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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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의 뒷표지에는 이 책에 실린 단편 ‘서른’의 한 대목이 광고 문구처럼 쓰여 있다. 불문과를 졸업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피라미드 판매조직인 ‘거마 대학생’이 된 주인공이 자기를 따르던 고삐리에게 하는 말이다. 거마대학생은 자신의 후배이자 제자를 다시 거마 대학생으로 끌어들인다. 그녀 역시 선배에 이끌려 피라미드 조직에 왔다. 이 비루한 운명의 사슬은 우리 시대 88만원 세대의 숙명처럼 보인다. 그러니, 피라미드 조직원은 또다른 피라미드 조직원을 낳고, ‘잉여’는 또 다른 ‘잉여’를 사슬처럼 엮고, 비정규직은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이어진다. 비하만의 ‘삼십세’와 최승자의 ‘서른’은 청춘기를 벗어나 삶의 새로운 단계(그것이 희망적이든 비관적이든)에 진입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은 그 성숙으로 가는 길을 애시당초 차단당한 젊음들이다. 이 소설집에서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간 젊은 부부가 등장하는 ‘벌레들’에서처럼, 그들의 삶은 주변부에서 버려진 채 그 자리를 맴도는 것일 뿐. 김애란은 자신이 속한 세대(30대 초반)가 처한 현실과 그들의 운명에 관한 세밀화를 그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피기도 전에 이미 시든 이들 꽃같은 청춘들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가망없는 희망으로 그려져 있다.

 

과연 그렇다. 신입 직원 모집 때마다 나는 우울증이 도진다. 수북히 쌓인 그들의 이력서를 보면서 그들보다 앞선 세대로서 나는 도대체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과 서글픔이 가시지 않았다. 그들 보다 좀 더 앞선 세대이고 좀더 나은 환경 속에 처했다는 이유로 능력 이상의 자리를 보장받은 세대의 위선적 자책일지도 모른다. 그 이력의 내력은 대부분 1-2년짜리 인턴과 계약직이고, 그들이 원서를 내는 자리도 1-2년 짜리 비정규직이니, 이들 세대의 불우한 숙명은 우석훈의 ‘세대착취’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달리 이들에게는 ‘수업시대’가 없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시절 선망했던 ‘오빠’가 비정규직 AD가 되어 그 인연을 근거로 비만 프로그램이 출연자로 비만한 후배를 이용해 먹듯이(‘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정규직이라는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로맨스가 허용될 자리는 없다. 이들의 삶은 탈낭만화된 속화된 질서 속에 놓여 있고, 희망은 언제나 '비정규직'이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청소부인 기옥씨가 등장하는 ‘하루의 축’도 그러한데,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손꼽히는 이 공항의 직원 중 비정규직이 80%에 이른다는 실제의 ‘팩트’ 앞에서는 삶에 대한 연민을 넘어 우리시대의 질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이 공을 들여 그리고 있는 이 세밀화는 적어도 내게는 성공한 셈이다. 그녀가 리얼리스트의 시선으로 우리시대의 문제들과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령 그것이 소설의 상업적 전략이 개입된 것이라 할지라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어설픈 위무와 공허한 수사학이 판을 치는 마당에,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황석영이 개발독재 시대의 삶에 주목했다면, 김애란은 신자유주의 절정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존재의 근원적 고통이거나 멜랑콜리한 감성이거나. 어느 중견 여성 소설가의 그것처럼 그저 가족애만이 살길이라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건강하다.(아, 이런 구태의연한 수사라니!)

 

이 소설을 사무실에 근무하는 20대 여성들에게 “당신들 세대의 이야기”라며 선물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러면 안될 것 같다. 페이스북에 열심히 음식 사진을 올리고, 유튜브로 K 팝스타들의 동영상을 시청하고, 빅토리아 시크릿과 SKⅡ 피테라 에센스에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김애란의 소설 따위가 과연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하루키 소설보다 더 재미없을 것이 분명하고, 아멜리 노통브보다 덜 말랑말랑하니, 읽어내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 읽어보라고 해야 하나. 소설을 통해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내 믿음이야말로 19세기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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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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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동일성은 기억을 통해 유지된다. 과거의 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지금의 나는 없다. ‘기억이라는 상상작용’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으면서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생각한다. 아니, 희미해져가는 옛 기억들을 더듬으며 과거의 나를 돌이키는 수고로움을 견뎌야 했다. 왜 수고로움인가. 하나는 기억의 전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이고, 다음은 돌이킬수록 쓰라린 일들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내 기억의 몽상은 대학가와 신도시, 지방소도시와 세종로 일대를 흘러다녔으나 특정 시점의 강렬한 장면들로만 회억될 뿐, 그 장면의 맥락은 좀처럼 재구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기억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밀어내서인가.

