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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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진천규는 기자로서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한겨레 창간 사진기자로 지금까지 6차례 방북을 하여 취재를 했고, 2000년 김정일과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는 역사적 장면을 촬영한 기자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기자들의 방북취재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미국 시민권을 얻은 그는 미국의 대북폭격과 북한의 미사일 보복 등의 설전이 오가는 일촉즉발의 한반도 위기 상황속에서도 방북취재를 할 수 있었다. 책의 대부분은 사진이고, 한 두시간이면 후다닥 읽을 수 있는 분량의 텍스트로 이뤄진 이 책이 가진 미덕도 바로 이것이다. '잔혹한 독재자의 나라'이자 '비정상 국가'라는 미국 주류 언론의 지배적 인식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확인한 현재의 북한, 진천규는 그게 가능한 자리에 있었다. 


1989년 황석영의 방북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삶이 거기서도 지속되고 있음을 일깨워 줬다면, 이 책은 경제제재하의 북한에서도 삶이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한적이나마 경제가 성장하고 삶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구입한 도시락은 아주 알찼고, 옥류관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대동강변에서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거나 나들이를 나선 가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북한의 일상은 과거의 이미지에서와 달리 단조롭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경쾌하거나 심지어 발랄하기까지 하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기를 벗어나 활력을 되찾고 있음은 짐작했지만, 이 책에서 확인한 북한은 생각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제재와 압박이 북한의 붕괴를 가속화하리라는 '자기충족적 희망'은 미국 행정부의 일부에서나 통하는 전망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연도에 늘어선 북한 주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적인 느낌을 가졌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나왔을리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순전히 강제적으로만 동원되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온전한 개인의 자리가 여전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판단과 행위의 주체로서 '시민적 개인'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멀고 먼 길이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비록 '장마당'에서 거래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부상하고 그들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현재 북한의 일상을 밀고 나간다 하더라도 정치적 의미에서 '개인'은 아득히 멀어보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북한은 국가의 영역이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되어 가고 있는 중인 듯 했다. 국가의 전면적 지배에서 '사적 영역'이 분리되고 그것이 꿈틀거리면서 지금 북한의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이 책에 실린 사진은 가장 큰 미덕이다. 게다가 저자는 사진가이면서도 글을 아주 잘 쓰는 기자다. 사진들은 그 자체로 북한의 일상에 대한 정직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표정 저 너머의 감정과 평상적 감각을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도 뛰어나다. 여느 북한관련 책들과는 이런 점에서 다르고, 북한의 이해에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그것은 북한을 '철의 장막 뒤의 이상한 왕조국가'라는 식의 대상화이거나 이국적인(?) 상품화의 시선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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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탁자
공원국 지음 / 나비클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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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탁자>는 한국어로 쓰여진 티벳 다큐멘터리 같다. '초모랑마'나 '실크로드'를 다룬 티비 다큐멘터리 속의 티벳은 문명의 검은 손길이 닿지 않은 전통적 삶의 방식이 유지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문명'에 물들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산다. 이런 티벳에 관한 시각도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 일 수도 있겠다. 우리들의 삶이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으니, 그나마 아직 '순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중앙아시아, 티벳, 몽골, 부탄과 네팔에 대한 이상한 동경에는 이런 순수에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상정하는 순수가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지 않을 테지만(가보지 않았으니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마는), 이 지역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오랫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간헐적으로 방영되는 이유는 그 욕망이 제법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 같다고 느꼈는가. 그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역의 순수한 자연과 심성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다큐 영상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리얼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을 깎아 고층 빌딩을 짓고, 협곡을 막아 댐을 만들고, 사람들이 몰려와 사막과 진흙 위에 신도시를 만들고, 건설 브로커와 사기꾼, 부패한 관리와 업자들이 창궐하는 오늘날의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의 주변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티벳스러운 것'은 가끔씩 묘사되고 있는 하늘과 별, 바람과 어둠이다. 전통적 방식의 건축을 고집하는 목수(체링의 아버지)거나 티벳 여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여인 페마와 같은 토착인들의 심성과 의지도 세속 자본주의의 이익과는 무관해 보인다. 작가는 토착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과 상처를 입어 이 곳으로 스며든 외로운 외지인들을 주인공 삼아 이 소설을 밀고 나간다.주인공들을 닮은 문장들은 짧고 함축적이며, 티벳의 맑고 단순한 하늘을 닮았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천성 대지진이다(라고 추정된다). 지진 앞에 수십층 건물 대도가원은 맥없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댐을 폭파하고 신도시와 구도시 전체가 물로 허물어진다. 소설은 지진 속에 묻힌 자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사람들, 지진으로 드러난 부패와 이권의 고리,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펼쳐 보인다. 건물을 지어서는 안되는 산과 지형에 들어선 초대형 건물들은, 그것이 중국 자본주의의 서부 개발 상징이자 문명의 척도처럼 보이지만, 지진 앞에 속수무책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티벳의 가문비 나무로 만든 커다란 탁자 하나. 그 아래 아이 둘과 남자하나가 밀려드는 토사와 건물 잔해 속에서 밤하늘의 별 자리 이야기를 불빛 삼아 겨우 버텨 살아남는다. 남자가 지어낸 별 이야기는 지옥 저 너머의 이야기이자 미완의 이야기, 그 자체로 티벳인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문비 나무에 의지하여 문명의 붕괴를 견뎌내기. 붕괴의 와중에서 이야기로 버텨내기, 중장비와 공병대가 아닌 티벳 여인의 삽으로 산 사람들 구조하기. 


