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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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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뒤로 내 지옥의 풍경은 또렷해졌다. 용암이 들끓고 끝없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곳.


 (내가 쥐스킨트를 오래 전부터 좋아해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ㅜ.ㅜ)

 

비둘기들로 가득한 산 마르코 광장은 공포-호러물이 내게 안기는 인상과도 겹쳐진다. 낯선 방향에서 번들거리는 수천 개의 시선들. 지상의 것이 아닌 듯 아찔한 색과 현란한 패턴들. 게다가 그들의 운동은 예고도, 복선도 허락지 않는다. 언제 휙 방향을 꺾어 다가올지, 언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지 알 수 없다. 해서 어떤 이에게는 자신만 아는 정보와 논리를 지니고 돌진하는 공포가 일종의 반칙처럼 여겨질 수밖에. 


하긴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비로소 공포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공포란 결국 몰이해의 만화경 같은 것인지도. 그러니 모른다는 것. 어쩌면 공포의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익숙한 얼굴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내 욕망과 갈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악몽》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가 어제야 다 읽어냈다. 전작 《좀비》와 《대디 러브》에 비해 꽤 마음이 고단했는데, 아마도 그건 저마다 다른 인물과 악몽에 익숙해지느라 그랬던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과 중편 분량의 소설을 포함 무려 일곱 편에 등장하는 이 녀석, 저 녀석들을 한 날 한 시에 감당하기란 아무래도 조금 버거운 일일 테니까. 끊지도 화해하지도 못할 더블로 인해 끝내 파멸하는 이야기 〈화석 형상〉〈알광대버섯〉은 썩 닮은 구석이 있었고, 〈베르셰바〉는 충격 여파가 오래 갈 듯한 단편이었다. 앞으로 누군가 풀린 운동화끈을 매준다거나 바짓단의 먼지를 털어준다고 다가오는 순간, 흠칫 발을 뒤로 빼게 될지도. 그렇게 기묘한 인상의 소녀 이미지를 간신히 삼킨 다음, 며칠이 지나서야 〈머리 구멍〉을 펼쳤는데 또 한 차례 "옴마야……" 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는 인간의 두개골이 모든 자연물질 중에서 가장 내구성이 높고 광물처럼 딱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뚫자면 제대로 된 드릴, 톱, 억센 힘이 필요했다. 의대 해부실에서 그는 그런 드릴로 실습을 해봤지만, 지금 이 머리는 살아 있는 머리이고, 두개골 속에 든 뇌는 살아 있는 뇌라고 생각하자 공포가 차올랐다. 이 사실만큼이나 두려운 사실은 그가 환자를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자를 면담했고, 걱정하는 남자를 잘 달랬다. 이제, 잔학한 만화책의 고문 장면처럼 이 남자는 앉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고, 죔쇠로 고정됐다.

(중략)

신경외과의는 그 위에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가 뚫어야 할 자리를 표시해놓았다. “해봐.” 선임자가 반복했다. 환자의 두피를 가르자, 피가 제멋대로 흘러서 닦아냈다. 이어서 두피를 뚜껑처럼 젖히자 두개골-뼈-이 드러났다. 루커스는 자신이 차분하다고, 차분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전동 드릴을 뼈에 댔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머뭇대자 선임자가 짜증스레 재촉했다. “계속해.” (pp. 132-133) 


“계속해.” “해봐.” 도드라진 저 명령어들이 소설 속에서 수술을 집도하던 레지던트에게 하는 말인지, 나처럼 심약한 독자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을 만큼 오츠 여사는 집요하게 전진한다. 이웃 님 블로그에서 본 바, 핑크빛 블라우스를 입고 햇살 환한 집에서 집필을 하시더만 어째 이렇게 캄캄하고 서늘한 세계에 골몰히 능하신지. 카프카에게서 공포스러운 것을 농담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자신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작가란 무엇인가 V. 2》p. 163)는 이 수줍음 많고 가냘픈 소설가의 세계를 좀 더 또렷이 납득하고 싶어서 얼마 전 사둔 《작가의 신념》을 책장에서 꺼내놓고는 나머지 단편들을 읽어나갔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 타인을 내 바람대로 읽는 것의 함정(특히 상심과 외로움으로〈도움의 손길〉)을 거쳐 마지막 소설 〈옥수수 소녀〉에 다다르자 그제야 조금씩 소설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다. 주드라는 이름의 이 기괴하고 거친 인물에 선뜻 공감이 가는 건 아니지만 왜 소설의 부제가 '사랑 이야기'여야 했는지도 납득이 갔다. 흔히 떠올리는 남녀 간의 사랑말고도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으니 그것은 때로 집착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실감케 되기도 할 테니까. 뿐인가. 시간적으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도 있다. 



