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속물이라서 남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일이 있다.
무릇 사람이라면 남의 이목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름을 날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인정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마침 『논어』 안연편에서 통달[達]과 소문[聞](명성, 이름)을 비교하는 대목을 읽었기에 옮겨 본다.
자장이 여쭈었다.
"선비는 어떻게 해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냐? 네가 말하는 통달이라는 것이?"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 안에서 반드시 소문이 나고, 가문 안에서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김, 227)
공자가 통달에 대해 묻자 자장은 '소문'이 나는 걸 '통달'한 것이라 대답한다. 아마도 공자는 자장이 헛된 명성을 좇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통달이 무어냐고 반문을 했던 것 같다. 자장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의 눈과 귀에만 온 신경을 다 쓰는 사람,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며 심지어는 거기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남에게 인정 받고 그들의 이목에 띄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남과 비교하여야만 자신과 자기 자식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 95점을 받아도 100점을 받은 누군가 때문에 불행하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 오직 보여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일들과 허망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 남들의 평가가 자기 행동의 기준이 되고 좋은 평판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 실력이 아니라 이름과 간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어서 공자가 말했다.
"이것은 소문이지 통달이 아니다. 통달이라는 것은 본바탕이 바르고 의로움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관찰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에서도 통달하고 가문에서도 통달할 수 있다) 소문이 있다는 것은 겉으로는 仁을 취하면서도 행동은 [仁에] 어긋나는 것인데도, 스스로는 仁하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나라 안에서 반드시 소문이 있고 집에서도 반드시 소문이 있는 것이다(是聞也, 非達也. 夫聞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김, 227-228)
한편 신창호 『한글논어』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었다.
"그것은 명성을 드날린 것이지 통달이 아니다. 통달이라는 것은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남의 말을 깊이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여, 신중한 태도로 항상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그래야 나라에서도 통달하고 가문에서도 통달할 수 있다. 명성을 드날린다는 것은 겉으로는 열린 마음을 지닌 것처럼 하되 실제 행실은 그것에 어긋나는 짓을 하며, 그렇게 처신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가문에서도 명성을 드날린다." (신, 307)
자장류의 인간은 소문만 있기 때문에 그 소문을 유지하기 위하여 남을 속인다. 거짓을 일삼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통달이 아니라 위선이고 허세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어 왔다.
겉으로는 열린 마음을 지닌 것처럼 하되 - 어르신들 지원을 더 하자,
실제 행실은 그것에 어긋나는 짓을 하며 - 접대골프를 하고, 의료원은 폐쇄하며, 애들 급식비는 지원 못한다,
그렇게 처신하면서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 표밭은 변하지 않으니까 자기는 옳다고 여기는,
드높으신 명성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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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논어 한두 구절씩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구구절절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책 서문을 보니 김원중 선생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늘 고전을 읽고 번역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조금식,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뒷골목 서당개 노릇이라도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