이 소설은 인류학자인 작가가 처음으로 써낸 장편이라고 한다. 이 책의 첫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대여섯권의 소설을 집필한 중견 소설가일 것이라 착각했다. 그의 문장은 처녀 소설을 써낸 자의 것으로는 보기에는 막히고 맺힌 데가 없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리듬처럼 흘렀던 것이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을 배경으로 그들의 심성과 이력을 보여주는 방식도 고수급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내들, 체링, 지우, 왕빈, 장인우는 직업이 다르지만 모두가 비슷한 성격과 심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식물성의 심성구조를 가진 자들. 소설의 각 장들은 영화의 시퀀스처럼 한편 한편 끊어질 듯 이어진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과 단편적으로, 내적으로 이어진 시퀀스들로 드라마틱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정지된 영상을 보여주듯이 써내려 간다.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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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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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쓸쓸하고 얼어붙은 오래된 정원에서

  두 유령이 흘러간 과거를 찾고 있네". 


츠바이크는 프랑스 시인 베를렌과 오랫동안 교유를 하고 지냈다. 로맹 롤랑과 더불어 츠바이크의 가장 가까운 프랑스 문인이 바로 이 괴팍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가 가장 정점에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츠바이크의 다른 작품들처럼, 안타까움과 쓸쓸함, 삶의 비극성과 아이러니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인다. 중편 또는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진하다.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중간을 오가는 츠바이크의 작품들은, 대중소설로서의 매력과 본격문학으로서의 통찰을 두루 갖춘, 보기드문 사례일 것 같다. 내가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졌을 때마다 그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일산의 '버티고 서점'에서 샀는데, 소설에 특화되어 있는 이 서점의 '구색'은 높이 살 만하다. 중요한 작가의 덜 알려진 소설, 출간 사실 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소규모 출판사의 책이라도 여기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 주인의 안목이 그만큼 뛰어나다. 대형 쇼핑몰의 한 구석에 마련된 이 서점의 서가는, 백화점의 서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책이 일상의 기호식품처럼 취급되는 비문화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일시적 즉자적 소비의 현장에서 그나마 '숨통'과 '사유'의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쯤 되면 한때의 철학도였던 서점 주인장에게 고마움 마저 느끼게 된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운동권 수배자였던 남자가 출감한 뒤 과거의 연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거기서 '오래된 정원'은 수배와 도피의 와중에 마련된 사랑의 공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츠바이크의 그것은 사랑의 내구성이 지속불가능함을, 그것은 이미 '쓸쓸하고 얼어붙은' 것임을 자각하는 장소/시간이다. 실체는 모두 빠져 나가 '유령'이 되어 있고, 시간은 저 너머의 세계에 가 있다. 사랑스럽던 여인은 이제 흰 머리칼이 무성한 중년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전쟁은 두 사람의 가족과 삶을 날카롭게 찢어 놓았다. 