 

이 책부터가 그렇다. 두어 번의 이사를 통해 이 책의 세계사판 초판본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내가 초판본을 갖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것은 문학동네에서 김화영 선생이 새로 낸 2003년판인데, 아마 10여년 저쪽에 내 책꽂이에는 흰색 장정으로 된 세계사판이 같은 출판사의 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 등과 함께 꽂혀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닐 지도 모른다. 며칠 전 한 지인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읽는 순간 이 책의 제목을 떠올렸고, 우연히도 자주 들르던 헌책방에서 이 소설과 우연히 조우했던 것이다. 모디아노의 소설은 <슬픈 빌라>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다.

 

이름이 페드로인지, 아닌지 모를 이 소설의 전직 탐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과거를 잊어버린 이 사내는 자신이 일하던 흥신소에서 퇴역하자마자 과거의 자신을 찾아나선다. 한 장의 사진과 그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얽힌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희미한 기억을 점차 선명한 경험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 과거 사진 속에 찍힌 자신의 모습조차 기억해내지 못하고, 파리한 인연의 끈들을 겨우겨우 찾아내 기억의 퍼즐들을 맞춰가는 이 사내. 그의 추적이 한발자국씩 진전되면서 그는 과거의 기억들을 점차 선명하게 떠올리고, 자신의 애인이었던 ‘드니즈’, 그리고 2차대전 막바지에 스위스 국경을 넘어가려다 실패하고 만 자신과 친구들의 마지막 모습과 비로소 조우한다. 모디아노의 문체는 간결하고 담담하다. 기억이 깜빡거리듯이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도 인과의 사슬이 느슨하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모디아노는 소설을 이런 문장으로 끝내고 있다. 저녁 무렵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는 어린아이는 기억의 존재방식에 대한 유비다. 그런데, 등치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슬픔=우리들의 삶이다. 유년기에 겪었음직한 저녁 무렵의 쓸쓸함과 서글픔은 우리들의 삶속에 어떤 슬픔의 원형질로 남아 있을지언정, 서서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듯이 축축한 안개에 싸인 슬픔의 기억들도 사라지거나, 오랜 회억의 수고로움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바슐라르의 책읽기가 그러했던가. 텍스트의 내용에 육박하기보다 텍스트가 제공하는 이미지와 몽상을 즐기는 것. 텍스트는 독해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몽상의 유발인자인 것. 그러니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내게 기억이라는 몽상을 불러일으키며, 별것도 아닌 이 소설을 읽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글자들은 내 잡념과 몽상으로 인해 붕붕 떠다녔으며, 페드로의 추적에 따라 내 과거의 흔적들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때로 내게 켜켜히 누적된 기억들의 더미가 존재한다는 게 몸서리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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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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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만큼 집요하게 정당에 의한 민주화를 주장해온 사람이 있을까. 문재인의 ‘정당정치’와 안철수의 ‘시민정치’의 결합이 주장되는 마당에, 그의 정당정치론은 어쩌면 정치일반에 대한 혐오와 비판이라는 국민여론을 도외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안철수 현상’은 “노동없는 민주주의 혹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던 한국정당체제의 무기력함”이 낳은 결과이며, 그래서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남겨 놓은 빈공간을 ‘청춘콘서트’가 휘젓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진보학자이자 진보진영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그에게 “독재 회귀”니 “반민주”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추상화되고 도덕화된 담론”일 뿐, 현실의 문제를 돌파해내는 유력한 방법은 못된다. 한국정치에 대한 내 생각은 대부분 최장집에서 빌려왔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도 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한 번도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나는 그 몰래 혼자 그를 사숙하며, 얄팍한 대로 정치와 그것의 가능성을 겨우 가다듬을 수 있었다.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라는 다소 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최장집의 책치고는 매우 얇은 데다 이론중심의 기존 저서와 달리 ‘현장의 목소리’가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이채롭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길>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자생적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의 북부의 탄광지대에 가서 현장의 노동자를 만나고 책을 썼던 내력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는 정치여론조사의 각종 통계와 서구이론가의 책 더미에 묻혀 정작 ‘정치’가 요구되는 현장에 대해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에게 정치는 ‘여의도’와 조중동에나 존재할 뿐, 저자거리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정작 중요한 정치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의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이른바 ‘최장집 민주주의론’의 현실적 진단과 처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겐 아주 유익했다.

