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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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전에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이 나라에서는 나보코프나 제인 오스틴을 읽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 나라가 술을 사랑하고, 술과 연애를 찬미하던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나라인지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이라면 그 권력을 해체하고 민주화하면 되지만, 다수 국민의 참여와 동의하에 형성된 문화적 억압을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란과 같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국가에서 특정 종교의 신념과 관습이 강요되는 상황은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에 대해 내가 혐오감을 갖는 이유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슬람 근본주의 지배하의 이란 이야기다. 소설 속의 작가는 사라라는 여자와 다라라는 남자가 연인으로 등장하는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 그는 가상의 작가도 아니고, 바로 작가 자신인 샤리아르 만다니푸르다. 하지만, 그의 연애소설은 문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의 ‘페트로비치’(이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 등장하는 형사의 이름이다. 페트로비치는 소설 속에 검열 담당 공무원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차라리 작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검열을 하도록 하는 자기검열 기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에 의해 문장 하나하나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검열을 받아야 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그래서 작가의 ‘사랑이야기’와 작가가 당대의 이란 사회 검열구조 속에서 소설을 실제로 써가는 이야기, 두 축으로 진행된다. 소설과 소설의 발생사적 맥락을 그대로 드러내기. 이야기의 창조자로서 작가가 날 것으로 드러나는 소설,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특징인 셈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처녀가 아닌 여자는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나라인 이란에서 ‘사랑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니, 소설 속의 사라와 다라는 둘이 얼굴을 마주 본 채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고, 공개된 장소에서 키스를 할 수도 없음은 물론, 집으로 초대할 때조차도 이웃 감시자의 예리한 눈을 피해야 한다. 이란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멜로 드라마’는 연인들의 대화를 ‘교육적인’ 이야기로 더빙되어 방송되고, <위대한 개츠비>니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는 것은 ‘문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찍힐 수 있는 모험이 된다. 소설이 이렇다면 정치소설이거나 정치사회적 억압을 고발하는 고발문학 쯤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샤리아르 만다니푸르는 그렇게 엄숙하게 이란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자신이 검열당할 만한 문장을 쓰고, 그것을 줄을 그어 삭제해 버린다. 삭제의 대목은 그대로 작품속에 노출되어 ‘가능한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의 실례를 그대로 보여준다. 가령, “드레스 가슴과 배 쪽에 접혀 있는 새틴 주름을 매만지던 사라의 눈에 다라의 눈에 보이는 갈망에 사로잡힌다”는 문장에서 ‘드레스 가슴과 배’,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갈망’은 삭제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신체를 문장으로 드러내는 것, 갈망과 같은 성적 욕망을 의미하는 용어를 구사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검열로 삭제당한 문장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조롱이자 가벼운 풍자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적어도 검열과 폭력적인 억압구조에 대항하는 저항과 폭로의 리얼리즘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구조 하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제 몫의 삶을 찾기위해 분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작가가 독재와 저항의 대립 구도 속의 어느 한 편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것은 대단히 우화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소설의 서두에 등장하는 경찰과 시위대의 가운데 서 있는 소녀와 그 소녀가 들었던 구호,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에서도 그렇다. 전자는 저항세력을, 후자는 지배세력을 상징하는데, 그 구호가 한꺼번이 쓰여져 있는 이 모순. 이 대립과 부딪침의 어느 구석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그렇지 않을까. 그의 영화에는 적어도 이란의 정치적 억압과 문화적 불모성이 고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선함과 척박할 지언정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지 않은가.(하지만, 동시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나는 ‘순백의 상상력’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불순물이 제거된 본성적 착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보여주는 방식인데, 이런 상상은 이슬람근본주의의 억압성이 문화적으로 드러난 형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불순함과 모든 ‘악’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미장센) 그래서, 작가의 사랑이야기는 결국 쓰여지지 못하고, 사라와 다라의 사랑도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 이야기속 여주인공 사라는 다라와의 마지막 밀회를 위해 그의 집을 찾아오면서 ‘재스민 덤불’을 본 이야기를 전한다. “정원 곳곳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자유를 식물에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요.” 사라의 눈에 비친 재스민 덤불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의 아름다움, 억압되지 않은 어떤 자유의 상징 같은 것이다. 남자인 다라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지만, 여자인 사라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이란 같은 문화적 억압국가에서는 여자가 ‘사랑’에 대해 더 용감하고 욕망에 더 솔직하다. 다라는 끊임없이 사라의 사랑을 의심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하는 것에 비해 사라는 줄곧 다라를 사랑하며 과감하게 그에게 구애를 한다.

 

작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이 소설의 방식은 낯설기도 하고, 책읽기의 몰입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읽는 과정 전체가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체감케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문학적 교양도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카프카, 헨리 제임스 같은 고전 작가를 비롯하여 이란의 고대 문학, 쿤데라와 다니엘 스틸과 같은 현대 작가도 곳곳에서 인용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있었나? 출퇴근 와중의 토막시간과 주말 한낮 편안한 휴식을 반납할 만큼 흥미로웠던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 이 책에서 얻은 거의 유일한 이득은, 난 이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 물론, 이 소설 속 현실과 실제의 그 곳이 같다라는 전제하에서.

 

* 아, 이 책에서 얻은 또하나의 교양지식. 와인의 한 종류인 '쉬라즈'는 이란의 한 지명을 뜻한다는 것. 이 곳이 원산지인 포도 종류가 오늘날 '쉬라즈' 와인이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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