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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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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세워 사유하게 하고 빤한 걸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맛으로 읽던 김애란의 문장이, 장편에서는 이야기 진행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느낌. 250쪽 안 되는 장편에 너무 많다 싶은 인물들, 죽음 남발 설정도 아쉬움. 연필 쥔 손으로 끝난 이 소설 마지막 문장처럼 다만 계속될 다음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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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페머러의 수호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7
조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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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스파이물과 음모론, 문헌학적 취미... 그러나 4장에 이르면 한국의 가장 아픈 현실을 곡진하게 애도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챕터로 이야기 전체에 깊이감을 부조한 글쓰기에 별 다섯 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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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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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고 불편한 것이 악덕인 시대에도 번역가는 식도염과 안구건조증 사이에서 분투한다. 삼백 권의 역서를 등 뒤에 지고도 저자는 이처럼 진솔하다. 오늘의 행복 또한 이런 방식으로 번역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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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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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뒤로 내 지옥의 풍경은 또렷해졌다. 용암이 들끓고 끝없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곳.


 (내가 쥐스킨트를 오래 전부터 좋아해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ㅜ.ㅜ)

 

비둘기들로 가득한 산 마르코 광장은 공포-호러물이 내게 안기는 인상과도 겹쳐진다. 낯선 방향에서 번들거리는 수천 개의 시선들. 지상의 것이 아닌 듯 아찔한 색과 현란한 패턴들. 게다가 그들의 운동은 예고도, 복선도 허락지 않는다. 언제 휙 방향을 꺾어 다가올지, 언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지 알 수 없다. 해서 어떤 이에게는 자신만 아는 정보와 논리를 지니고 돌진하는 공포가 일종의 반칙처럼 여겨질 수밖에. 


하긴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비로소 공포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공포란 결국 몰이해의 만화경 같은 것인지도. 그러니 모른다는 것. 어쩌면 공포의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익숙한 얼굴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내 욕망과 갈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악몽》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가 어제야 다 읽어냈다. 전작 《좀비》와 《대디 러브》에 비해 꽤 마음이 고단했는데, 아마도 그건 저마다 다른 인물과 악몽에 익숙해지느라 그랬던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과 중편 분량의 소설을 포함 무려 일곱 편에 등장하는 이 녀석, 저 녀석들을 한 날 한 시에 감당하기란 아무래도 조금 버거운 일일 테니까. 끊지도 화해하지도 못할 더블로 인해 끝내 파멸하는 이야기 〈화석 형상〉〈알광대버섯〉은 썩 닮은 구석이 있었고, 〈베르셰바〉는 충격 여파가 오래 갈 듯한 단편이었다. 앞으로 누군가 풀린 운동화끈을 매준다거나 바짓단의 먼지를 털어준다고 다가오는 순간, 흠칫 발을 뒤로 빼게 될지도. 그렇게 기묘한 인상의 소녀 이미지를 간신히 삼킨 다음, 며칠이 지나서야 〈머리 구멍〉을 펼쳤는데 또 한 차례 "옴마야……" 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는 인간의 두개골이 모든 자연물질 중에서 가장 내구성이 높고 광물처럼 딱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뚫자면 제대로 된 드릴, 톱, 억센 힘이 필요했다. 의대 해부실에서 그는 그런 드릴로 실습을 해봤지만, 지금 이 머리는 살아 있는 머리이고, 두개골 속에 든 뇌는 살아 있는 뇌라고 생각하자 공포가 차올랐다. 이 사실만큼이나 두려운 사실은 그가 환자를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자를 면담했고, 걱정하는 남자를 잘 달랬다. 이제, 잔학한 만화책의 고문 장면처럼 이 남자는 앉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고, 죔쇠로 고정됐다.