이들의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것이었으나 관계의 재생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고 만다. 그게 이 소설속 삶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이별 여행의 행선지가 하필이면 하이델베르크였을까. 그 곳의 언덕 위에 솟은 낡은 성이야 그럭저럭 여행의 목적지가 될만하다 치더라도, 네카어 강변의 이 소도시는 독일의 철학과 정신, 아카데미의 흔적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츠바이크의 낭만적 상상력과 하이델베르크는 내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는데, 이 도시의 인상이 내게 지나치게 강렬한 탓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게르만 문화권 내부에서 존재하는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 함께 실린 '미친 개'에 대한 단편, <당연한 의심>도 아주 재미있다. 집착이 낳은 배제와 복수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뒷부분의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소개는 간결하고 소상한 대로 읽을만한 글이다. 아마도 국내에 소개된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글로는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츠바이크의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이 글을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살은 갑작스런 선택과 결단이 아니라 오래 준비되고 계획된 사건이었다는 것. 일본의 2차 대전 참전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가 절망과 자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의 우울증과 첫번째 아내와의 이혼, 비서와의 결혼, 영국 바스에 보관된 그의 유품들 등. 츠바이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인문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유럽의 '문명' 반대편에 파시즘이라는 정치적 야만과 아시아라는 인종적 야만을 두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짧은 글에서 새롭게 얻은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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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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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14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청목 출판사에서 나온 독문학자 강두식의 번역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3분의 1 쯤 참고 견디며 읽다가 집어던졌다. 원문 번역이 아니라 독일어 중역인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지만, 지명과 이름이 틀렸고, 문장도 엉망이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독일어나 영어 좀 하는 초보자들이 나눠 번역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위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80년대쯤 이 따위 번역으로 ‘전집’들을 내놓고 아직도 팔고 있다.) 그 뒤 세르비아어 전공자에 의한 제대로 된 번역이 문지에서 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올 초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문지의 대산세계문학전집은 이런 점에서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전공자에 의한 원문 번역에 충실한 데다 대산재단이라는 ‘자본’에 힘입은 탓이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번역이되 국내에 아직 소개가 안된 작품들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지난 1월 크로아티아를 건너 사라예보를 거쳐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 언저리의 동네 비셰그라드를 찾은 것도 사실은 이 소설과 이보 안드리치 때문이었다. 발칸의 험준한 산맥으로 이뤄진 옛 유고슬라비아의 세 나라를 거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사정이 좀 나은 크로아티아를 지나 보스니아로 들어서는 순간 혼자만의 자동차 여행이 주는 호젓함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도로가에 면한 마을마다 불에 타고 무너지고 폭파된 집들이 즐비했다. 이 나라를 할퀴고 간 전쟁의 상흔은 여전한 현재성으로 생생했던 것이다. 가톨릭 성당이 우뚝 선 마을을 지나면 무슬림 사원이 세워진 마을이 나타나고, 그 곳을 지나면 다시 기독교 교회가 보였다. 발칸의 마을들이 산맥을 등줄기로 하여 중첩된 계곡들로 이뤄져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지형의 독특함이 이런 계곡마다의 종교적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과 종교적 다양성은 이 지역에 고유한 ‘종족적 민족주의’(이 말을 나는 오승은의 <동유럽 근현대사>에서 배웠다)와 결합하여 끔찍한 살육과 전쟁을 낳았다. 바로 이러한 종족과 인종과 종교의 교차점에 ‘드리나 강의 다리’와 그 다리가 세워진 도시 비세그라드가 있다. 몬테네그로에서 발원한 드리나 강은 비세그라드에서 르자브 강과 만나 사바강으로 향하고, 다시 사바강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과 합쳐져 흑해로 흐른다. 드리나 강은 동로마와 서로마의 자연적 국경이었고, 따라서 정교회와 가톨릭의 경계이기도 했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으로 무슬림이 진출했으며 상당수 유대인들도 디아스포라의 오랜 역사를 거쳐 드리나 강 인근에 정착했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세르비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400여년 역사를 가진 마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드리나 강 다리의 원래 이름)가 파괴되었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시작한다. 네 개의 종교가 겹쳐지고, 서너 개의 민족이 ‘다리’를 건너며 서로 어울리고 살았던 비세그라드의 역사와 전설, 흥망과 성쇠의 과정이 소설을 큰 줄기를 이룬다. 다리가 세워져 파괴되기까지의 장구한 세월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이나 길이에서 모두 대하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 지역 특유의 민족적 설화와 에피소드들이 점점이 박혀져 소설은 아주 풍부한 이야깃 거리로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마르케스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문장의 유장함, 설화적 풍부함, 전설과 판타지의 결합 등 소설적 웅장함과 세부를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특정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인물들이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아, 인종과 종교의 전쟁으로 얼룩진 이 동네에도 이만한 작가가 있구나 하는 것이 책을 펼치며 든 생각이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에피소드는 비세그라드의 아름다운 여인 파타의 죽음 이야기. 이 도시의 반대편 끝에 벨리 루그와 네주케라는 마을이 있다. 벨리 루그에는 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파타가 살고, 네주케는 함지치 형제들이 산다. 파타는 함지치 형제들의 무스타이베그에게 구혼을 받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그녀의 아버지 아브다가가 무스타이베그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보답으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파타가 시집가는 날, 말을 타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드리나 강의 녹색 물결 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슬기로워라. 어여뻐라, 아브다가의 아름다운 파타여!”라는 전설같은 노래) 사라예보에서 해발 1500미터 고지 가파른 벼량을 옆에 둔 도로를 따라 운전하면서 이 슬픈 죽음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가끔씩 차를 세워 녹색의 드리나강을 바라보기도 했다.


