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농성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이다. 검사가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동료 한명이 불에 타 죽고, 화염병 불꽃이 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서 있던 그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화염병을 든 ‘농성자’였을 것이다. 그 너머를 보기란 그에게 아주 지난한 일이었을 터.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적대자’(이 표현은 경찰이 쓴 표현이다.) 앞에서 자신과 타자의 행위의 근거를 찾는 일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개발 행위, 그것도 빠른 속도로 도심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자본의 욕망이 산출하는 ‘파시스트적 속도’, 도시주거의 최하부에 위치한 세입자들의 요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보이지 않는다.



1심 판결의 판사가 “공무집행중이던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경찰관이 다치게 한 행위는 국가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피고인들에게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할 때, 나는 웃고 말았다. 그에겐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양상에 대한 인식만이 있을 뿐, 그 사건의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 양상에 있어서도 경찰관의 죽음이라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만이 보일뿐, 화염병을 들고 망루위에 올라간 사람들의 행위가 갖는 의미는 보여질 않는다. “이건 재판이 아니야”라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판사에게, 진압 특공대에게 본질을 보라고 외쳐본들 이들의 인식의 피상성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말 늦은 밤, 혼자서 광화문 인디영화관에서 <두개의 문>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권력의 비가시성’이라는 푸코의 주제가 줄곧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실제적인 결과를 산출해내는 ‘권력’은 보이질 않고, 권력주변의 이런저런 판단과 우연들이 합쳐지면서 어떤 내부의 컨센서스가 도출되고, 그 컨센서스는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더 잔인하게 현실의 변화를 추동해낸다.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내리게 되는 결론이다. 최초의 근원이 될,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당중앙’은 원작자를 찾기 어려운 문서거나 책임자가 불분명한 ‘의견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영화는 용산참사가 일어나게 된 먼 원인을 이 정부 초기의 강력한 공권력 발동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변죽을 울리고 마는데, 권력의 작동방식이 보이질 않으니 그저 변죽일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MB는 파업과 농성, 시위와 같은 ‘떼법’이 사라지고 법치가 확립되면 GDP가 올라가고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사회의 보수적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이 믿음의 근거없음은 한국경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력한 공권력 행사와 그를 통한 ‘법치’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증적 자료도 근거도 없다. 노동유연성의 강화가 실제로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실제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권력은 오히려 이런 보이지 않는 믿음의 집합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허황한 믿음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체로 자명하다. 언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와 강단의 추상적 이론들에서 연역되었던 논리들, 그 암묵적 믿음을 줄곧 확대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 이 모든 것의 결과들이다. 참으로 견고하여 도무지 깨지지 않는 이 비가시적 권력장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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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7-0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도 개봉못할번 하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개봉했다고 하죠 이런 다큐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근처에는 개봉하는영화관이 없어 dvd나올때까지 기다려여 겠네요 강대국에 음모론이 활개치는 이유가 결국 투명하지 않는 정치정책들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을 숨기므로 인해 권력유지의 도구로 쓰는 북한의 경우 전면적인 정보 통제로 인해 국민을 통제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