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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만이 내게 완전한 타향”(블랑쇼, IC 60)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단어, 그 개념 속에 나는 얼마나 들어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일상언어로 쓰는 ‘나’, ‘죽음’, ‘너’는 우리가 돈을 주고받듯이 매개이다. 언어는 대상과 사물을 대체함으로써 그것을 지워버린다.
네가 아프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아픈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정확히는 모른다.
이런 경우도 있다. “당신은 인정머리가 없군요.”, “당신은 천사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 안의 반대 성향을 되짚어보게 된다(맞아, 나는 천사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선 할 말이 없으므로 생략). 이처럼 나와 너에 대해 아무리 많은 특징들을 가져온다 해도 부정확하며,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익명화되며, 개체성을 상실한다. 같지 않으면서 같아지는 우리.
도대체 나는 어디 있는가.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할 문제인가.
■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가능한 친구이다. 친구와의 관계는 언제나 불가능성과 함께 한다. 이 속에서 사람은 무력해지며, 이때의 소통이란 아주 먼 미래에는 서로 구별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개별 존재들의 소통이 더 이상 아니다. 즉, 소통은 개개인들을 욕망의 깊숙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한데 뭉치게 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소통은 융합을 확인하는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거부하는 운동으로, 어떠한 보증도 확실함도 없는 운동으로서 홀로 나타난다.(F 96) (p 228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인간을 이름없는 존재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소, 문학”
당신은 당신을 대신해 말해주고 행동하는 주체를 문학 속에서 찾는가. 블랑쇼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 모두는 그 속에서 사라지는 자이다. 인간에게 언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익명성’, ‘부정성’, ‘부재’에 핵심기제이다. 언어와 죽음이 함께 소용돌이 치며 말하고 있는 장소, 문학. 인간은 사는 내내,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사유하는 이상한 생물이다. 지식과 밥과 자식과 타인과 자연과 문학, 세상의 모든 것이 죽음 사유의 연료로 쓰인다.
■ 194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블랑쇼가 쓴 모든 글은 우리가 죽음과 맺는 관계를 계속해서 반성하고 이 문제로 되돌아간다. 어찌 보면 우리는 문학이 요구하는 바를 따를 때 죽음을 경험한다. 물론 이때의 죽음은 누군가의 소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미성'이나 주체성의 한계를 묻는 질문으로서의 죽음이다. 글을 쓰는 것은 언어의 익명성에 노출되는 것이니, 인간 주체의 파멸과 소멸은 문학의 조건이다.〔언어의 익명성이란, 언어는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없으므로 특정한 이름 아래 귀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현대 대중 사회의 한 특질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인 익명성과는 다르다. 블랑쇼는 언어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해도 문학도, 죽음 앞에 처한 인간도 익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성찰로 나아갔다. 그가 언어, 죽음, 문학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제시한 익명성, 비인칭, 중성성은 블랑쇼가 일찍부터 탈주체적 시각을 앞세워 사유해 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비인칭과 중성성이라는 용어는 언어의 본성에 관한 성찰을 중요시한 블랑쇼의 사유를 잘 반영하고 있다.〕(p22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현실에서는 ‘나’는 죽지 않으며, ‘어느 누군가가 죽는다.’(SL 241)
죽어가는 일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 각자가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 자신과 나를 갈라놓는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달리 말하자면,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나를 가리켜 ‘나’라고 말하는 힘을 빼앗긴다. (p102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니체에게서 물려받은 화두이자 블랑쇼가 글 전체에 걸쳐서 고민해 온 것은, 생소하며 이물스럽고 겉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실존의 유한성이었다. 우리의 실존은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드는 힘 있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이름 없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수동적인 인간 존재이다. (p230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공동체 없는 이들의 공동체
내가 아플 때 더 아픈 사람 앞에서, 내가 행복할 때 더 환한 사람 앞에서 겸양을 배운다.
바닷가 물결들의 흔들림과 시장 사람들의 오고감은 그래서 닮았다.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파도소리와 말소리는 그래서 닮았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왔다가 사라진다. 너는 네가 아닌 채 말하고 써야 한다고.
■ 주체라는 추상적 보편 관념으로 축소되지 않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공동체가 추구한다면 또 다른 언어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를 모두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진실에 다가가는 비변증법적 글쓰기가 그것이다.(IC36) 이 언어는 정치적 참여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적 참여의 언어이다. 즉, 언제나 세상 속 인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 것이지 오락거리가 아니다.
