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 생각 없이 펼쳐든 책이 망외의 소득을 가져다 줄 경우가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이 그런 경우다. 이 책을 종로의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는데, 주말 동안 푹 빠져 읽었다. 요즘 국내에 잘 번역되는 좀 가벼운 대중소설이겠거니 하는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은 쿤데라의 소설처럼 스토리가 전개되는 와중에 역사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 도드라지는 에세이가 곳곳에 등장한다. 나찌즘과 2차대전이라는 ‘극단의 역사’와 함께 그 역사를 기이한 생존술로 살아낸 사람들이 등장하고, 역사를 상대화/유희화하는 서구의 지적 풍토에 대한 비판도 묵직하다. 영화화된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가 그러하듯이 전후 독일인으로서 슐링크의 관심은 나찌로 인한 고통과 범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고발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 성찰이 촉촉하게 스민 빼어난 작품이다.

 

이 소설 <귀향>은 말하자면 오딧세이를 변주한 소설이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오딧세이가 간난신고 끝에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에게로 귀환한다. 슐링크의 소설은 오딧세이 이야기를 얼개로 삼아 2차 대전 전후를 살아내야 했던 戰前 세대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재 속에 살아가는 戰後 세대 아들의 이야기다. 호메로스를 빗대어 말하자면, 아들 텔레마코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딘가에서 ‘모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아버지 오딧세이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오딧세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찌의 전범이었고, 현란한 자기변신을 보여주는 카멜레온적 인간이다. 주인공인 텔레마코스(데바우어)는 연애에도 실패하고 결혼에도 이르지 못한 채 부유하다가 뒤늦게야 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귀환한다. 진짜 오딧세이는 여전히 방황중이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귀향에 성공하는 것이다.

 

아버지인 오딧세이는 나찌의 핵심세력이었다가 전쟁 막바지에 도망을 쳐 점령하의 소련군에서 일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일한다. 그는 유쾌한 대중소설을 쓸 줄 아는 아마추어 소설가이기도 하고, 고등사기꾼의 기술과 거짓말로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고, 두 번의 결혼에 이어 포스트모던 법학이론가로 살아가는 인물. 흥미로운 것은 이 나찌주의자가 해체주의적 법이론가로 변신한 대목이다. 슐링크는 그의 이론을 두고 “해체주의적 법이론이라는 명목 아래 현실과 텍스트의 분리, 작가와 독자, 범죄자, 희생자, 동시대인의 역할, 그리고 책임의 문제를 아주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작가의 포스트모던 이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오딧세이인 주인공 존 드 바우어는 네오콘의 사상적 지주인 레오 스트라우스와 포스트모던 문학이론가 폴 드 만을 추종하는 인물이다. 폴 드 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홍기빈의 ‘비그포르스’에 관한 책에서 정보를 얻은 바 있는데, 그 역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였다가 나찌로 전향하고 급기야는 전후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나찌즘을 겪은 전후 독일인으로서 슐링크는 포스트모던 이론의 역사적 상대주의, 진리에의 거부, 보편적 법칙에 대한 회의라는 기본 전제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는 나찌조차도 부정해야할 절대 악이 아니라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성향으로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인 존 드 바우어의 ‘선악 공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악이 있어야만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시각은, 악의 필요성(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내지는 악의 불가피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의 선한 면이란 악이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나찌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합리화인 셈이다. 작가는 그것을 교묘한 ‘지적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이 내게는 미국의 지적 풍토에 대한 유럽 지식인의 풍자적 비판으로 이해된다. <더 리더>에서 순박하고 선한 처녀 한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의식이 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다른 나찌 부역자들은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지만, 그녀는 순박하게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처벌을 받는다. 그녀는 유죄인가, 아닌가. 한 인물의 퍼스널 히스토리를 하나하나 벗겨내면서 우리에게 선과 악, 역사적 책임과 개인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보여주는 것. 이 소설 <귀향>이 던지는 물음의 방식도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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