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의 진리

 

사성제(四聖諦)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서 고·집·멸·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라고도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고통의 세계와 고통을 여읜 열반의 세계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먼저 고성제를 보자.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이다. 왜 고통이 성스러운 진리일까? 그것은 고통을 바로 보고 느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게는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네 가지 고통이라고 해서 사고(四苦)라고 한다. 이 네 가지 고통에 더하여 여덟 가지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팔고(八苦)라고 한다. 그것은 사고(四苦)와 더불어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를 말한다. 원증회고는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이요, 애별리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구불득고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요, 오취온고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생존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의미다.

-『불교개론』, 113-114쪽.  

 

 

 

사는 것은 다 고통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고 싶고, 보고 싶은데도 보지 못하니 괴롭다.

죽을 만큼 보고 싶은데도 볼 수 없는 괴로움. 그건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거다.

이미 떠난 사람을 그들의 품으로 되돌려놓기 전까지는.

 

어쭙잖게 돌아간 이들을 추모한다며 경거망동 말자.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아무리 요란한 굿판을 벌인들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이나 똑바로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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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속물이라서 남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일이 있다.

무릇 사람이라면 남의 이목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름을 날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인정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마침 『논어』 안연편에서 통달[達]과 소문[聞](명성, 이름)을 비교하는 대목을 읽었기에 옮겨 본다.

 

자장이 여쭈었다.

"선비는 어떻게 해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냐? 네가 말하는 통달이라는 것이?"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 안에서 반드시 소문이 나고, 가문 안에서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김, 227)

 

공자가 통달에 대해 묻자 자장은 '소문'이 나는 걸 '통달'한 것이라 대답한다. 아마도 공자는 자장이 헛된 명성을 좇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통달이 무어냐고 반문을 했던 것 같다. 자장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의 눈과 귀에만 온 신경을 다 쓰는 사람,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며 심지어는 거기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남에게 인정 받고 그들의 이목에 띄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남과 비교하여야만 자신과 자기 자식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 95점을 받아도 100점을 받은 누군가 때문에 불행하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 오직 보여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일들과 허망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 남들의 평가가 자기 행동의 기준이 되고 좋은 평판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 실력이 아니라 이름과 간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어서 공자가 말했다.

 

 

"이것은 소문이지 통달이 아니다. 통달이라는 것은 본바탕이 바르고 의로움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관찰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에서도 통달하고 가문에서도 통달할 수 있다) 소문이 있다는 것은 겉으로는 仁을 취하면서도 행동은 [仁에] 어긋나는 것인데도, 스스로는 仁하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나라 안에서 반드시 소문이 있고 집에서도 반드시 소문이 있는 것이다(是聞也, 非達也. 夫聞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김, 227-228)

 

한편 신창호 『한글논어』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었다.

 

"그것은 명성을 드날린 것이지 통달이 아니다. 통달이라는 것은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남의 말을 깊이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여, 신중한 태도로 항상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그래야 나라에서도 통달하고 가문에서도 통달할 수 있다. 명성을 드날린다는 것은 겉으로는 열린 마음을 지닌 것처럼 하되 실제 행실은 그것에 어긋나는 짓을 하며, 그렇게 처신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가문에서도 명성을 드날린다." (신, 307)

 

자장류의 인간은 소문만 있기 때문에 그 소문을 유지하기 위하여 남을 속인다. 거짓을 일삼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통달이 아니라 위선이고 허세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어 왔다.

 

겉으로는 열린 마음을 지닌 것처럼 하되 - 어르신들 지원을 더 하자,

실제 행실은 그것에 어긋나는 짓을 하며 - 접대골프를 하고, 의료원은 폐쇄하며, 애들 급식비는 지원 못한다,

그렇게 처신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 표밭은 변하지 않으니까 자기는 옳다고 여기는,

드높으신 명성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

자기 전에 논어 한두 구절씩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구구절절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책 서문을 보니 김원중 선생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늘 고전을 읽고 번역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조금식,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뒷골목 서당개 노릇이라도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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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09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정합니다!
(그래서 Agalma씨는 본의와는 다르게 유죄선고를 받고...)