기괴한 논리 끝에 다다른 자신의 결론에 탐닉하며 앞으로 몇 발짝을 더 떼는 인물들, 그 순간 진입하게 되는 악몽의 풍경들은 그래서 어느 순간 서늘한 계시처럼 마음에 남기도 한다. 오츠 여사의 폐색과 공포를 기꺼워하지 않으면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야말로 우리가 듣지 못하고 꿈으로만 꾸었던 이야기, 그 진짜 같은 악몽의 서늘한 욕망과 어리석은 바람마저 이해하는 작가이니까. 오십 편 가량의 장편소설과 천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쓰면서 어떤 길은 버리고 어떤 길은 스스로 닦아나갔을 그 양적인 분투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일 수도 있고. 게다가 다행히도 오츠 여사는 이 악몽들에 집어삼켜지거나 그녀 자신을 "찢어버리지"는 못할 만큼 삶, 기술과 예술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 상상력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며, 첫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분석에서도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손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의 무아지경에 지배받는 순간 고독의 최고 예술가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백열 상태에 있는 영혼을 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나를 찢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산문으로 바꾸어 그 세계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밤새 작업하며 첫 소설 《소송》을 고투 속에서 쓰고 있는 젊은 프란츠 카프카를 생각한다. 


- 《작가의 신념: 삶, 기술, 예술》(은행나무, 2014.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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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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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하고 말하는 거라고 했던가.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첫 문단 혹은 첫 페이지에서 누군가를 소개받는다. 줄곧 그를 지켜보며 그의 어법과 행동 패턴을 익혀간다.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서 작동되는 성향과 충동을 챙기고, 그의 경험, 그가 지나온 사건들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모든 이해가 일종의 오독이란 점을 감안해도 처음 50페이지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왜?”라는 물음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럴 수밖에 없겠지”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성공적이었다면, 남은 건 수월한 오르막길을 따라가는 일뿐이다. 아니면 내리막을 따라 줄달음치거나.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100페이지마저 통과했다면 그 소설은 끝까지 읽힐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 《이노센트》는 100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왜?”가 해결되지 못한 채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왜 저기서 고스란히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지? 왜 성을 내는 대신 고개를 외로 꺾고 마는 걸까? 어쩌면 저렇게 경솔할까, 어쩌다 저런 판타지를 품게 된 걸까? 그래, 뭐 쪽지 한 장을 건네기 위해 수십 장을 썼다 버리는 일이야 누구나 한번은 겪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만 그녀에게 쪽지를 전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후반에 배치된 광기어린 장면들을 생각하면 그는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무슨 일에든 쉽게 흔들리는 캐릭터라야 세계의 격렬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레너드의 그 서툶, 우왕좌왕하는 흔들림이야말로 ‘이노센트’한 시절의 어떤 속성이라 할 만하다. 이제 막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이십 대 청년이다. 당연히 인정받고 싶어 하며, 때로는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p. 34)에 매혹될 수밖에.

 

연인 마리아가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과 첩보 활동이 벌어지는 지하 터널 사이. 레너드는 그 두 세계를 수직으로 오가면서 각각의 공간에서 비롯된 감정을 이쪽과 저쪽에 투사하는데, 갈등이 고조되고 파국의 기미가 축적되는 부분도 영민하게 배치되어 있어 짜임새를 더한다.  탁월한 문장들 덕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가는 일도 어렵진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언 매큐언인 것이다. 초중기작이든 후기작이든.  

