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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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를 읽은 것은 십 수년 전이다. 시각과 언어에서 나온 두 권짜리 박정자 번역의 푸코 평전. 푸코의 저작 중 제대로 읽은 것은 한 두 권에 불과했던 당시에, 나는 이 치밀하게 쓰여진 평전을 통해 겨우 푸코의 철학과 삶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 박정자의 유려한 프랑스어 번역도 이 책을 쉽고 재밌게 읽히게 하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영희 선생은 죽은 소설가 이병주가 6,70년대에 푸코를 읽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푸코의 저작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불문학자이자 번역가인 박정자가 1979년 번역한 <성은 억압되었는가>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80년대에 <성과 권력>이란 제목으로 인간사에서 재출간되었을 것이다.) 지방 소도시의 군청에서 촌스럽기 그지 없는 제복을 입고 공문서를 만들고 잔심부름을 하던 무렵이었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공무원들 틈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밑줄을 그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각과 언어에서 나온 두 권짜리 푸코 평전은 내게 2권만 남아 있다. 첫째 권은 지인으로부터 빌린 것이었는데, 그가 읽기도 전에 내가 먼저 읽고 너무 재밌어 2권은 내 돈으로 샀던 것. 나는 그 책을 2년이나 지나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었다. 내 책장에 뒤섞인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할 즈음, 소포로 책의 주인에게 돌려줬던 기억이 난다. 교보에서 그린비에서 나온 같은 번역자의 <미셸 푸코, 1926~1984>를 발견했을 때, 나는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고 달라진 장정과 단권으로 묶인 책의 두께에 낯설기도 하면서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디디에 에리봉이 2010년에 개정하여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니 초판 번역본과는 내용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판본 또한 프랑스어를 잘 알지 못하는 내게도 유려한 번역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어달 여 동안 다른 책을 읽는 짬짬이 예전의 재미와 흥분을 추억하면서 다시 읽었다.

 

1926년과 1984년이라는 푸코의 생몰연도가 상징하는 연대기는 아마도 프랑스 지성사의 ‘황금시대’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푸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 가령 그의 스승들인 장 이폴리트, 뒤메질, 깡길렘, 동료들인 폴 벤느, 부르디외, 들뢰즈, 알뛰세, 그리고 장례식이 “마지막 68 시위”와 같았던 사르트르, 거기에 소위 앙가주망 연예인이었던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등장하고 부상했던 시기는, 크리스테바의 소설 제목 그대로, ‘사무라이’들의 전성시대였을 것이다. 물론, 그 사무라이들이 손에 든 것은 칼이 아니라 펜이고 책이었다. 다소 비약을 하자면, 우리로 치면 ‘종로학원’(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장 이폴리트가 헤겔 강의를 하고, 교사임용고시 준비반(아그레가시옹)에서 메를로 퐁티가 강의를 하고, 알뛰세가 지도를 하는 시절이다. 탄탄한 지식과 엄밀한 철학으로 무장한 이 지적 사무라이들이 보여주는 현란함과 관계의 사슬은 반주변부의 독자에게는 부럽고도 부러운 것이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광기의 역사>에서 에이즈로 죽기 직전까지 원고를 매만지던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지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결과한 파장과 논란을 솜씨좋게 정리해내고 있다.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내가 부러웠던 것은 푸코와 그의 동시대 거장들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철학을 매끄럽게 정리하면서 멋진 책을 써냈던 디디에 에리봉의 솜씨였을 것이다. 사건과 비리를 캐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지식세계의 산출물을 정리하고 요약하며 그것은 대중의 언어로 번역할 줄 아는 지식인 저널리스트 말이다. (국내에 이런 지식인 저널리스트는 아마 고종석 정도가 아닐까?) 이것은 아마도 그가 기사를 쓰던 <누벨 옵세르바퇴르>와 같은 저널이 소비되는 사회, 바캉스 시즌에 <말과 사물>이 빵처럼 팔리는 동네여서 가능했을 수도 있다.