(중략)

신경외과의는 그 위에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가 뚫어야 할 자리를 표시해놓았다. “해봐.” 선임자가 반복했다. 환자의 두피를 가르자, 피가 제멋대로 흘러서 닦아냈다. 이어서 두피를 뚜껑처럼 젖히자 두개골-뼈-이 드러났다. 루커스는 자신이 차분하다고, 차분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전동 드릴을 뼈에 댔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머뭇대자 선임자가 짜증스레 재촉했다. “계속해.” (pp. 132-133) 


“계속해.” “해봐.” 도드라진 저 명령어들이 소설 속에서 수술을 집도하던 레지던트에게 하는 말인지, 나처럼 심약한 독자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을 만큼 오츠 여사는 집요하게 전진한다. 이웃 님 블로그에서 본 바, 핑크빛 블라우스를 입고 햇살 환한 집에서 집필을 하시더만 어째 이렇게 캄캄하고 서늘한 세계에 골몰히 능하신지. 카프카에게서 공포스러운 것을 농담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자신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작가란 무엇인가 V. 2》p. 163)는 이 수줍음 많고 가냘픈 소설가의 세계를 좀 더 또렷이 납득하고 싶어서 얼마 전 사둔 《작가의 신념》을 책장에서 꺼내놓고는 나머지 단편들을 읽어나갔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 타인을 내 바람대로 읽는 것의 함정(특히 상심과 외로움으로〈도움의 손길〉)을 거쳐 마지막 소설 〈옥수수 소녀〉에 다다르자 그제야 조금씩 소설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다. 주드라는 이름의 이 기괴하고 거친 인물에 선뜻 공감이 가는 건 아니지만 왜 소설의 부제가 '사랑 이야기'여야 했는지도 납득이 갔다. 흔히 떠올리는 남녀 간의 사랑말고도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으니 그것은 때로 집착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실감케 되기도 할 테니까. 뿐인가. 시간적으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도 있다. 



기괴한 논리 끝에 다다른 자신의 결론에 탐닉하며 앞으로 몇 발짝을 더 떼는 인물들, 그 순간 진입하게 되는 악몽의 풍경들은 그래서 어느 순간 서늘한 계시처럼 마음에 남기도 한다. 오츠 여사의 폐색과 공포를 기꺼워하지 않으면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야말로 우리가 듣지 못하고 꿈으로만 꾸었던 이야기, 그 진짜 같은 악몽의 서늘한 욕망과 어리석은 바람마저 이해하는 작가이니까. 오십 편 가량의 장편소설과 천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쓰면서 어떤 길은 버리고 어떤 길은 스스로 닦아나갔을 그 양적인 분투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일 수도 있고. 게다가 다행히도 오츠 여사는 이 악몽들에 집어삼켜지거나 그녀 자신을 "찢어버리지"는 못할 만큼 삶, 기술과 예술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 상상력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며, 첫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분석에서도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손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의 무아지경에 지배받는 순간 고독의 최고 예술가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백열 상태에 있는 영혼을 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나를 찢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산문으로 바꾸어 그 세계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밤새 작업하며 첫 소설 《소송》을 고투 속에서 쓰고 있는 젊은 프란츠 카프카를 생각한다. 


- 《작가의 신념: 삶, 기술, 예술》(은행나무, 2014.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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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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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하고 말하는 거라고 했던가.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첫 문단 혹은 첫 페이지에서 누군가를 소개받는다. 줄곧 그를 지켜보며 그의 어법과 행동 패턴을 익혀간다.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서 작동되는 성향과 충동을 챙기고, 그의 경험, 그가 지나온 사건들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모든 이해가 일종의 오독이란 점을 감안해도 처음 50페이지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왜?”라는 물음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럴 수밖에 없겠지”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성공적이었다면, 남은 건 수월한 오르막길을 따라가는 일뿐이다. 아니면 내리막을 따라 줄달음치거나.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100페이지마저 통과했다면 그 소설은 끝까지 읽힐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 《이노센트》는 100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왜?”가 해결되지 못한 채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왜 저기서 고스란히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지? 왜 성을 내는 대신 고개를 외로 꺾고 마는 걸까? 어쩌면 저렇게 경솔할까, 어쩌다 저런 판타지를 품게 된 걸까? 그래, 뭐 쪽지 한 장을 건네기 위해 수십 장을 썼다 버리는 일이야 누구나 한번은 겪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만 그녀에게 쪽지를 전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후반에 배치된 광기어린 장면들을 생각하면 그는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무슨 일에든 쉽게 흔들리는 캐릭터라야 세계의 격렬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레너드의 그 서툶, 우왕좌왕하는 흔들림이야말로 ‘이노센트’한 시절의 어떤 속성이라 할 만하다. 이제 막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이십 대 청년이다. 당연히 인정받고 싶어 하며, 때로는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p. 34)에 매혹될 수밖에.