돌궐 2015-04-09 13:44   좋아요 0 | URL
저도 유죄입니다. 같이 소주 한 잔 하시죠.ㅋㅋㅋ

만병통치약 2015-04-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의있습니다. 전 속으로는 인정받고 싶지만 겉으로는 통달한 척 하고 있습니다. 정상참작바랍니다.ㅋㅋ

돌궐 2015-04-09 14:53   좋아요 0 | URL
집행유예 1년입니다. 같이 합석하시죠.ㅋㅋ
 

북플에 접속해서 글들을 보다가 거기 올려진 책을 클릭하여 알라딘 모바일 책정보까지 연결하면 저절로 글 작성자에게 thanks to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글을 써주시는 분들을 위해 꼭 알라딘 모바일 책정보까지 일부러 클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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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가입한 지 석달이 넘었는데, 이쯤에서 이런 거 한 번 정리하고 싶었다.

나중에 조금 바뀔지도 모르지만, 큰 틀은 아마 달라지지 않을 듯싶다.

 

 

별 다섯 - 읽다가 펑펑 울었거나, 희열을 느꼈거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거나, 자꾸만 다시 읽게 되거나, 아니면 앞으로 자주 읽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오늘의 내 사상의 폭과 깊이를 만들어 주어서 남에게도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

 

별 넷 - 꽤 재밌거나, 슬프거나, 웃기거나, '아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겠네'나 '성실하게 썼네' '참고할 점이 많은데' 같은 말이 저절로 나오거나, 옮겨적은 초록이 많거나, 어떤 이들에겐 꼭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

 

별 셋 -  읽어도 시간낭비까지는 아니나 읽지 않아도 크게 지장없는, 일부 참고할 대목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특정인들에겐 요긴할 것 같은, 약간의 초록을 옮겨 적은, 나쁘지는 않은 책

 

별 둘 -  자료의 해석이나 배열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거나,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의식에 빠져 있거나, 성실함이 부족하거나, 문장(번역)이 좋지 않거나, 읽으면 편견과 그릇된 사고에 빠질 위험이 있는 책

 

별 하나 - 읽는 게 시간낭비, 극도의 자의식이나 허세현학으로 점철되거나, 독자에게(적어도 나에게) 폐해를 주거나, 타락과 편견에 빠지게 만드는, 거의 공해에 가까우며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비극인 책

 

#

다른 리뷰어들의 별점 기준은 어떤지 궁금할 때가 있는데, 네 개 이상이 많은 책은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되더라.  

다만 독자 시각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도 있어서(예: 별 다섯 위에 별 하나) 그럴 때는 내가 직접 읽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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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4-0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시다시피 주로 역사,인문학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책을 고를 때 처음부터 별 다섯개 될것 같은 책만 골라 읽어요.그래도 그중 실망스러운 책도 있지만 말이죠. 그래서 타인이 보면 별점이 높게만 표시된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별점이란게 애매해요. MB의 대통령의 시간같은 경우 별점 구경해 보면 되게 웃겨요 ㅋㅋ

돌궐 2015-04-06 14: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골라 읽다보면 거의 별다섯 아니면 네개죠.ㅎㅎ
그리고 별 하나짜리는 읽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읽더라도 리뷰를 쓰고 싶은 의지가...

AgalmA 2015-04-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나서 별점에 대해 고민이 엄청 많아요. 제 리뷰를 보고 책을, 그것도 thanks to로! 살 수도 있다는 부담감이 점점 압박되더군요.
별점 주고 주기적으로 차후에 다시 주기도 합니다; 다른 책을 읽고 앞서 읽은 책의 허점 같은 게 발견되면..이렇게 연결이 빨리 되면 다행이고ㅎ
아무래도 두번 읽고 별점 주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에너지 소모가;;

돌궐 2015-04-06 19:07   좋아요 0 | URL
나중에 별점 다시 주고 싶은 경우가 있긴 있더라구요. 읽었을 때는 정말 재밌게 봐서 별다섯을 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너무 많이 줬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ㅎㅎ

무진無盡 2015-04-0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만나기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돌궐 2015-04-06 19: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별 다섯 책 주고픈 책을 읽으면 반갑더라구요.