 

푸코의 삶에서 일관된 것이 있다면, 말의 바른 의미에서 그가 “공부하고 글쓰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초기 저작인 <광기의 역사>에서부터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까지, 그는 고문서 더미들을 뒤지고 끊임없이 글을 썼다. 초기의 그는 지적으로는 당대의 제도권 학문과 패러다임에 도전하여 균열을 내는 지적 혁명가였지만, 일상의 그는 문화관료이기도 했으며 대학제도에 편입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의 철학이 억압과 배제, 지식-권력의 기원에 대한 탐사로 이어지면서 그는, 실천적으로 좌익행동주의자, 아니 일체의 억압과 제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변모해간다. (가령,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가 들어섰을 때 들뢰즈는 사회당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폴란드 자유노조 탄압에 침묵하는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 대열에 참여하지 않는다. 물론 푸코는 과격하리만큼 사회당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에리봉은 이런 태도를 ‘좌익 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데, 푸코의 비판은 좌충우돌, 모든 억압을 겨냥한다.) 심지어 ‘쾌락의 활용’이라는 ‘자기에의 배려’에서도 그는 갈 수 있는 극한에까지 이르렀다. 짐작컨대 샌프란시스코 클럽에서 SM 섹스까지도 감행하는 과도한 ‘쾌락의 활용’이 그에게 에이즈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밖에서와 달리 연구실에서의 그는 공부하고 자료를 뒤지며 글을 쓰는 인간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푸코를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불과 십 여년 전만 해도 웬만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글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하자면 놀라운 변화다. 들뢰즈를 거쳐 네그리로 가더니 요즘에는 아감벤과 랑시에르까지 이른 모양이다. 나로서는 이 현란한 우리 사회를 지적 풍속을 따라갈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푸코를 처음 읽었을 때 가졌던 생각만큼은 여전하다. 예컨대,  푸코가 비판해마지 않는 ‘감옥’의 한국적 양상인데, 푸코가 한창 수용되던 당시에도 푸코적 시각에서는 용납되지 않던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 시민을 억압하는 규율권력의 실체로서의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정자 교수가 조선일보의 단골필자이자 극우파 매체인 <한국논단>의 정기기고자라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프랑스 지식인의 담론에 대해서는 열광하지만, 정작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는 보편의 논리로 위장한 채 고담준론을 일삼거나, 현존하는 억압에 대해서는 우파의 논리를 옹호하는 부류들 말이다.

 

“8일간의 파업 후 간신히 문을 연 시장을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 경치가 미세한 부분으로 내 주의를 끌었다. 가게 앞 진열대에 괴상한 모습의 재봉틀이 높고 부자연스럽게 10여대씩 줄지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마치 19세기 신문광고에서 볼 수 있었을 것 같은 당초문 장식의 고대 페르시아 세밀화를 거칠게 모사한 덩굴풀과 꽃봉오리가 그려져 있었다. 서구의 구시대적 표지와 오리엔트의 낡은 표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 물건들은 모두 ‘메이드인 사우스 코리아’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란의 최근 사태가 그 나라의 가장 뒤떨어진 그룹이 근대화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자체가 구시대로의 회귀이며, 온 국민과 온 문화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샤의 불행은 이 구시대로의 회귀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푸코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이뤄지기 직전에 이란을 방문한다. 팔레비 왕조의 정치적 억압과 부패한 현실을 보고 그는 이슬람 혁명의 옹호자가 되는데, 이란 구체제의 억압성을 상징적으로 느끼게 된 계기는 ‘메이드 인 사우스코리아’ 재봉틀이었다. 한국산 재봉틀이 구시대의 회귀를 보여주는 표지라니, 푸코의 시각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 재봉틀은 우리에게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여성의 가사노동을 잠시나마 해방시켜준, 동시에 가족에게 입성을 제공해 주었던 요긴한 물건이기도 했거늘. 푸코가 본 것은 구로공단 언저리에서 공순이들이 만들었을 ‘브라더 미싱’이었을까. 지금은 재봉틀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나무틀만 남아 홍대 언저리 카페들의 테이블로 쓰이고 있는 그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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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농성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이다. 검사가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동료 한명이 불에 타 죽고, 화염병 불꽃이 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서 있던 그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화염병을 든 ‘농성자’였을 것이다. 그 너머를 보기란 그에게 아주 지난한 일이었을 터.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적대자’(이 표현은 경찰이 쓴 표현이다.) 앞에서 자신과 타자의 행위의 근거를 찾는 일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개발 행위, 그것도 빠른 속도로 도심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자본의 욕망이 산출하는 ‘파시스트적 속도’, 도시주거의 최하부에 위치한 세입자들의 요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보이지 않는다.



