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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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를 읽은 것은 십 수년 전이다. 시각과 언어에서 나온 두 권짜리 박정자 번역의 푸코 평전. 푸코의 저작 중 제대로 읽은 것은 한 두 권에 불과했던 당시에, 나는 이 치밀하게 쓰여진 평전을 통해 겨우 푸코의 철학과 삶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 박정자의 유려한 프랑스어 번역도 이 책을 쉽고 재밌게 읽히게 하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영희 선생은 죽은 소설가 이병주가 6,70년대에 푸코를 읽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푸코의 저작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불문학자이자 번역가인 박정자가 1979년 번역한 <성은 억압되었는가>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80년대에 <성과 권력>이란 제목으로 인간사에서 재출간되었을 것이다.) 지방 소도시의 군청에서 촌스럽기 그지 없는 제복을 입고 공문서를 만들고 잔심부름을 하던 무렵이었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공무원들 틈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밑줄을 그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각과 언어에서 나온 두 권짜리 푸코 평전은 내게 2권만 남아 있다. 첫째 권은 지인으로부터 빌린 것이었는데, 그가 읽기도 전에 내가 먼저 읽고 너무 재밌어 2권은 내 돈으로 샀던 것. 나는 그 책을 2년이나 지나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었다. 내 책장에 뒤섞인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할 즈음, 소포로 책의 주인에게 돌려줬던 기억이 난다. 교보에서 그린비에서 나온 같은 번역자의 <미셸 푸코, 1926~1984>를 발견했을 때, 나는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고 달라진 장정과 단권으로 묶인 책의 두께에 낯설기도 하면서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디디에 에리봉이 2010년에 개정하여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니 초판 번역본과는 내용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판본 또한 프랑스어를 잘 알지 못하는 내게도 유려한 번역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어달 여 동안 다른 책을 읽는 짬짬이 예전의 재미와 흥분을 추억하면서 다시 읽었다.

 

1926년과 1984년이라는 푸코의 생몰연도가 상징하는 연대기는 아마도 프랑스 지성사의 ‘황금시대’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푸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 가령 그의 스승들인 장 이폴리트, 뒤메질, 깡길렘, 동료들인 폴 벤느, 부르디외, 들뢰즈, 알뛰세, 그리고 장례식이 “마지막 68 시위”와 같았던 사르트르, 거기에 소위 앙가주망 연예인이었던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등장하고 부상했던 시기는, 크리스테바의 소설 제목 그대로, ‘사무라이’들의 전성시대였을 것이다. 물론, 그 사무라이들이 손에 든 것은 칼이 아니라 펜이고 책이었다. 다소 비약을 하자면, 우리로 치면 ‘종로학원’(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장 이폴리트가 헤겔 강의를 하고, 교사임용고시 준비반(아그레가시옹)에서 메를로 퐁티가 강의를 하고, 알뛰세가 지도를 하는 시절이다. 탄탄한 지식과 엄밀한 철학으로 무장한 이 지적 사무라이들이 보여주는 현란함과 관계의 사슬은 반주변부의 독자에게는 부럽고도 부러운 것이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광기의 역사>에서 에이즈로 죽기 직전까지 원고를 매만지던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지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결과한 파장과 논란을 솜씨좋게 정리해내고 있다.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내가 부러웠던 것은 푸코와 그의 동시대 거장들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철학을 매끄럽게 정리하면서 멋진 책을 써냈던 디디에 에리봉의 솜씨였을 것이다. 사건과 비리를 캐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지식세계의 산출물을 정리하고 요약하며 그것은 대중의 언어로 번역할 줄 아는 지식인 저널리스트 말이다. (국내에 이런 지식인 저널리스트는 아마 고종석 정도가 아닐까?) 이것은 아마도 그가 기사를 쓰던 <누벨 옵세르바퇴르>와 같은 저널이 소비되는 사회, 바캉스 시즌에 <말과 사물>이 빵처럼 팔리는 동네여서 가능했을 수도 있다.

