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란 누군가가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그들이 받는 고통과 불행이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연민은 공포로 바뀌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라며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하게 되면, 연민은 쉽사리 ‘그럴싸한 만족감’이 될 수 있어요.
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등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 ‘저런 미개하고 뒤떨어진 나라에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고통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려 버리는 순간 그런 사진들은,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상대적으로 행복하다는 걸 확인해 주는 것으로 그쳐 버리죠.

- 김남시, 『본다는 것』, 너머학교, 2013, 109.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로고 뻔뻔한 감정이다.'(니체) 상식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연민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쪽)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활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정심 많고 선량한 얼굴을 한 정치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어이없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참사가 교통사고에 비견될 수 있다면, 모두들 자신이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죽인 운전자라도 되는 듯 자책하는데 유독 정치인들만이 길 가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행인처럼 굴고 있는 듯하다. 목격한 것도 신의 뜻이니 모처럼 좋은 일 좀 해보자는 것일까? 그러니 사고 이후 정치인들이 내놓는 주된 수습안들이 모두 연민과 시혜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엾은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적절한 보상금을 책정하고 생존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착한 정치인으로 남고 싶은 거다.

 

배를 운항한 사람들과 구조를 맡았던 사람들과 상황을 보도했던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해야 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뽑아놓고 감시하고 항의해야 했던 우리와...... 모든 이들의 잘못이 들통나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 붉히며 참사를 가져온 겹겹의 잘못에 대해 오래오래 따져 물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독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해야 할 순간에 그저 울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라도 베풀듯이 눈물을 보였다는 시혜의 관점이 아니라면, '용서해주세요'도 아니고 '잘못했습니다'도 아닌 '도와주세요'라는 그토록 당당한 선거 구호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런 이들이 이제 노란 리본을 보면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 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백 일 넘는 시간 동안 참담한 상황을 보며, 서글프게도 니체의 저 구절들이 이해되었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73-75.

 

 

 

 

 

 

 

 

 

 

 

 

 

 

 

 

그들은 늘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진짜 돈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가? 보상금 챙겼으면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돈을 주면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겠지. 윗대가리들이 이렇게 베풀어줬으니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것이고.

이러니 우리가 쪽팔리는 줄을 알아야 하는 거다.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야 할 애들 급식비도 선심쓰듯 골라서 '시혜'하(여야)겠다는 그들은 사실 우리 옆에도 많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과감하게 발표하고 실천에 옮기는 자들도 있더라.

내가 낸 세금으로 재벌집 애들 먹이기 싫고, 내 자식 급식은 내 돈 내고 먹이겠다는 논리, 전체주의적 획일 급식은 싫고 낸 만큼 멕이겠다는 뜻은 뭐, 존중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의지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꼭 이상한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내 자식 하나 잘 되면 장땡이라는 그들의 천박한 열정은 교사들에게 찔러주는 뒷돈과 뇌물, 온갖 향응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은 자연스럽게 뒷돈과 부정이 만사를 해결해 준다고 여기겠지. 

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고, 부정으로 범벅된 '네월호'는 그렇게 또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겠지.

악담은 그만 하자. 말이 씨가 될라.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지 말자는 사람들이 많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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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4-0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점심값이니 이게 왜 무상입니까. 무상하니까 자꾸 공짜`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데 엄연히 국민 세금 걷어서 내는 것이니 것이니 말입니다. 글고..
보상은 보상이고 처벌은 처벌이지, 무슨 보상했으니 다 됐다 ?! 이건 그냥 노예 근성이죠.
옛날에 빠따 열 대 때리고 돈 백 주고 끝내자던 어느 기업 사장 생각나네요..
그 사람도 보상은 했으니 빠따 열 대 때린 것에 대해 아무 비판 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여튼...

돌궐 2015-04-05 13:03   좋아요 0 | URL
책에도 나오지만 세월호 `사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쌓인 `사건`입니다.
처벌받고 물러나야 할 애들은 버젓이 활개를 치고, 그들에 놀아나는 언론은 보상금 액수부터 공개하고 나서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니기미된장그지같은 욕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