1심 판결의 판사가 “공무집행중이던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경찰관이 다치게 한 행위는 국가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피고인들에게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할 때, 나는 웃고 말았다. 그에겐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양상에 대한 인식만이 있을 뿐, 그 사건의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 양상에 있어서도 경찰관의 죽음이라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만이 보일뿐, 화염병을 들고 망루위에 올라간 사람들의 행위가 갖는 의미는 보여질 않는다. “이건 재판이 아니야”라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판사에게, 진압 특공대에게 본질을 보라고 외쳐본들 이들의 인식의 피상성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말 늦은 밤, 혼자서 광화문 인디영화관에서 <두개의 문>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권력의 비가시성’이라는 푸코의 주제가 줄곧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실제적인 결과를 산출해내는 ‘권력’은 보이질 않고, 권력주변의 이런저런 판단과 우연들이 합쳐지면서 어떤 내부의 컨센서스가 도출되고, 그 컨센서스는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더 잔인하게 현실의 변화를 추동해낸다.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내리게 되는 결론이다. 최초의 근원이 될,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당중앙’은 원작자를 찾기 어려운 문서거나 책임자가 불분명한 ‘의견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영화는 용산참사가 일어나게 된 먼 원인을 이 정부 초기의 강력한 공권력 발동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변죽을 울리고 마는데, 권력의 작동방식이 보이질 않으니 그저 변죽일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MB는 파업과 농성, 시위와 같은 ‘떼법’이 사라지고 법치가 확립되면 GDP가 올라가고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사회의 보수적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이 믿음의 근거없음은 한국경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력한 공권력 행사와 그를 통한 ‘법치’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증적 자료도 근거도 없다. 노동유연성의 강화가 실제로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실제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권력은 오히려 이런 보이지 않는 믿음의 집합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허황한 믿음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체로 자명하다. 언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와 강단의 추상적 이론들에서 연역되었던 논리들, 그 암묵적 믿음을 줄곧 확대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 이 모든 것의 결과들이다. 참으로 견고하여 도무지 깨지지 않는 이 비가시적 권력장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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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7-0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도 개봉못할번 하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개봉했다고 하죠 이런 다큐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근처에는 개봉하는영화관이 없어 dvd나올때까지 기다려여 겠네요 강대국에 음모론이 활개치는 이유가 결국 투명하지 않는 정치정책들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을 숨기므로 인해 권력유지의 도구로 쓰는 북한의 경우 전면적인 정보 통제로 인해 국민을 통제하잖아요
 
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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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펼쳐든 책이 망외의 소득을 가져다 줄 경우가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이 그런 경우다. 이 책을 종로의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는데, 주말 동안 푹 빠져 읽었다. 요즘 국내에 잘 번역되는 좀 가벼운 대중소설이겠거니 하는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은 쿤데라의 소설처럼 스토리가 전개되는 와중에 역사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 도드라지는 에세이가 곳곳에 등장한다. 나찌즘과 2차대전이라는 ‘극단의 역사’와 함께 그 역사를 기이한 생존술로 살아낸 사람들이 등장하고, 역사를 상대화/유희화하는 서구의 지적 풍토에 대한 비판도 묵직하다. 영화화된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가 그러하듯이 전후 독일인으로서 슐링크의 관심은 나찌로 인한 고통과 범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고발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 성찰이 촉촉하게 스민 빼어난 작품이다.

 

이 소설 <귀향>은 말하자면 오딧세이를 변주한 소설이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오딧세이가 간난신고 끝에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에게로 귀환한다. 슐링크의 소설은 오딧세이 이야기를 얼개로 삼아 2차 대전 전후를 살아내야 했던 戰前 세대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재 속에 살아가는 戰後 세대 아들의 이야기다. 호메로스를 빗대어 말하자면, 아들 텔레마코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딘가에서 ‘모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아버지 오딧세이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오딧세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찌의 전범이었고, 현란한 자기변신을 보여주는 카멜레온적 인간이다. 주인공인 텔레마코스(데바우어)는 연애에도 실패하고 결혼에도 이르지 못한 채 부유하다가 뒤늦게야 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귀환한다. 진짜 오딧세이는 여전히 방황중이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귀향에 성공하는 것이다.