드리나 강의 다리 중앙 교각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리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던 요정을 달래기 위해 쌍둥이 아이들인 스토야, 오스토야가 산채로 매장되어 있고, 그 구멍으로 쌍둥이를 잃은 어머니가 젖을 주었다는 이야기. 다리 건설을 방해하던 농부가 터키 지배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산채로 묶여 죽어가는 이야기. 비세그라드에서 처음으로 호텔을 열어 전성기를 구가했던 유대인 여인 로티카의 이야기. 어느 밤 ‘타짜 도박사’에게 홀려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이야기. 이런 판타지적인 스토리는 흥미로우면서도 발칸 사람들의 어떤 은밀한 믿음과 사유방식을 엿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스토리들. 이 책의 전반부는 터키 지배의 시대를, 후반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후반부의 오스트리아적 근대성보다는 전반부의 전근대성이 오히려 발칸 고유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 가진 다채로움. 터키와 유대, 슬라브, 독일, 헝가리 식 이름들의 기묘한 공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상인 알리호좌가 오스트리아군과 세르비아 군의 포격전이 벌어지는 날, 모든 주민들이 사라진 마을에서 부서진 다리를 보며 죽어가는 순간이다. 피난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가게에 홀로 숨어 전쟁이 포성속에서 “고요한 감미로움”을 맛보는 순간, 그의 집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무너진 다리처럼 그도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한가지는 불가능하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영원한 건축물을 세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영원히 이 세상 어디에서든 자취를 감춰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취를 감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설을 보니 이보 안드리치는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 직전까지 베를린의 유고 대사를 지냈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구속의 기간동안 이 소설과 보스니아 3부작을 써냈다고 한다. 무슬림의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가톨릭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대학을 보내고,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공부했으며, 정교회의 세르비아에 정착했던 그의 삶은 이 옛 유고 연방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채롭다. 안드리치는 1975년에 죽었으니 티토의 유고 연방이 아직 해체되기 전이고, 1990년대 초반 세르비아가 벌인 인종학살을 보지 못했으니 다양한 종교와 민족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었던 그의 희망은 그때까지 살아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리호좌가 소망했던 바는 그의 바램이기도 했을 것이다.