 

푸코의 삶에서 일관된 것이 있다면, 말의 바른 의미에서 그가 “공부하고 글쓰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초기 저작인 <광기의 역사>에서부터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까지, 그는 고문서 더미들을 뒤지고 끊임없이 글을 썼다. 초기의 그는 지적으로는 당대의 제도권 학문과 패러다임에 도전하여 균열을 내는 지적 혁명가였지만, 일상의 그는 문화관료이기도 했으며 대학제도에 편입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의 철학이 억압과 배제, 지식-권력의 기원에 대한 탐사로 이어지면서 그는, 실천적으로 좌익행동주의자, 아니 일체의 억압과 제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변모해간다. (가령,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가 들어섰을 때 들뢰즈는 사회당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폴란드 자유노조 탄압에 침묵하는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 대열에 참여하지 않는다. 물론 푸코는 과격하리만큼 사회당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에리봉은 이런 태도를 ‘좌익 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데, 푸코의 비판은 좌충우돌, 모든 억압을 겨냥한다.) 심지어 ‘쾌락의 활용’이라는 ‘자기에의 배려’에서도 그는 갈 수 있는 극한에까지 이르렀다. 짐작컨대 샌프란시스코 클럽에서 SM 섹스까지도 감행하는 과도한 ‘쾌락의 활용’이 그에게 에이즈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밖에서와 달리 연구실에서의 그는 공부하고 자료를 뒤지며 글을 쓰는 인간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푸코를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불과 십 여년 전만 해도 웬만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글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하자면 놀라운 변화다. 들뢰즈를 거쳐 네그리로 가더니 요즘에는 아감벤과 랑시에르까지 이른 모양이다. 나로서는 이 현란한 우리 사회를 지적 풍속을 따라갈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푸코를 처음 읽었을 때 가졌던 생각만큼은 여전하다. 예컨대,  푸코가 비판해마지 않는 ‘감옥’의 한국적 양상인데, 푸코가 한창 수용되던 당시에도 푸코적 시각에서는 용납되지 않던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 시민을 억압하는 규율권력의 실체로서의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정자 교수가 조선일보의 단골필자이자 극우파 매체인 <한국논단>의 정기기고자라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프랑스 지식인의 담론에 대해서는 열광하지만, 정작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는 보편의 논리로 위장한 채 고담준론을 일삼거나, 현존하는 억압에 대해서는 우파의 논리를 옹호하는 부류들 말이다.

 

“8일간의 파업 후 간신히 문을 연 시장을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 경치가 미세한 부분으로 내 주의를 끌었다. 가게 앞 진열대에 괴상한 모습의 재봉틀이 높고 부자연스럽게 10여대씩 줄지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마치 19세기 신문광고에서 볼 수 있었을 것 같은 당초문 장식의 고대 페르시아 세밀화를 거칠게 모사한 덩굴풀과 꽃봉오리가 그려져 있었다. 서구의 구시대적 표지와 오리엔트의 낡은 표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 물건들은 모두 ‘메이드인 사우스 코리아’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란의 최근 사태가 그 나라의 가장 뒤떨어진 그룹이 근대화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자체가 구시대로의 회귀이며, 온 국민과 온 문화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샤의 불행은 이 구시대로의 회귀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푸코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이뤄지기 직전에 이란을 방문한다. 팔레비 왕조의 정치적 억압과 부패한 현실을 보고 그는 이슬람 혁명의 옹호자가 되는데, 이란 구체제의 억압성을 상징적으로 느끼게 된 계기는 ‘메이드 인 사우스코리아’ 재봉틀이었다. 한국산 재봉틀이 구시대의 회귀를 보여주는 표지라니, 푸코의 시각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 재봉틀은 우리에게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여성의 가사노동을 잠시나마 해방시켜준, 동시에 가족에게 입성을 제공해 주었던 요긴한 물건이기도 했거늘. 푸코가 본 것은 구로공단 언저리에서 공순이들이 만들었을 ‘브라더 미싱’이었을까. 지금은 재봉틀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나무틀만 남아 홍대 언저리 카페들의 테이블로 쓰이고 있는 그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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