세계의 바깥과 잇닿는 것이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가 반성적인 인간 행위의 총체로 이해되는 한, 나아가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고 이해되는 한〔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1921) 제1장에서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세계의 바깥이란 완전히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실존의 의미를 소모해 버리지 않고 세계 안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우리 자신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끔, 문학은 우리를 인도하면서 참여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글쓰기의 소통 속에서, 개별적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개별적 존재는 앞서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별 존재는 그 자체의 진실, 그저 진실이 된다. (ICN 78)
(p209~210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참여’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블랑쇼와 동시대를 함께한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 속 '참여문학' 를 떠올린다. 두 사람의 ‘자유’, ‘혁명’의 기본 논지는 비슷하나 그들이 문학을 보는 입장과 방향 모색은 판이하다. 사르트르는 문학의 직접적 정치 개입을 논하며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켰다. 블랑쇼는 “나의 세계에 불쑥 등장한 타인은 내가 이 관계를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경험을 ”(p221) 필연적으로 낳으므로, 문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 간접적 참여와 비참여를 통한 정치 개입을 논했다.
이러한 입장 차는 아직도 건재하다. 당신은 어떤가.
■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을 뜻하는 공산주의는 정치 경제를 지키거나 현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과 대립한다. …… 공산주의는 약화된 영구한 혁명이다. ‘약화된’이 붙은 것은 완벽한 상태를 가져오는 영광스러운 혁명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공산주의는 정치제도들이 제도화되려고 하는 것을 계속 중단시키는 정치체제를 지향한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기존 공동체에서 내쫓긴 정치성을 사유하며, 조금 난해한 표현이긴 하지만 블랑쇼가 바타유를 따라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공동체 없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 신화로 회귀하지 않는 정치체제의 수립. 바타유와 블랑쇼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최종적인 구원을 약속하지도, 사람들의 어깨에서 정치의 무게를 벗겨 주지도 않는다. …… 문학은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혁명적이다. (p218~219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나는 어떤 나라, 어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든 중요하지 않다. 문학이, 작가가 “유명세”와 “문고본”으로 재단된 상품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원한다. 나는 최소한의 입장으로 작품을 순수히 만나길 바란다. 그때 나는 오성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작품과 친교를 나눌 것이다. 문학은 내게 영원히 열려있는 우정을 허락하는 타인이다.
내가 왜 그간 카프카, 말라르메, 바타유, 들뢰즈, 바르트,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 낭시, 아감벤의 글을 접하며 즉각적인 공명을 느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공동체 없는 공동체로서 서로에게 말하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저작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
나는 모리스 블랑쇼의 비평집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과 소설 『기다림 망각』, 『죽음의 선고』 등을 읽었다. 『문학의 공간』은 몇 해마다 한 번씩 다시 읽는 책 중 하나다.
그의 저작 독서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책은 『문학의 공간』, 『카오스의 글쓰기』, 『무한한 대화』 일 거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대화』(1969)는 미출간 중인데, 카프카, 파스칼, 니체, 브레히트, 카뮈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으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대한 화답이라고 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속에서 논의된 '죽음', ‘죽음과 타자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해 들어간 저서이기도 해서 국내에 반드시 출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난해한 주제라 국내 출판이 언제 될지 알 수 없으나 , 그린비 출판사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 기획에 이 책도 꼭 넣어주길 바란다.『카오스의 글쓰기』보다 형식상의 실험이 더 확대되었다고 하니 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에서는 이 책이 출간된 2008년 당시까지 국내에 소개되었던 모리스 블랑쇼의 작품들을 짚어주고 있어 도움이 된다. 카프카와 베케트를 떠올리게 하는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 「목가」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소설이다.
내 생각에는 블랑쇼 소설부터 접근하기보다 모리스 블랑쇼의 주요 비평집부터 읽고, 그 시기의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자는 게 아니라, 저자가 사라지는 딜레마를 이해하고 나 자신의 부재함도 인정하기 위해서.
나는 다른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 변화나 정치적 행동들 등등.
이후는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느끼면서 알아가야 할 책임임을 밝힌다. 모리스 블랑쇼를 읽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故 모리스 블랑쇼(1907~2003)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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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와 레비나스. 그의 은둔적 성격 탓에 남겨진 사진이 없어 희귀 사진이라고 한다. 이 책의 표지사진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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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은둔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