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줄리안 반즈의 새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인지/기억하게 된다는 심리적 진실 말이다. 시간은 째깍거리며 어김없이 흘러가지만, 정작 우리가 체감하는 것은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진행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저런 ‘관계의 그물’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가 받은 기쁨과 상처는 쉽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가 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기억의 진실이다. 뒤늦게라도 내가 준 고통과 상처에 대해 깨닫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려 할지라도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어 있게 마련이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은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미안하다 ”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던 ‘윗 분’들에 대한 주무관 장진수씨의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갖는 것, 그것은 모든 윤리의 출발일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토니가 대학시절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으로 시작한다. 짧은 기억이지만 선명한 이미지로 남은 채 뒤섞여 떠오르는 기억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과 수증기, 수챗구멍 속의 정액, 강물과 회중전등, 잿빛 강, 차가운 목욕물. 이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산출해내지 않지만, 이 이미지들이 주인공 토니의 개인사와 더불어 선명한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전개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 풍경이지만, 그것은 얼룩덜룩한 개인사와 더불어 고통과 저주를 내포하는 이미지로 반전한다. 이 소설에서 줄리안 반즈가 보여주려 한 것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문장에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를 개인사로 돌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주목/인지/지각하는 매우 부정확한 것일뿐더러, 때로 기록된 문서조차도 부분적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하게 마련이며, 그 확신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조건일진대, 그럼 어떤 출구가 있겠는가. 결국 성찰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그 성찰의 공간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는 별개로 말이다.


토니는 학창시절 네 명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 중 유달리 명민했던 에이드리언은 뒤늦게 다른 세 명의 친구들과 합류한 친구. 이들의 학교 동료였던 롭슨은 여자 친구와의 연사 끝에 16세의 나이에 자살하고 만다. 롭슨의 자살사건을 두고 이 네 명의 친구들이 토론을 벌일 때 에이드리언은 “자살은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는 까뮈의 말을 인용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대학 1학년 시절 학과 엠티에서 롤링 페이퍼에 까뮈의 이 말을 인용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 덕담이나 주고받는 롤링페이퍼에 웬 실존주의적 냄새가 폴폴 나는 치기란 말인가, 기실 까뮈의 그 말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와 연관된 매우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었다. 세계는 살만한 곳인가라는 세계에 대한 인식(살만하지 않다면, 곧 세계를 긍정할 수 없으면 부정해야 한다-철학적 비관주의), 그렇다면 내 실존은 어떠해야 하는가(그러한 세계에 대한 내 선택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가-주체의 실존적 선택)라는 문제가 바로 ‘자살’이라는 문제에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 토니와 그의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옛 여자친구인 베로니카를 둘러싼 관계들이 이 소설의 주요한 얼개를 이룬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결별한 뒤에 에이드리언은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고, 그 허용 여부를 묻는 편지를 토니에게 보낸다. 토니가 보낸 답장의 내용은, 소설의 뒷부분에서야 등장하여 이 소설의 극적 반전의 계기가 된다. 절친했던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한때의 연인이었으나 심드렁하게 헤어진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자살하고 만다. 학창시절 동료인 롭슨의 자살에 대해 까뮈의 말을 인용했을 때부터 ‘자살에의 예감’은 소설적으로 예비되어 있었던 것.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고, 토니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토니가 보낸 편지는 두 사람에 대한 끔찍한 저주였으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예언한 것이었다.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사실 마음한켠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예술작품을 보라고. 그러나 그 복수의 과녁은 그 조준이 정확해야 하는 법. 너희 둘이 딱 그에 해당된단 말이지.” 토니의 편지는 베로니카가 남자 잡아먹는 요물이라며 그것을 베로니카의 모친에게 확인해보라는 충고까지 잊지 않는다.


토니가 보낸 편지는, 아마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헤어진 연인과 친구에게 보내는 가장 독하고 신랄한 것 같다. 이 편지만 놓고 보면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일 수가 없다. 그런데, 줄리안 반즈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 편지가 담고 있는 비극에의 ‘예감’을 뒤이어 풀어놓았다. 이미 스포일러 수준을 넘어섰으므로 비난을 무릅쓰고 소개하자면,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의 모친을 찾아가라는 토니의 ‘충고’ 대로 그녀를 찾아갔다가 ‘관계’를 맺게 되고 연인의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뒤 자살하고 만다. 베로니카는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토니의 말을 실현된 구체적 인물, 곧 어머니와 자신의 연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폐증 환자인 ‘동생’을 돌보며 살아간다. 토니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남으로 살아가는 노년에 이르러서였다. 베로니카에게 사죄를 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 거기에 나의 이니셜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그 저열한 편지에서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의논하라고 채근했던 것이 기억났다. 남은 한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 없음을, 만회할 수도 없음을.”


토니가 베로니카와 연애한 기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 후 그의 삶은 그럭저럭 영국의 평균적인 중산층적 삶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혼을 했지만 딸이 하나 있고 이혼한 전처와도 가끔 만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혼자 사는 삶에도 별로 궁기가 없다. 토니가 젊은 시절 방문했던 베로니카 가족의 삶도 마찬가지다. 영국인의 삶을 잘 모르긴 해도 외견상 문제없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기실은 그 안락한 삶이 허위로 쌓아올린 것이며, 누군가의 고통을 대가로 하여 성립한 것이라는 것. 동시에 끔찍한 저주의 유산이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현현하고 있다는 것. 토니는 자신이 실제로 쓴 편지와 썼다고 생각하는 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가 실제로 쓴 편지는 젊은 날의 치기어린 농담 수준의 것이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고, 다른 내용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 폭력적 농담과 치기가 결과할 끔찍한 결과는 그로서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토니는 노년의 베로니카에게 사죄를 하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라고 싸늘하게 말한다. 토니는 그 자신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하려 하나 삶은 그의 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다른 삶들이 서로 얽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옛 연인의 편지가 준 심리적 충격, 그리고 어머니-연인 사이의 부정이라는 더 커다란 충격, 그리고 그 부정이 낳은 동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비극 앞에서, 토니의 이해는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된 다음에 사죄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는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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