 

완독 후 기시감에 사로잡힌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노센트》를 덮고, 얼마 전 읽었던 《지평》을 다시 꺼내 읽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가.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다른가. 공교롭게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또한 베를린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결말을 열어놓고 있다. 《이노센트》가 베를린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면, 《지평》은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에 살고 있다는 마르가레트를 만나기 위해 보스망스가 걸어가는 장면으로 맺음한다.

 

레너드와 그의 연인 마리아(《이노센트》), 보스망스와 그의 연인 마르가레트(《지평》). 전자는 삼십 년만의 만남이고, 후자는 성사된다면 무려 사십 년이 지난 뒤의 재회다. 심지어 이 두 커플의 관계를 위협하는 제3자가 여자 쪽을 쫓아다니는 남자라는 점마저 비슷하다. 다만 《이노센트》의 제3자 ‘오토’가 맞는 최후에 비해 《지평》의 제3자 ‘부아야발’의 경우, 그의 슬픔과 체념까지도 넌지시 짚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와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사이에는 이만한 거리감이 있다. 한쪽에서는 편지가 날아와 서로의 속사정이 장황하리만치 낱낱하게 밝혀지는 반면, 다른 한쪽은 오직 흐릿한 기억에 의지해 상대를 떠올리고 저 혼자 길을 찾는다. 예컨대 《지평》의 경우,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인데, 정작 이 비워진 이야기의 반쪽은 보스망스가 디펜바흐 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희망적인 톤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거듭 힘주어 말하는 남자, 폐허 더미에서 피어난 라일락을 유심히 눈여겨보는 남자, 보스망스의 행동들 때문이다.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로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평온한 느낌과 함께, 그가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정오가 되면 하나 되어 만나는 것처럼. 

(《지평》 p. 184)

 

이야기의 톤은 다르지만 《이노센트》의 결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레너드 역시 멈춰진 시계를 언급하며 중단된 시간을 이어가리라 다짐한다.

 


미리 알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실패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떡갈나무 사이 그늘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햇살 환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흰 깃대를 지나서 현관으로 갈 것이다. (……) 두 사람은 탁상시계를 다락방에서 꺼내와 태엽을 감고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 (……) 그들은 베를린으로 함께 돌아오리라.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으니. 

(《이노센트》 p. 416)

 

어떤 연인들의 시간은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가 예순 개의 눈금을 지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고작 한 개의 눈금을 지날 뿐이지만 그 혹은 그녀가 몇 시에 위치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때 그들을 있게 했던 비밀, 현재까지도 유효한 그 비밀에 묶여 있다면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움만은 아닐 테니. 그러므로 모디아노의 말은 옳다. “모든 첫 만남은 상처”인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한 점에서 만나리라는 모호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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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Square, New York, 1954, by Andre Kertesz, 
ⓒ Estate of Andre Kertesz/Higher Pictures



늦은 오후, 여기에도 눈이 내렸어. 아니, 비라고 해야 옳을지도. 가까스로 영상을 유지한 대기 속에서 눈은 금세 추적추적 발밑을 적셨으니까. 밤이 되면 기온은 더 떨어질 테고 길은 그대로 빙판이 될 테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어딘가에는 그 잠깐의 빗물이 스며들어 한 점 푸른 그늘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마도 거기,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얼마간 시간은 지체되기도 한다는 것.

 

이야기를 읽을 때, 나 또한 그렇게 지체되고 유예되는 순간을 경험하곤 해. 습기는 습기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때론 어둠이 어둠을 밝히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궁금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 하여 “이름 없는 얼굴들”(《지평》 p. 9). 그들이 겪을 다음 순간, 다음 국면의 이야기들이. 그건 오래된 내 탈주 습관이기도 했지. 

