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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평점 :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으며 역사가로서의 유발 하라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 절대적 객관성은 없다
카는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영원하기도 한 객관성’이란 없고 그것은 ‘일종의 비현실적 추상’이라고 말하며, “역사에서 필요한 것은 역사가가 받아들인 어떤 객관성의 원칙이나 규준에 따라서 과거에 관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일인데, 그 일에는 반드시 해석의 여러 요소가 포함된다”라고 했다. 이 말에서 우린 이걸 유추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이념과 가치문제에서 손대기 까다로운 영역인 ‘민족, 종교, 돈, 정체성, 자유, 인권’ 등등이 우리가 만든 ‘허구 이야기’라고 말하며 전작 『사피엔스』에서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하였다.
● 역사가의 역할
“말이 끄는 마차 시대나 초기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 없듯이, 로크의 이론이나 자유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소규모의 개인주의적 민주정으로, 19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된 그 민주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고발에 대한 진짜 답변은 앞에서 말한 폐해들이 그 나름대로의 교정책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방법은 비합리주의를 숭배하거나 근대 사회에서의 이성의 확대된 역할을 부인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점점 더 철두철미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역사란 무엇인가』)
개별 분야 연구자들로부터 비판과 논쟁의 화살을 맞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발 하라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들며 일반 독자와 소통에 힘쓰고 있다. 역사가로서 그는 정말이지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E. H 카가 ‘1880년대의 역사가보다는 1920년대의 역사가가, 1920년대의 역사가보다는 오늘날의 역사가가 객관적인 판단에 더 근접해 있다’고 말하고 있듯이 사망한 카가 하지 못한 역사가의 역할을 유발 하라리가 지금 잘 해주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 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고,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 등의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과 현상 속에서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역사가로서 이 시대 인간으로서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 인간이여! 그에게서 모자란 점은 다른 누군가가 또 해주겠지!
● 해석의 순환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진보를 ‘역사 서술의 근거가 될 과학적인 가설’이라고 본 액턴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역사 외적이고 초이성적인 힘에 과거의 의미를 예속시킴으로써 역사를 신학으로 바꿀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역사를 문학─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과거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와 설화들의 묶음─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역사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미래의 진보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의 진보에 대한 관심도 이내 포기할 것이다. 내가 첫 번째 강연의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사회관을 반영한다. 지금 나는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역사의 미래에 대한 나의 믿음을 밝힘으로써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인류 3부작 완결 편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 대해 앞선 저서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재탕이라는 평을 자주 듣는데, 역사가는 메시아가 아닐뿐더러 역사가 그렇듯이 우리의 사고도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는 걸 카의 저 말이 대변해준다. 우리는ㅡ인간이 만든 직선적 인과틀일 뿐인ㅡ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톺아보며 살아가는 존재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서 있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쳤지만 지금 이 현실의 모습이 말해 주듯이 '절대적 가치'도 ‘합리적 개인’도 우리의 환상 기대치일 뿐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라고 말한다. 같이 생각하자.