 

아버지인 오딧세이는 나찌의 핵심세력이었다가 전쟁 막바지에 도망을 쳐 점령하의 소련군에서 일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일한다. 그는 유쾌한 대중소설을 쓸 줄 아는 아마추어 소설가이기도 하고, 고등사기꾼의 기술과 거짓말로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고, 두 번의 결혼에 이어 포스트모던 법학이론가로 살아가는 인물. 흥미로운 것은 이 나찌주의자가 해체주의적 법이론가로 변신한 대목이다. 슐링크는 그의 이론을 두고 “해체주의적 법이론이라는 명목 아래 현실과 텍스트의 분리, 작가와 독자, 범죄자, 희생자, 동시대인의 역할, 그리고 책임의 문제를 아주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작가의 포스트모던 이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오딧세이인 주인공 존 드 바우어는 네오콘의 사상적 지주인 레오 스트라우스와 포스트모던 문학이론가 폴 드 만을 추종하는 인물이다. 폴 드 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홍기빈의 ‘비그포르스’에 관한 책에서 정보를 얻은 바 있는데, 그 역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였다가 나찌로 전향하고 급기야는 전후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나찌즘을 겪은 전후 독일인으로서 슐링크는 포스트모던 이론의 역사적 상대주의, 진리에의 거부, 보편적 법칙에 대한 회의라는 기본 전제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는 나찌조차도 부정해야할 절대 악이 아니라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성향으로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인 존 드 바우어의 ‘선악 공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악이 있어야만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시각은, 악의 필요성(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내지는 악의 불가피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의 선한 면이란 악이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나찌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합리화인 셈이다. 작가는 그것을 교묘한 ‘지적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이 내게는 미국의 지적 풍토에 대한 유럽 지식인의 풍자적 비판으로 이해된다. <더 리더>에서 순박하고 선한 처녀 한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의식이 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다른 나찌 부역자들은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지만, 그녀는 순박하게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처벌을 받는다. 그녀는 유죄인가, 아닌가. 한 인물의 퍼스널 히스토리를 하나하나 벗겨내면서 우리에게 선과 악, 역사적 책임과 개인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보여주는 것. 이 소설 <귀향>이 던지는 물음의 방식도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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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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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반즈의 새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인지/기억하게 된다는 심리적 진실 말이다. 시간은 째깍거리며 어김없이 흘러가지만, 정작 우리가 체감하는 것은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진행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저런 ‘관계의 그물’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가 받은 기쁨과 상처는 쉽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가 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기억의 진실이다. 뒤늦게라도 내가 준 고통과 상처에 대해 깨닫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려 할지라도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어 있게 마련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은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미안하다 ”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던 ‘윗 분’들에 대한 주무관 장진수씨의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갖는 것, 그것은 모든 윤리의 출발일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토니가 대학시절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으로 시작한다. 짧은 기억이지만 선명한 이미지로 남은 채 뒤섞여 떠오르는 기억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과 수증기, 수챗구멍 속의 정액, 강물과 회중전등, 잿빛 강, 차가운 목욕물. 이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산출해내지 않지만, 이 이미지들이 주인공 토니의 개인사와 더불어 선명한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전개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 풍경이지만, 그것은 얼룩덜룩한 개인사와 더불어 고통과 저주를 내포하는 이미지로 반전한다. 이 소설에서 줄리안 반즈가 보여주려 한 것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문장에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를 개인사로 돌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주목/인지/지각하는 매우 부정확한 것일뿐더러, 때로 기록된 문서조차도 부분적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하게 마련이며, 그 확신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조건일진대, 그럼 어떤 출구가 있겠는가. 결국 성찰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그 성찰의 공간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는 별개로 말이다.


토니는 학창시절 네 명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 중 유달리 명민했던 에이드리언은 뒤늦게 다른 세 명의 친구들과 합류한 친구. 이들의 학교 동료였던 롭슨은 여자 친구와의 연사 끝에 16세의 나이에 자살하고 만다. 롭슨의 자살사건을 두고 이 네 명의 친구들이 토론을 벌일 때 에이드리언은 “자살은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는 까뮈의 말을 인용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대학 1학년 시절 학과 엠티에서 롤링 페이퍼에 까뮈의 이 말을 인용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 덕담이나 주고받는 롤링페이퍼에 웬 실존주의적 냄새가 폴폴 나는 치기란 말인가, 기실 까뮈의 그 말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와 연관된 매우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세계는 살만한 곳인가라는 세계에 대한 인식(살만하지 않다면, 곧 세계를 긍정할 수 없으면 부정해야 한다-철학적 비관주의), 그렇다면 내 실존은 어떠해야 하는가(그러한 세계에 대한 내 선택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가-주체의 실존적 선택)라는 문제가 바로 ‘자살’이라는 문제에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 토니와 그의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옛 여자친구인 베로니카를 둘러싼 관계들이 이 소설의 주요한 얼개를 이룬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결별한 뒤에 에이드리언은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고, 그 허용 여부를 묻는 편지를 토니에게 보낸다. 토니가 보낸 답장의 내용은, 소설의 뒷부분에서야 등장하여 이 소설의 극적 반전의 계기가 된다. 절친했던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한때의 연인이었으나 심드렁하게 헤어진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자살하고 만다. 학창시절 동료인 롭슨의 자살에 대해 까뮈의 말을 인용했을 때부터 ‘자살에의 예감’은 소설적으로 예비되어 있었던 것.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고, 토니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토니가 보낸 편지는 두 사람에 대한 끔찍한 저주였으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예언한 것이었다.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사실 마음한켠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예술작품을 보라고. 그러나 그 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너희 둘이 딱 그에 해당된단 말이지.” 토니의 편지는 베로니카가 남자 잡아먹는 요물이라며 그것을 베로니카의 모친에게 확인해보라는 충고까지 잊지 않는다.