 

이야기 바깥의 그들. 그래, 내가 궁금한 건 그들 인생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거였어. 이를테면 나는 손보미의 소설 〈담요〉에 나오는 어린 부부가 자주 마음에 밟히곤 해. 아마도 이런 겨울밤이었을 거야. 그들은 Andre Kertesz의 사진처럼 드문드문 불빛이 번지는 한밤의 공원에 앉아 있었지.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그들에게 린디합을》p. 22)이었으므로 〈담요〉의 중심인물 장은 마침 헝겊으로 순찰차 유리에 낀 성에를 닦아내고 있어. 몇 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장은 야간 순찰을 도맡아 해왔지. 그가 눈에 담는 거라곤 기껏해야 둑길 건너편에 늘어선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전부야. 때문에 모든 불빛이 사라지는 새벽이 되면 그는 늘 지니고 다니던 담요에 얼굴을 묻어. “무언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 “자신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 같”(p. 21)은 기분에 아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그 담요를 절박하게 움켜쥐지.

 

그런 그의 앞에 어린 부부가 보이는 거야. 살아 있었다면 자기 아들 또래였을 연인들. 선명해진 창 너머, 그들은 갈 곳 잃은 사람들처럼  나란히 앉아 있어. 얇은 외투 차림으로 옷깃을 여민 채 캔맥주를 마시고 때로 서로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면서. 장이 다가가자 여자아이는 경계하듯 선언해. “우린 부부랍니다.”(p. 23) 요는, 둘 다 성인이고 결혼도 했다는 거야. 물론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 여기는 자유국가니까, 여기서 얼어 죽는 것도 자기들 마음이라고 하지. 그러면서 여자 아이는 추위 때문에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을 남자아이의 어깨에 올려. 동의를 구하듯 연인의 언 몸에 자신의 언 몸을 겹쳐놓지. 장은 그들을 마냥 바라보다 이렇게 말해.

 

“당신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일 거야.” (p. 23)

 

그날 장은 순찰차로 돌아가 담요를 꺼내와. 그걸 그 어린 부부에게 건네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부 사이임을 강조하던 아이들이 “우린 인간쓰레기예요”라고 자조해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 가만히 그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그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의 머리를”(p. 28) 말이야. 

 















〈담요〉의 장처럼 고개 숙인 사람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적 있어?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잖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짬뽕 그릇만 내려다보았다는 어느 여배우 이야기. 유부남 영화감독과 싱글인 여배우가 서귀포 한구석, 함석지붕집 아래 살림을 차리고 3개월을 함께 살았다지. 나중에 영화감독의 부인과 아들이 그 집까지 찾아와 결국 드잡이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네 사람은 마지막으로 함께 중국집에서 점잖게 밥을 먹어. 알고 보니 영화감독이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거야. 도망치듯 여배우와 제주도로 내려간 건 그의 마지막 탈주였던 셈이고. 그런 연유로 네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숙연히 마주앉았는데, 제 아빠를 찾아 왔던 소년은 훗날 영화감독이 되어서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해.

 

“그때 짬뽕 먹을 때, 저는 계속 선생님만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으셨어요. 먹는 내내 선생님 정수리께를 보는데,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어떤 슬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요. 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든 소설이든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선생님 그 정수리 보면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p. 95)


우리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표정을 감추기도 하지. 감정을 단련시켜 비언어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모면하기도 해. 하지만 고개를 떨어뜨린 누군가의 모습, 연약하고 무방비한 몸짓 앞에서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나봐. 연민 어린 시선 속에서 타인은 나의 다른 모습으로 읽히고, 때로 그건 자신의 상처처럼 기억되기도 할 테지.

 



 








모디아노 역시 이렇게 말해.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고(pp. 25-26). “모든 첫 만남은 상처”라고(p. 28). 그러니까 상처는 일종의 각인인지도 몰라. 속살이 벌어졌던 흔적, 그것이 아무느라 걸렸던 시간, 희미해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어떤 현재가 그들 몸에 동시에 새겨지는 거야. 때문에 두 사람은 “세상의 시간을 벗어나 있다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확신”(p. 49) 속에서 함께 영원에 고착될 수 있어. 《지평》의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로운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p. 170)

 

 

최근 출간된 《지평》에서 모디아노는 그 영원한 현재의 또 다른 가능성, 희망을 향한 한 걸음을 보여주고 있어. 사십 년 가까이 헤어져 있던 연인을 찾아 육십 대의 소설가가 베를린으로 향하는 것이지. 그리고 보스망스가 그녀의 종착지로 짐작되는 디펜바흐 가에 도착한 순간, 딱 거기에서 이야기를 멈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연습하는 그의 모습, 폐허가 되었던 도시의 공원 한구석에 피어난 라일락 꽃 등을 슬쩍 언급하면서