양철나무꾼 2015-04-0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별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 그 기저에는 서평단이나 신간평가단으로 책을 받아 읽는 사람들의 경우, 또는 저자나 역자가 지인인 경우, 내지는 출판 관계자인 경우 별점에 인색할 수 없겠다 싶더라구요.
전 그래서 책은 제돈 주고 사보자 하는 케이스이지만, 그래도 가끔 베어넘겨진 나무가 아깝다 싶은 책들이 있을 경우 별점을 못매기고 페이퍼를 쓰지요.
애니웨이, 저랑 비슷한 취향의 서재를 만나면 마냥 기분 좋아 들락거리게 되더라는~^_____^

돌궐 2015-04-06 21:51   좋아요 0 | URL
서평단과 신간평가단은 새로운 책 소개해주는 분들이란 생각으로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리뷰 쓰기가 뭐하면 저도 페이퍼로 대신합니다.ㅎ 그리고 취향에 맞는 서재 있으면 옛날 글까지 찾아 읽게 되더라구요.^^
 

연민이란 누군가가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그들이 받는 고통과 불행이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연민은 공포로 바뀌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라며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하게 되면, 연민은 쉽사리 ‘그럴싸한 만족감’이 될 수 있어요.
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등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 ‘저런 미개하고 뒤떨어진 나라에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고통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려 버리는 순간 그런 사진들은,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상대적으로 행복하다는 걸 확인해 주는 것으로 그쳐 버리죠.

- 김남시, 『본다는 것』, 너머학교, 2013, 109.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로고 뻔뻔한 감정이다.'(니체) 상식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연민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쪽)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활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정심 많고 선량한 얼굴을 한 정치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어이없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참사가 교통사고에 비견될 수 있다면, 모두들 자신이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죽인 운전자라도 되는 듯 자책하는데 유독 정치인들만이 길 가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행인처럼 굴고 있는 듯하다. 목격한 것도 신의 뜻이니 모처럼 좋은 일 좀 해보자는 것일까? 그러니 사고 이후 정치인들이 내놓는 주된 수습안들이 모두 연민과 시혜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엾은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적절한 보상금을 책정하고 생존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착한 정치인으로 남고 싶은 거다.

 

배를 운항한 사람들과 구조를 맡았던 사람들과 상황을 보도했던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해야 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뽑아놓고 감시하고 항의해야 했던 우리와...... 모든 이들의 잘못이 들통나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 붉히며 참사를 가져온 겹겹의 잘못에 대해 오래오래 따져 물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독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해야 할 순간에 그저 울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라도 베풀듯이 눈물을 보였다는 시혜의 관점이 아니라면, '용서해주세요'도 아니고 '잘못했습니다'도 아닌 '도와주세요'라는 그토록 당당한 선거 구호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런 이들이 이제 노란 리본을 보면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 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백 일 넘는 시간 동안 참담한 상황을 보며, 서글프게도 니체의 저 구절들이 이해되었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73-75.

 

 

 

 

 

 

 

 

 

 

 

 

 

 

 

 

그들은 늘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진짜 돈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가? 보상금 챙겼으면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돈을 주면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겠지. 윗대가리들이 이렇게 베풀어줬으니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것이고.

이러니 우리가 쪽팔리는 줄을 알아야 하는 거다.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야 할 애들 급식비도 선심쓰듯 골라서 '시혜'하(여야)겠다는 그들은 사실 우리 옆에도 많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과감하게 발표하고 실천에 옮기는 자들도 있더라.

내가 낸 세금으로 재벌집 애들 먹이기 싫고, 내 자식 급식은 내 돈 내고 먹이겠다는 논리, 전체주의적 획일 급식은 싫고 낸 만큼 멕이겠다는 뜻은 뭐, 존중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의지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꼭 이상한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내 자식 하나 잘 되면 장땡이라는 그들의 천박한 열정은 교사들에게 찔러주는 뒷돈과 뇌물, 온갖 향응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은 자연스럽게 뒷돈과 부정이 만사를 해결해 준다고 여기겠지. 

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고, 부정으로 범벅된 '네월호'는 그렇게 또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겠지.

악담은 그만 하자. 말이 씨가 될라.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지 말자는 사람들이 많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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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4-0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점심값이니 이게 왜 무상입니까. 무상하니까 자꾸 공짜`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데 엄연히 국민 세금 걷어서 내는 것이니 것이니 말입니다. 글고..
보상은 보상이고 처벌은 처벌이지, 무슨 보상했으니 다 됐다 ?! 이건 그냥 노예 근성이죠.
옛날에 빠따 열 대 때리고 돈 백 주고 끝내자던 어느 기업 사장 생각나네요..
그 사람도 보상은 했으니 빠따 열 대 때린 것에 대해 아무 비판 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여튼...

돌궐 2015-04-05 13:03   좋아요 0 | URL
책에도 나오지만 세월호 `사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쌓인 `사건`입니다.
처벌받고 물러나야 할 애들은 버젓이 활개를 치고, 그들에 놀아나는 언론은 보상금 액수부터 공개하고 나서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니기미된장그지같은 욕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