 

연인 마리아가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과 첩보 활동이 벌어지는 지하 터널 사이. 레너드는 그 두 세계를 수직으로 오가면서 각각의 공간에서 비롯된 감정을 이쪽과 저쪽에 투사하는데, 갈등이 고조되고 파국의 기미가 축적되는 부분도 영민하게 배치되어 있어 짜임새를 더한다.  탁월한 문장들 덕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가는 일도 어렵진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언 매큐언인 것이다. 초중기작이든 후기작이든.  

 

완독 후 기시감에 사로잡힌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노센트》를 덮고, 얼마 전 읽었던 《지평》을 다시 꺼내 읽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가.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다른가. 공교롭게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또한 베를린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결말을 열어놓고 있다. 《이노센트》가 베를린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면, 《지평》은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에 살고 있다는 마르가레트를 만나기 위해 보스망스가 걸어가는 장면으로 맺음한다.

 

레너드와 그의 연인 마리아(《이노센트》), 보스망스와 그의 연인 마르가레트(《지평》). 전자는 삼십 년만의 만남이고, 후자는 성사된다면 무려 사십 년이 지난 뒤의 재회다. 심지어 이 두 커플의 관계를 위협하는 제3자가 여자 쪽을 쫓아다니는 남자라는 점마저 비슷하다. 다만 《이노센트》의 제3자 ‘오토’가 맞는 최후에 비해 《지평》의 제3자 ‘부아야발’의 경우, 그의 슬픔과 체념까지도 넌지시 짚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와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사이에는 이만한 거리감이 있다. 한쪽에서는 편지가 날아와 서로의 속사정이 장황하리만치 낱낱하게 밝혀지는 반면, 다른 한쪽은 오직 흐릿한 기억에 의지해 상대를 떠올리고 저 혼자 길을 찾는다. 예컨대 《지평》의 경우,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인데, 정작 이 비워진 이야기의 반쪽은 보스망스가 디펜바흐 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희망적인 톤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거듭 힘주어 말하는 남자, 폐허 더미에서 피어난 라일락을 유심히 눈여겨보는 남자, 보스망스의 행동들 때문이다.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로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평온한 느낌과 함께, 그가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정오가 되면 하나 되어 만나는 것처럼. 

(《지평》 p. 184)

 

이야기의 톤은 다르지만 《이노센트》의 결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레너드 역시 멈춰진 시계를 언급하며 중단된 시간을 이어가리라 다짐한다.

 


미리 알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실패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떡갈나무 사이 그늘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햇살 환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흰 깃대를 지나서 현관으로 갈 것이다. (……) 두 사람은 탁상시계를 다락방에서 꺼내와 태엽을 감고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 (……) 그들은 베를린으로 함께 돌아오리라.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으니. 

(《이노센트》 p. 416)

 

어떤 연인들의 시간은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가 예순 개의 눈금을 지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고작 한 개의 눈금을 지날 뿐이지만 그 혹은 그녀가 몇 시에 위치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때 그들을 있게 했던 비밀, 현재까지도 유효한 그 비밀에 묶여 있다면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움만은 아닐 테니. 그러므로 모디아노의 말은 옳다. “모든 첫 만남은 상처”인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한 점에서 만나리라는 모호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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