 

그들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Andre Kertesz의 아래 공원 사진처럼 마침내 두 사람이 다시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게 될까? 그러나 왠지 나는 이 이야기 바깥에서 벌어질 그들 삶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아. 이번에는 구체적인 결말을 궁금해하는 대신 프레데릭 파작의 이런 문장을 떠올리지. "너를 발견하고 난 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는 건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어려움은 길을 잃어버리는 데 있었다." 




Washington Square, New York, 1954, by Andre Kertes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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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지 않는다 -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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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자연스레 그의 모든 글을 탐독하게 된다. 그렇게 한때 보르헤스의 전작주의자가 되었고, 카뮈의, 울프의 전작주의자이기를 소망했다.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처음부터 깜냥 밖의 일이었으므로 그저 나는 읽었다. 읽은 책들을 아껴 보관했다. 쓰는 것보다 더 많이 읽는 자가 되어 또 다른 작가들의 전작주의자이기를 꿈꾸었다. 방대한 소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볼라뇨. 마흔 넘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제발트. 일흔두 개의 가명으로 소설과 시를 발표했던 페소아. 내게는 영원히 《뉴욕 3부작》의 작가로 남을 폴 오스터.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전작주의의 여정에 어느 날 마루야마 겐지가 착륙했다. 파트릭 모디아노와 함께였으나 이상하게도 두 작가를 같은 책장에 꽂은 기억은 없다. 어쩌면 그 거리만큼 독서의 진폭이 아주 조금은 넓어지기도 했을까. 책을 읽는다는 게 사실 그렇지 않던가. 사뭇 다른 목소리를 채택해 각각의 책을 따라가는 경험 말이다. 페소아가 일흔 개 넘는 필명에 부여했던 정체성처럼 각기 다른 글 앞에서 조금씩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겐지를 읽을 때 나는 리카르두 레이스가 된다. 그리고 보네거트를 읽을 땐 알바루 드 캄푸스가, 드릴로나 핀천을 읽을 때는 바롱 드 테이브가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게 나는 겐지 소설의 독자로 남았고, 가끔 겐지의 에세이도 챙겨 읽는다. 지난봄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접했고, 이즈음《나는 길들지 않는다》를 읽었다. 이 에세이집은 지난 2010년 《당신의 젊음을 죽이는 적(あなたの若さを殺す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인데, 제목에서 짐작할 테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뼈도 못 추리게 단호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이미 에세이를 몇 편 읽은 독자라면 새삼스러울 것 없는 독설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겐지는 몇 가지 전제를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야생동물이다. 가족과 제도, 국가라는 시스템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실상 이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지배받는 정글이며, 그 정글의 주민답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이다. 이는 그가 이 에세이집의 첫 도입부에서 거론하는 참새 이야기에 집약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 참새는 성깔이 고약한 때까치와 무법자인 까마귀의 훼방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피하면서, 또 참매와 산무애뱀과 들고양이의 기습 공격을 가볍게 받아넘기면서 유유자적 오늘도 자신의 생명을 즐기고 있다.

(중략)

늘 혼자이면서 실로 즐거워 보인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금빛 햇살 속에서 기운차게 짹짹거리며 마당 온 데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러고는 많지도 않은 소박한 모이를 사뭇 맛있다는 듯이 콕콕 쪼아 댄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적이 될 상대의 접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pp. 12-13

 

참새는 인간 수명에 비하자면 한없이 짧게 살다 간다. 그러나 찬란하게 생명을 누린다. 겐지는 거기에서 ‘자립한 젊음’을 보았고, 그로 인해 한 생명이 그토록 생기발랄하고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젊음을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가족과 직장, 국가를 비롯한 지배자들, 숱한 측면에서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모종의 목적을 지니고, 아무 계산 없이 서 있는 당신을 휘두르려는 사람들 말이다. 겐지가 강조하는 자립한 젊음이란 이들로부터 자립하려는 의지를 가리킨다. 자신의 저력을 탐색하고 이를 힘껏 발휘하는 태도에 가깝다.