토니가 보낸 편지는, 아마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헤어진 연인과 친구에게 보내는 가장 독하고 신랄한 것 같다. 이 편지만 놓고 보면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일 수가 없다. 그런데, 줄리안 반즈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 편지가 담고 있는 비극에의 ‘예감’을 뒤이어 풀어놓았다. 이미 스포일러 수준을 넘어섰으므로 비난을 무릅쓰고 소개하자면,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의 모친을 찾아가라는 토니의 ‘충고’ 대로 그녀를 찾아갔다가 ‘관계’를 맺게 되고 연인의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뒤 자살하고 만다. 베로니카는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토니의 말을 실현된 구체적 인물, 곧 어머니와 자신의 연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폐증 환자인 ‘동생’을 돌보며 살아간다. 토니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남으로 살아가는 노년에 이르러서였다. 베로니카에게 사죄를 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 거기에 나의 이니셜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그 저열한 편지에서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의논하라고 채근했던 것이 기억났다. 남은 한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 없음을, 만회할 수도 없음을.”


토니가 베로니카와 연애한 기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 후 그의 삶은 그럭저럭 영국의 평균적인 중산층적 삶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혼을 했지만 딸이 하나 있고 이혼한 전처와도 가끔 만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혼자 사는 삶에도 별로 궁기가 없다. 토니가 젊은 시절 방문했던 베로니카 가족의 삶도 마찬가지다. 영국인의 삶을 잘 모르긴 해도 외견상 문제없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기실은 그 안락한 삶이 허위로 쌓아올린 것이며, 누군가의 고통을 대가로 하여 성립한 것이라는 것. 동시에 끔찍한 저주의 유산이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현현하고 있다는 것. 토니는 자신이 실제로 쓴 편지와 썼다고 생각하는 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가 실제로 쓴 편지는 젊은 날의 치기어린 농담 수준의 것이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고, 다른 내용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 폭력적 농담과 치기가 결과할 끔찍한 결과는 그로서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토니는 노년의 베로니카에게 사죄를 하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라고 싸늘하게 말한다. 토니는 그 자신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하려 하나 삶은 그의 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다른 삶들이 서로 얽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옛 연인의 편지가 준 심리적 충격, 그리고 어머니-연인 사이의 부정이라는 더 커다란 충격, 그리고 그 부정이 낳은 동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비극 앞에서, 토니의 이해는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된 다음에 사죄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는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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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이 나라에서는 나보코프나 제인 오스틴을 읽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 나라가 술을 사랑하고, 술과 연애를 찬미하던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나라인지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이라면 그 권력을 해체하고 민주화하면 되지만, 다수 국민의 참여와 동의하에 형성된 문화적 억압을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란과 같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국가에서 특정 종교의 신념과 관습이 강요되는 상황은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에 대해 내가 혐오감을 갖는 이유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슬람 근본주의 지배하의 이란 이야기다. 소설 속의 작가는 사라라는 여자와 다라라는 남자가 연인으로 등장하는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 그는 가상의 작가도 아니고, 바로 작가 자신인 샤리아르 만다니푸르다. 하지만, 그의 연애소설은 문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의 ‘페트로비치’(이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 등장하는 형사의 이름이다. 페트로비치는 소설 속에 검열 담당 공무원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차라리 작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검열을 하도록 하는 자기검열 기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에 의해 문장 하나하나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검열을 받아야 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그래서 작가의 ‘사랑이야기’와 작가가 당대의 이란 사회 검열구조 속에서 소설을 실제로 써가는 이야기, 두 축으로 진행된다. 소설과 소설의 발생사적 맥락을 그대로 드러내기. 