 

책 전체의 내용을 아주 거칠고도 거창하게 요약하자면, ‘정치가 우리를 구원한다’ 쯤 될 것 같다. 정치메시아주의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일용직 노동자의 비천한 노동 앞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심각한 현대차에서, 봉제공장과 재래시장에서, 농민과 청년의 현실 앞에서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의 이익을 대표하고, 정치제도 안에서 해결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며, 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윤택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같은 정치의 중심에 바로 정당이 있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이끌었던 재야 시민세력이나 학생운동은 이런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보수기득권 정당 역시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분출하는 요구를 그동안 “수동혁명의 악순환”을 통해 무마시켜 왔을 뿐이다. (박근혜의 ‘경제민주화’는 바로 이 수동혁명의 불안한 전조다)문제의 해결을 회피한 채 수동적이고 개량적인 변화만을 반복해왔던 것이다.

 

최장집은 전에도 그랬듯이 김대중·노무현 두 민주정부에 대해 좌절된 기대를 감추지 않는다. 가령,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한 진단에서 그런 판단은 더욱 두드러진다. “신용불량자 문제는 이른바 개혁적 민주정부들의 대표적 정책실패의 산물이며,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이다. “과거이 국가주도형 산업화가 재벌중심의 구조를 만들어냈듯이, 민주정부하에서 자율적 시장 원리를 통한 국가의 금융정책은 금융자본의 비약적 성장과 이들에 의한 금융지배구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IMF 위기 이후 민주정부들은 극단적 시장중심적 발전방향을 가속화했고, “성장과 시장 효율성의 가치”, 그리고 “노동포섭적 정책과 사회복지적 정책"에서 ”보수적 요소의 강화로 전환하는 퇴행의 궤적“을 보여줬다.

 

최교수가 김대중 정부 초기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국정비전을 만들어냈다거나, 노무현이 대선후보였을 때, 그의 정치적 교사였다는 이력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두 정부 모두 경제관료에 의해 포섭된 허약한 정부였으며 개혁을 뒷받침할 하나의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서 그 ‘무책임성’의 근원을 따져봐야할 지도 모른다. 최장집의 시각에서는 “정당을 통해 통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집권 이후 정당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개혁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간 야당과 진보세력들은 격렬한 언사를 동원해 집권 세력과 보수 세력을 공격하거나, 독재로 회귀하고 있다며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런 태도는 상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얼마나 강한가가 진정한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중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공격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정부를 대신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에 맞게 조직적 능력을 최대화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시민들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공익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선거전략으로서도 더 효과적일 것이다. 추상화되고 도덕화된 반대담론이 강해질수록, 정치의 방법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진지한 정치’는 필요치 않게 된다. 뜨거운 열정의 동원에 몰두하는 정치는 실제의 사회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고, 당연히 내용적으로 더 얄팍해진다.”

 

