 가능한 장소. 2001년 로스코 채플은 내셔널지오그래픽사가 생애 동안 방문해야 할 가장 평화로운 장소로 선정했다.
untitle, 1969
http://imgkid.com/rothko-chapel-paintings.shtml
<부활의 시대> 1970년.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혼, 그의 성공과 함께 떠나간 친구들, 끊임없이 다가오는 탐욕의 무리들.
로스코, 마지막을 향하다. 붉음 가운데 사방에서 비어져 나오는 흰빛. 그 흰빛은 붉음이 갈라지고 찢어져 피어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사방에 깔려 있었기에 붉음은 흰빛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서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각각이 환하다. 볼수록 점점 더.
마크 로스코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블랙이 레드를 삼키지 못하게’ 레드와 화이트를 완벽히 묶어놓고 떠났다.
남아있는 로스코의 사각의 그림들은, 빛으로 된 문으로 여전히 서 있다. 우리가 꿈꿔온 공간을 보여주며 둥근 모서리의 색채들로 우리를 품는다. 그리고 수평선의 체험으로 무한히 우릴 부른다.
ㅡAgalma
다른 그림도 그렇지만 그의 유작이자 마지막 Untitled(1970) "피로 그린 그림"은 직접 봐야 합니다.
아래 제가 찍은 사진은 가짜입니다. 진실로!
그가 그어버린 손목이 남아서 증언하는 것 같은 그림.
* 마크 로스코 책에 대해서
ps 1) 책에서 다 전하지 못한 마크 로스코의 많은 것들은 여러분들께 남깁니다. 왜 영국의 테이트 박물관으로 그림을 보내게 됐을까요ㅎ?
ps 2) 60년 만에 아들이 발견한 마크 로스코가 쓴 예술론 『The Artist's Reality』이 제일 먼저 출판되었어야 했을텐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 전시에 대해서
ps 3)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마지막 해에 마크 로스코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애플의 미래에 대해 영감을 얻으려 했다거나, 로스코의 가장 비싼 그림은 이제 1000억에 달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마크 로스코라는 예술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의 예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그가 사유로 그림을 그리려 했듯이 (물론 수학도 뛰어나서 그림의 각도, 배치에도 엄청 민감했다고;) 우리도 우리의 사유와 체험으로 그의 예술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s 4) 언제나 음악(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드뷔시, 바그너...)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는 마크 로스코의 작업실처럼 전시장에도 음악이 가득합니다. 마크 로스코의 이 작품을 소장한 박물관의 보수 문제로 작품들이 대거 온 거라고 하죠? 놓치지 마시길. 좋은 전시였어요.
ps 5) 전시를 다 보고 바로 나오지 마시고, 그의 처음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세요. 신화가 시작되던 그 지점으로....벅차게.
* 나머지 전시장 기념품 사진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이 정리만으로도 기진맥진....흐아;;;)))
"정치로 문화를 만들 수 없지만 문화로는 정치를 만들 수 있다" ㅡ 테오도르 호이스(독일 정치인, 문화장관이자 연방 초대 대통령) : 예술의 전당 《마크 로스코전》(2015.3.23.~6.28) 中
"역사적으로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언가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운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른 화가에게도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친밀하며 인간적이고 싶어서입니다.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경험의 테두리 바깥에 두는 것, 즉 경험을 슬라이드 쇼나 축소렌즈를 통해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면 그 안에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ㅡ Mark Rothko(『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 p164)
"내 그림들은 크기가 크고, 색감이 강렬하고, 액자를 끼우지 않았기에, 그리고 미술관의 벽은 대게 거대하고 장엄하기 때문에 그림이 벽을 위한 장식 부분처럼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가 왜곡될 것입니다. 그림은 친근하면서도 강렬합니다. 장식적인 성격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림들은 규격화된 비율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비율로 그려졌습니다." ㅡ Mark Rothko(『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 p174)
"나는 제일 큰 그림도 걸 생각입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처음으로 마주치는 것이 큰 그림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최초의 체험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람자에게 자신과 나머지 그림들과의 이상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열쇠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당신이 작업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림이 도착하면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그리고 전시회 내내 그 느낌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ㅡ Mark Rothko(『마크 로스코』아니 코엔 솔랄, 도서출판 다빈치, 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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