 

드리나강의 다리가 있는 도시 비세그라드(Visegrad)는 ‘높은 언덕의 요새’라는 뜻이다. 몽골과 터키 등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동유럽에는 높은 곳에 요새를 많이 만들었는지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여럿이다. 체코의 비세그라드는 이 나라의 민족주의 음악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 첫 번째 곡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헝가리의 비세그라드는 14세기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국왕이 모여 세계 최초로 평화회담을 연 곳이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세그라드가 바로 이 소설의 발원지다. 이 도시의 ‘카피야’는 아예 이보 안드리치 타운이라는 소설가 이름을 딴 동네가 있다. 이 소설가의 동상이 또다른 이 동네의 유명인 테슬라와 함께 서 있고, 다리를 만든 메흐메드 파샤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2018년 1월 말, 동양인은 아무도 없는 이 다리 위에서 “머니, 머니”를 외치며 따라붙은 이 동네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이보 안드리치의, 이보 안드리치를 위한 이 도시를 떠났다. 

드리나 강의 다리와 그 위에 놀고 있는 보스니아의 아이들, 다리를 만든 메흐메드 파샤, 거리의 벽에 그려진 이보 안드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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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병 2019-04-1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길 다녀오셨군요.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세계 곳곳에 고통과 한이 서려 있지만, 특히 드리나 강의 산하에는 그 고통과 한의 시공간이 첩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이름만 들어도 신음소리가 들려 올듯한 보스니아니 세르비아니 발칸이니 하는 장소입니다.신음하며 죽어간 생명이 뼈를 묻었으니 세게는 그 질량 이상으로 무겁게 슬픕니다.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기 시작하면서, 다리의 전경 사진을 보고싶어 찾다가 이 글을 읽었습니다. 고맙고, 부러워하며 읽었습니다.
머니, 머니하며 따라붙는 아이들이 슬프군요.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9-04-13 16:27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의외로 안드리치의 소설은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더군요. 노벨상 수상자의 후광 덕분인지는 몰라도. 발칸을 여행하는 것은 즐겁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이고, 수백년 동안 유럽의 변방/아시아의 변방/투르크 세계와 서구 사이의 경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 충돌을 모두 감당해야 했던 서글픈 동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조차도 오리엔탈리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나는 대로 최근에 읽은 책들읽었다는 사실을 까먹지 않기 위해리뷰쓰기에 게을러진 영혼을 위해

정리하자면, <낭만의 길야만의 길>(이종헌),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안나 가발다), <차우세스쿠>(에드워드 베르), <맑스로 가는 길>(루카치), <베토벤의 생애>(로망 롤랑), <팔 거리의 아이들> (몰나르 페렌츠), <아시아가 世界였을때>(스튜어트 고든), <헝가리 문학사>(한경민), <스페인 내전연구>,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헝가리 부다페스트로>(초모 모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제국의 종말>, <어제>(아고타 크리스토프),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여자없는 남자들> (하루키),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위기의 장군들>(김종대), 그리고, <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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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7 2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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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8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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