최장집은 독일 사민당이나 그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공산당 등의 정당모델에서 줄기차게 대안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정당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비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 역시 정당을 배제하거나 약화시키는 방향에서 한국정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개혁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라면, 그 정당이 현실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기반 위에서 정치적 이익을 조직화하고, 계층과 집단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며, 현실정치라는 제도적 공간안에서 이를 실현하는 정치적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안철수의 국회의원 의석수 축소나 탈정당정치적 행보는 그것이 다수 국민들에게 ‘후련함’을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결코 현실적 대안은 되지 못한다. 반정치로 대안정치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민주당이 정당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문재인이나 안철수, 그리고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대표와 당원들이 최장집의 이 책을 열심히 읽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지속불가능하고, “사회경제적 민주화” 없이는 한국사회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철폐” “신자유주의 반대”와 같은 뜬구름 잡는 식의 진보진영의 허망한 구호는 더 이상 보기 싫다. 대처패배 이후에 영국 노동당 강령은 근본주의적 좌파 강령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긴 유서”라는 평가를 들었다. 나는 홍세화의 진보신당이나 주사파 일색인 통합진보당에게서 그 유서의 흔적들을 본다. 최장집은 칠순 나이에 정치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의 민주주의론을 확장하고 심화시키고 있는데, 정작 현실정치에 서식하는 진보정당들은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는 게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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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2-10-3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는 현실이기에, 바깥에서 비판하면서 구호를 외치던 야당이 막상 정권을 잡으면 이 '현실'에서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을 보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모든사이 2012-10-31 13:37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서 '정치적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가 많이 깨닫게 됩니다. 카리스마가 있으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저런 반대세력과 비판세력을 아우르고 포섭해 나가는 능력 말입니다.. 그래야 그 '현실'에 밀리지 않겠지요.
 
새벽 : 김대중 평전
김택근 지음 / 사계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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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동안 김택근이 쓴 김대중 평전 <새벽>을 읽었다. 경향신문 기자출신인 저자는 김대중 자서전의 작가. 40여회가 넘는 구술과 자료를 정리해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 김대중의 삶을 두 권의 책에 정리해낸 저자의 역량에 대한 신뢰도 컸다. 김대중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책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김대중이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87년 단일화 실패와 연이은 두 번의 대선 실패, 정계복귀와 대통령 당선, 남북정상회담 등 대다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후반생은 그 자체로 당대의 한국사였다. 1997년 12월 그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정권교체의 감격을 맛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쓸쓸하고 처연하던 임기 말의 김대중, 내란음모의 ‘수괴’를 아버지로 둔 덕에 반쯤 자폐증으로 살았던 막내 김홍걸의 짠한 삶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택근의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평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저자의 김대중에 대한 경사가 지나쳐,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대중이 우리시대의 한 탁월한 정치인이었겠지만, 그인들 왜 어둡고 습한 그늘이 없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그런 그늘은 좀처럼 보여주질 않는다. 그 그늘은 1997년 구제금융사태 이후 구조화된 신자유주의적 질서(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반하는 시장주의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사회경제적 차원으로 심화되지 못한 민주주의, IT 거품과 카드대란, 부패정치의 지속 등과 같은 김대중 시대의 한계와 문제는 지적되지 않고 있다. 평전으로서는 치명적인 한계이고, 이는 저자의 친디제이 성향이 단단하게 한몫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착잡하고 답답했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책들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우리의 현대사는 왜 그리 너절하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착잡함 말이다. 어느 나라의 역사치고 우여곡절이 아닌 것이 없지만, 기만과 협잡, 조작과 야만이 이토록 조직적이고 뿌리깊게 펼쳐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 야만의 역사 한 가운데에 김대중이 있다.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빨갱이’라는 야만의 수사학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는 6.25 당시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부르주아’ 였음에도 평생 동안 빨갱이라는 누명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5.16 이후의 한국정치사는 강준만의 말을 빌어, ‘김대중 죽이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 성공한 것이 있다면, 김대중 죽이기의 과정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김대중은 아마도 정치적 리더십과 철학, 국제적 안목이 두루 갖춰진 유일한 대통령일 것이다. 박정희는 철학과 국제적 안목에서, 노무현은 정치적 리더십에서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통찰과 혜안에서도 그를 따라갈 수 있는 대통령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근원에는 보수우익의 정치적 욕망과 영남패권주의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은 권모술수의 대가, 거짓말쟁이, 위장된 공산주의자,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레떼르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보자면, 이같은 정치적 수사들은 아무런 실체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눈먼 수사학들이 창궐하고 번식해왔던 것이 한국정치다. 나는 이른바 ‘교수’라는 자들의 입에서도 “디제이가 노벨상 타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했다”는 말이 나올 때 그들의 지적 용렬함에 대해 참담했었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의 삶에서 감동스러운 것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수십년간 그를 지지해왔던 사람들과의 정서적 연대다. 낙선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했다는 말, “호남 사람들이 선거때마다 김대중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당한 푸대접이 하도 서럽고 억울해서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투표한 것입니다”라는 말. 그것은 김대중이기에 가능한 말이거니와 그가 축적해온 ‘역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진단이다. 이것이 박정희에 대한 보수우익의 정서적 일체감과 다른 것은 그것이 ‘패권적 정체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를 계승한 노무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한 것은 바로 노무현에게서 그들 자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계급적 동질성 이전의 정서적 일체감의 문제다. 그 일체감은 패권과 특권 속에서가 아니라 핍박과 설움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정서를 정치적 미성숙이라 비판하거나 계급의식의 약화라고 까대기는 쉬울 것이나, 진보정당의 어느 후보도 그런 정서적 일체감, 아니 나아가 계급적 대표성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김대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 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든지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행동하면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명 문상객 중 10분의 1인 50만 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를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 명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협력을 이루는 모든 조건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2009년 6.15 정상회담 9주년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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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쏘다 - 이헌재가 전하는 대한민국 위기 극복 매뉴얼
이헌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이헌재 전 부총리가 뜨고 있다. 참여정부 시기 경제부총리를 마지막으로 언론에서 사라졌던 그가 안철수의 멘토로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안철수의 출마선언장에 앉은 그의 얼굴은 예전에 봤던 매섭고 냉철한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흰 머리칼에 주름이 여기저기 패여 있는 늙은 관료의 모습이었다. 진보진영에서는 그가 신자유주의자이며 모피아의 대부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안철수의 경제도 결국 모피아가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가 안철수 진영에서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역할을 할 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섣부른 감이 있다. 안철수의 경제=이헌재의 모피아 주도 신자유주의라는 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등식은 설득력이 없다. 나로서는 김상조등이 호들갑을 떠는 게 사실 좀 경박하고 우습다고 생각한다.