 

겐지에게 이는 하나의 제안이라기보다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의 특질이자 특권이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치닫도록 설계된 생명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는 절박하게 단호해진다. ‘적’에 대해 말하는 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 당신의 젊음만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지켜내려면, 누군가에 의해 삶이 묶이지 않으려면.

 

 

나는 언제나 편한 변혁만을 추구하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팔아먹는 자로 추락하기 위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여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자문을 도저히 지우지 못하는 당신을 상대로 묻고 있는 것이다. 

p. 88

겐지의 단호한 태도는 아슬아슬하게 진실을 가리킨다. 육성이 깊이 개입된 메시지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약함을 윽박지르고 값진 생명, 삶의 가치를 말하는 이 목소리를 고깝게만 들을 일은 아니다. 그는 요즘 젊은 것들 운운하는 기성세대와도 궤를 달리 하며, 타인을 경멸할 때도 존경할 때만큼이나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약한 마음에서 태어난 환영에 호락호락 순응하지 않을 뿐.


 

문단을 등지고, 온건한 위로를 바라는 독자를 등지고, 겐지는 한결같이 할 말을 한다. 그 자신이 표현한 바를 따르자면, “일일이 사는 의의를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약자 중의 약자”(p. 231)이기 때문일 텐데, 이제 나이 일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도 여전히 투쟁심을 잃지 않는 이 반골의 정신이 신기하고 부럽다. 《새조롱을 드높이》였던가. 여전히 꼿꼿한 겐지의 목소리에서 M읍을 찾아가던 한 남자의 뒷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공교롭다.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새 이야기가 나왔다. 사내가 덧문을 열자 한 마리 피리새가 앉아 있었다. 그 녀석은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고, 휘파람 같은 소리로 울었다. 기억한다. 그 새는 M읍으로 저 혼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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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이상하네요. 파트릭 모디아노와 노벨문학상이라. 스산하고 쓸쓸한 그의 소설 세계와 노벨문학상이라는 광휘가 왠지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듯해서 말이지요. 


제가 지니고 있는 그의 책들은 대부분 1990년대 후반에 출판된 것들입니다. 제대로 된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였고, 속표지에 이름과 연락처, 책을 산 날짜와 함께 짤막한 글을 적거나 함부로 책에 밑줄을 긋던 시절이었습니다. 


지난 20세기만 해도(;;;) 모디아노의 책은 주로 책세상이나 세계사를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그렇게 오래된 책이다 보니 책장 정리를 할 때마다 어쩔까 종종 망설였고, 아파트 분리수거함까지 가져갔다가 허겁지겁 되찾아오기도 했지요. 스산한 뒷골목, 낯선 과거, 부유하듯 떠도는 인물들, 종적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비슷비슷한 인물들이지만 그 쓸쓸함은 조금씩 달라서 한동안 그의 소설에 중독되듯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팔월의 일요일들》입니다. 인지 붙어 있던 시절이 그립네요.)


(출처 : http://www.babelio.com)


소설 쓰는 분들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야기를 많이들 하시지요. 개인적으로는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 매우 유사한 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디아노는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특별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문체를 구사합니다. 군데군데 지워지고 흐릿해진 여백이 여러 인물들의 삶에 안개처럼 겹치거나 스며들면서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인상을 자아내지요. 그건 아마도 나와 당신, 그 혹은 그녀의 삶이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매우 복잡하면서도 애처러운 그 무엇임을 건드리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사 나를 아프게 하거나 속이고 달아났던 사기꾼의 인생이라 할지라도요.  그래서 종국에는 흩어져 버릴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그 유령 같은 인물들 근처를 서성이게 되는 것이겠지요.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좋은 소설에 돌아가는 보상은 그 소설을 사랑하던 독자도 들뜨게 하는가 봅니다. 노벨문학상 소식으로 절판되었던 그의 다른 소설들도 다시 새 옷을 입고 만나게 되겠지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아래 책들도 곧 다시 출판되기를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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