이야기의 창조자로서 작가가 날 것으로 드러나는 소설,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특징인 셈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처녀가 아닌 여자는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나라인 이란에서 ‘사랑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니, 소설 속의 사라와 다라는 둘이 얼굴을 마주 본 채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고, 공개된 장소에서 키스를 할 수도 없음은 물론, 집으로 초대할 때조차도 이웃 감시자의 예리한 눈을 피해야 한다. 이란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멜로 드라마’는 연인들의 대화를 ‘교육적인’ 이야기로 더빙되어 방송되고, <위대한 개츠비>니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는 것은 ‘문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찍힐 수 있는 모험이 된다. 소설이 이렇다면 정치소설이거나 정치사회적 억압을 고발하는 고발문학 쯤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샤리아르 만다니푸르는 그렇게 엄숙하게 이란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자신이 검열당할 만한 문장을 쓰고, 그것을 줄을 그어 삭제해 버린다. 삭제의 대목은 그대로 작품속에 노출되어 ‘가능한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의 실례를 그대로 보여준다. 가령, “드레스 가슴과 배 쪽에 접혀 있는 새틴 주름을 매만지던 사라의 눈에 다라의 눈에 보이는 갈망에 사로잡힌다”는 문장에서 ‘드레스 가슴과 배’,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갈망’은 삭제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신체를 문장으로 드러내는 것, 갈망과 같은 성적 욕망을 의미하는 용어를 구사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검열로 삭제당한 문장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조롱이자 가벼운 풍자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적어도 검열과 폭력적인 억압구조에 대항하는 저항과 폭로의 리얼리즘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구조 하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제 몫의 삶을 찾기위해 분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작가가 독재와 저항의 대립 구도 속의 어느 한 편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것은 대단히 우화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소설의 서두에 등장하는 경찰과 시위대의 가운데 서 있는 소녀와 그 소녀가 들었던 구호,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에서도 그렇다. 전자는 저항세력을, 후자는 지배세력을 상징하는데, 그 구호가 한꺼번이 쓰여져 있는 이 모순. 이 대립과 부딪침의 어느 구석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그렇지 않을까. 그의 영화에는 적어도 이란의 정치적 억압과 문화적 불모성이 고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선함과 척박할 지언정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지 않은가.(하지만, 동시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나는 ‘순백의 상상력’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불순물이 제거된 본성적 착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보여주는 방식인데, 이런 상상은 이슬람근본주의의 억압성이 문화적으로 드러난 형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불순함과 모든 ‘악’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미장센) 그래서, 작가의 사랑이야기는 결국 쓰여지지 못하고, 사라와 다라의 사랑도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 이야기속 여주인공 사라는 다라와의 마지막 밀회를 위해 그의 집을 찾아오면서 ‘재스민 덤불’을 본 이야기를 전한다. “정원 곳곳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자유를 식물에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요.” 사라의 눈에 비친 재스민 덤불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의 아름다움, 억압되지 않은 어떤 자유의 상징 같은 것이다. 남자인 다라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지만, 여자인 사라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이란 같은 문화적 억압국가에서는 여자가 ‘사랑’에 대해 더 용감하고 욕망에 더 솔직하다. 다라는 끊임없이 사라의 사랑을 의심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하는 것에 비해 사라는 줄곧 다라를 사랑하며 과감하게 그에게 구애를 한다.

 

작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이 소설의 방식은 낯설기도 하고, 책읽기의 몰입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읽는 과정 전체가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체감케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문학적 교양도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카프카, 헨리 제임스 같은 고전 작가를 비롯하여 이란의 고대 문학, 쿤데라와 다니엘 스틸과 같은 현대 작가도 곳곳에서 인용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있었나? 출퇴근 와중의 토막시간과 주말 한낮 편안한 휴식을 반납할 만큼 흥미로웠던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 이 책에서 얻은 거의 유일한 이득은, 난 이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 물론, 이 소설 속 현실과 실제의 그 곳이 같다라는 전제하에서.

 

* 아, 이 책에서 얻은 또하나의 교양지식. 와인의 한 종류인 '쉬라즈'는 이란의 한 지명을 뜻한다는 것. 이 곳이 원산지인 포도 종류가 오늘날 '쉬라즈' 와인이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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