 

이헌재의 <위기를 쏘다>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가 참 ‘잘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잘남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그의 명민한 두뇌,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한국경제의 부침과 함께 흥망성쇠를 오가는 그의 삶의 우연성이다. 놀고 책만 보던 고삐리 이헌재는 고교 3학년부터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해 그해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하며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서울대 미대 출신의 부잣집 딸과 만나 무직자인 상태에서 한전 부사장이었던 장인이 몰아 부쳐 결혼을 했다. 직업이 없다고 투덜대는 마누라 때문에 “고시 그까짓 것 하면 되지”하며 5개월 공부해 행정고시 수석합격을 했다. 잘난 인간들만 모이던 재무부에 사무관으로 들어가 5년 만에 경제정책의 핵심부서인 금융정책과장이 됐다. 그리고초임사무관 발령난지 9년 만인 30대 초반에 국장이 됐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직에서 퇴직한 이헌재는 보스턴대 유학, 대우, 한국신용평가, 조세연구원 등에서 낭인 아닌 낭인 생활을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7년 공직에서 물러난지 20년만에 비상경제대책위원장, 금융위원장, 재경부 장관을 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경제부총리를 역임했다. 그가 관료에 복귀할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이 그는 정부와 기업, 대학과 연구원 등 다채로운 경험을 했으며, 그것은 그가 이른바 ‘시장’의 안팎에서 정책과 현장을 두루 꿰뚫어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이 그의 명민함에서 비롯된 개인적 이력이라면,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역시 시장과 정부를 두루 오간 그의 독특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잘나가는 과장이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마침 그의 퇴사 이유가 됐던 율산사태가 터진 것이나, 김우중 대우회장으로부터 신임과 후원을 받은 것, IMF 구제금융 위기 당시 그가 관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 등은 ‘우연성’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타고난 잘난 인간이면서도 운까지 좋은 인간이기도 했다.

 