● 21세기의 우리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세 가지 주요 과제가 "핵 전쟁, 기후변화,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라고 보았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이다"라고 하며 추상과 경험의 대비를 보여줬지만 그것들이 우리 인간을 이뤘듯이 나로선 그게 크게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기에 그럼에도 살아야 될 의미를 찾는다. 둘 다 어렵고, 의미(허구 이야기 - 민족, 종교, 돈, 정체성, 자유 등등)를 찾는 것과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평생 시행한다. 혼동과 혼돈 속에서 오간다고 할 수 있겠다. 유발 하라리는 다음 말로 이어간다. "모든 허구적 이야기를 포기하면 이전보다 훨씬 명료하게 실체를 관찰할 수 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안다면 아무것도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로서는 나라는 육체와 정체성이라는 인지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겐 참 어려운 일이다. AI가 전방위적으로 유입되면 더욱 혼란해지겠지. 그래서 하라리는 그전에 시급히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유발 하라리는 <한국인을 위한 7문 7답>에서 '고통'(감각적 경험)과 '괴로움'(정신적 반작용, 쾌락에 가까운 실체의 거부)은 다르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책 참조)
불교에서 세상을 "고(苦)"로 보듯이 유발 하라리는 이 책 내내 실체와 허구를 구분해 파악하는 방법으로 "고통" 살피기를 강조한다. 흡사 부처가 생로병사를 목도하고 대오각성해 출가한 것이 연상되었다. 실재/현실의 비참에서 현실적 초월의 길을 만들자는 것. 이 또한 종교적이고 사상적이지. 그러나 이 유발 하라리 교(?)는 "희생, 영원, 순수, 구원"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보다 "Do It Yourself", "호쿠스 포쿠스(Hocus Pocus) X는 Y!(X를 Y로 변하게 할 때 외는 주문)”
말미에 "명상" 수련 얘기가 나와서 역시 불교적 세계관이 있었어 했다. AI 맞대응 중 하나로 이걸 거론할 줄이야; 나도 한땐 정말 이 방법으로 해탈을 하고 싶었죠ㅜㅜ
푸코와 트럼프도 명상을 좀 했더라면...
뭐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방안이고 큰 틀에서의 해법은 부족적 사고방식 tribal mindset에서 벗어난 "전 지구적 사고"가 모아져야 한다는 것. 미래는 AI 데이터 vs 인간 지성 싸움이랄까. 『호모 데우스』에서도 했던 얘긴데, 문제는 정부나 소수에 의한 디지털 독재,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결합, 불평등의 심화로 슈퍼휴먼 계층 출현 상황이면 "전 지구적 사고"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지금도 이미 고전적으로 말하면 '부르주아 vs 프롤레타리아' 상황이니까.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공감과 유대, 헌신, 사랑, 인권 등도 허구 이야기다. 그걸 실행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답 없다. 점점 심화되는 국가주의, 테러, 종교 분쟁, EU 연합의 흔들림, 브렉시트, 난민 문제 등의 현재 시점의 큰 흐름이 아니더라도 무수한 사회 문제에서 우리는 그걸 보고 있지 않은가.
● 한 가지 의문 – 왜 그는 ‘젠더’를 다루지 않았는가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환멸, 일, 자유, 평등, 공동체, 문명, 민족주의, 종교, 이민, 테러리즘, 전쟁, 겸손, 신, 세속주의, 무지, 정의, 탈진실, 공상과학 소설, 교육, 의미, 명상’이라는 21가지 제언을 다루었다.
정부가 젠더 문제를 왜 무시하는지 짧고 굵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자신도 차별받는 성소수자이면서 왜 중요한 젠더 문제를 챕터로 안 다뤘을까. 생명 공학 발전으로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질 거란 전망도 했지만 당면 시점에서 문제 해결 조짐이 안 보이면 내 예상에 그건 책으로 따로 낼 거 같다. 미셸 푸코가 그랬듯. 제발 내주길.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정체성. 우리는 외부 세계를 통해 나라는 관념을 종합하며 다시 외부를 규정하는 순환 구조에 있다. 각자가 정립한 정체성으로 인한 충돌이 지금의 현재를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유발 하라리가 미셸 푸코(& 아감벤)에서 답보 상태인 생명정치의 새로운 열쇠를 가지고 온 거 같다.
이들이 한 쌍으로 묶일 줄 상상도 못했다.
※ 책 편집 오류
◇ 오타 (p345)
진 지구적(x) -> 전 지구적(o) :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진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로 고통받으면서도 전 지구적 공동체는 이루지 못한 상태다”
◇ 문장 중복(p441) : “파시즘은~” 부분 중복된 거 같음
“간단히 말하면, 민족주의는 나의 민족은 고유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파시즘은 내 민족이 가장 우월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파시즘은 내 민족이 그저 특별할 뿐 아니라 가장 우월하며, 나의 유일무이한 정체성도 민족 정체성뿐이고, 나는 내 민족에 고유한 의무를 넘어 배타적인 의무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