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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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동일성은 기억을 통해 유지된다. 과거의 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지금의 나는 없다. ‘기억이라는 상상작용’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으면서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생각한다. 아니, 희미해져가는 옛 기억들을 더듬으며 과거의 나를 돌이키는 수고로움을 견뎌야 했다. 왜 수고로움인가. 하나는 기억의 전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이고, 다음은 돌이킬수록 쓰라린 일들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내 기억의 몽상은 대학가와 신도시, 지방소도시와 세종로 일대를 흘러다녔으나 특정 시점의 강렬한 장면들로만 회억될 뿐, 그 장면의 맥락은 좀처럼 재구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기억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밀어내서인가.

 

이 책부터가 그렇다. 두어 번의 이사를 통해 이 책의 세계사판 초판본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내가 초판본을 갖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것은 문학동네에서 김화영 선생이 새로 낸 2003년판인데, 아마 10여년 저쪽에 내 책꽂이에는 흰색 장정으로 된 세계사판이 같은 출판사의 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 등과 함께 꽂혀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닐 지도 모른다. 며칠 전 한 지인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읽는 순간 이 책의 제목을 떠올렸고, 우연히도 자주 들르던 헌책방에서 이 소설과 우연히 조우했던 것이다. 모디아노의 소설은 <슬픈 빌라>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다.

 

이름이 페드로인지, 아닌지 모를 이 소설의 전직 탐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과거를 잊어버린 이 사내는 자신이 일하던 흥신소에서 퇴역하자마자 과거의 자신을 찾아나선다. 한 장의 사진과 그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얽힌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희미한 기억을 점차 선명한 경험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 과거 사진 속에 찍힌 자신의 모습조차 기억해내지 못하고, 파리한 인연의 끈들을 겨우겨우 찾아내 기억의 퍼즐들을 맞춰가는 이 사내. 그의 추적이 한발자국씩 진전되면서 그는 과거의 기억들을 점차 선명하게 떠올리고, 자신의 애인이었던 ‘드니즈’, 그리고 2차대전 막바지에 스위스 국경을 넘어가려다 실패하고 만 자신과 친구들의 마지막 모습과 비로소 조우한다. 모디아노의 문체는 간결하고 담담하다. 기억이 깜빡거리듯이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도 인과의 사슬이 느슨하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모디아노는 소설을 이런 문장으로 끝내고 있다. 저녁 무렵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는 어린아이는 기억의 존재방식에 대한 유비다. 그런데, 등치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슬픔=우리들의 삶이다. 유년기에 겪었음직한 저녁 무렵의 쓸쓸함과 서글픔은 우리들의 삶속에 어떤 슬픔의 원형질로 남아 있을지언정, 서서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듯이 축축한 안개에 싸인 슬픔의 기억들도 사라지거나, 오랜 회억의 수고로움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바슐라르의 책읽기가 그러했던가. 텍스트의 내용에 육박하기보다 텍스트가 제공하는 이미지와 몽상을 즐기는 것. 텍스트는 독해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몽상의 유발인자인 것. 그러니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내게 기억이라는 몽상을 불러일으키며, 별것도 아닌 이 소설을 읽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글자들은 내 잡념과 몽상으로 인해 붕붕 떠다녔으며, 페드로의 추적에 따라 내 과거의 흔적들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때로 내게 켜켜히 누적된 기억들의 더미가 존재한다는 게 몸서리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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