이 책은 주로 김대중 정부 시절 그가 진두지휘했던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행한 기업구조조정, 은행권 구조개편, 대우몰락의 전후 등의 막전막후가 소설처럼 펼쳐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부총리 경험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만큼 그의 삶에 있어서나 한국경제의 역사에 있어서나 김대중 정부 초기 2-3년은 그 뒤의 한국경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산업화 시대의 한국경제의 ‘기원’이라면, 이헌재의 시대는 그 뒤 신자유주의 한국경제의 또다른 ‘기원’이 될 것이다. 이헌재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그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라면, 그것은 그가 이 시기 만들어놓은 금융질서가 그 이후 한국경제를 좌우하는 원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 질서가 여전히 완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위기를 쏘다>는 그것을 경제학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당시 벌어졌던 사건과 사건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풀어낸다. 이것은 경향각지의 군웅이 할거하여 일합을 겨루는 한국경제판 무협지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화두는 엉뚱하게도 백낙청 선생의 ‘근대와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창비의 명제였다. 이 말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조악하게 ‘디제이노믹스’와 연결되었는데, 그것은 디제이 시기의 개혁이 시장 ‘이전’에 있는 한국경제에 ‘시장질서’를 부여하고, 동시에 그 시장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시장=근대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근대적 시장질서를 세우고(근대 성취), 시장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근대극복)이 김대중 정부 초기의 경제구조개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이헌재는 관료가 가진 힘과 권력으로, 때론 침묵으로, 때론 자신의 멘토였던 김우중을 파산시키는 것으로, 시장에 규율과 질서를 도입했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시장질서에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넘겨주었다.

 

이헌재식 ‘관치경제’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질서와 규율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관치였던 것이다. 진보학자들은 이헌재식 관치를 비판하지만 결국 그것은 구제금융 시기라는 ‘상황논리’에 의해 기각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관치조차도 ‘삼겹살 국장, 배추 과장’식의 MB물가 관리라는 조악한 관치경제와는 애시당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장하준 식의 논리를 빌어, 그의 관치가 결국 경제권력을 ‘시장’에 넘겨주었다는 의미에서 ‘시장에서의 국가 퇴각’을 불러왔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구조개혁의 칼은 국가에서 시장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은행’으로 넘어갔고, 그 연장선에서 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선언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헌재의 내력은 관치경제의 이중성, 그것의 개혁적 의미와 퇴행적 양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실제적 사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론스타의 먹튀 논란으로 주목받은 외환은행의 운명은, 이헌재에 의하면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낳은 부정적 유산이다. 론스타를 비판하기에 앞서 외환은행은 감추어진 거대한 부실, 외자유치가 살길이라는 환상, 정부의 판단착오 등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끼우는 것, 최근 하나은행이 외환은행을 인수했다. 다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이헌재는 자신을 가리켜 “약간 개혁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이며, 시장주의자요, 성장을 중시하는 친기업성향”이라고 규정한다. 맞다. 이헌재로 상징되는 경제의 앙시앙 레짐은 이제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는 또 있다. 모피아로 상징되는 이른바 경제관료들의 폐쇄적 네트워크. 이헌재의 멘토는 박정희 시대의 서강학파 남덕우 전 총리, 유신시대의 김용환 재무부 장관, 그리고 김우중 대우 회장이다. 김우중을 뺀다면 죄다 산업화 시대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모피아들의 대부들이고, 그들과 ‘이헌재 사단’이 지금까지도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가령, 김석동 금융위원장) 그런데, 사실 이 ‘사단’은 별 내용이 없는 수사학적 과장에 불과한 것 같다. 개별개별의 특정한 인물군들의 패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경제관료 집단이 존재하고, 그 집단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신념체계가 문제일 것이다. 이헌재 본인은 이른바 ‘이헌재 사단’을 부인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고 이헌재로 대변되는 경제관료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대체 그들이 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시장주의적 신념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그의 판단과 논리는 보이지만, 굳이 하이에크, 레오 스트라우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신념을 형성하고 강화해주었던 철학과 사상, 경제이론은 보이질 않는다. ‘현장’에서 몸을 쓰며 배운 ‘기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비그포르스 같은 인물과 비교해 보건대, 이헌재는 그 명민한 머리로, 구조조정의 칼을 휘둘렀을지언정, 구조개혁의 철학과 논리를 다듬거나 정리해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비약하자면, 모피아들의 경제에는 ‘철학의 빈곤’이 내재하는 것이다. 질나쁜 관치경제의 대증요법만이 남은 지금의 경제관리도 그런 데서 비롯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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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s043 2012-10-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계획치않았는데 다 읽었네요. 피곤하고 졸려요 ㅠㅠ

모든사이 2012-10-01 15:50   좋아요 0 | URL
현실이 확실히 소설보다 드라마틱한 듯...그만큼 재밌었단 얘기? 새벽까지 니체를 보진 못할테니 재미는 확실히 독일철학자보다나은 모양이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