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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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을 읽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최장집의 제자이자 에피고넨을 자처하는 소장 정치학자다. 최장집의 정당론, 민주주의론, 한국정치에 대한 생각 등이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이 얇은 책에서 스승의 그림자는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책은 박상훈이 진보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했던 강의를 정리한 것이자, “진보에게 말걸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회의 진보적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진보 ‘안쪽에’ 있지만, 막스 베버와 같이 전통적으로 보수적으로 분류되었던 이론가들을 끌어들여 진보 ‘밖의’ 시각을 도입해 진보정치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을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한겨레 지면에서 벌어진 진중권(2.28)과 김규항(2.9)의 논쟁을 보게 되었다. B급 좌파임을 자처하는 김규항은 조국이나 오연호와 같은 “중산층 엘리트”들이 진보를 전유하는 것을 못 마땅해 한다. 스스로를 진짜 진보라고 생각하는 그는 대단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진보를 전유하고, 그가 설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담론과 사람들은 개량주의로 치부하는 듯하다. 진중권은 예의 그 신랄한 태도로 김규항을 비판하는데, 그의 레떼르 붙이기는 “철인 좌파의 딱지치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이다. 말하자면, 진중권은 척박한 진보정치의 토양위에서 연합정치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반면, 김규항은 매우 엄격한 잣대로 그것은 진보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보여주는 시각은 김규항이 아니라 진중권의 시각이다. 박상훈의 주장은 “과도한 확신과 비타협적 이상주의는 비정치적 사고의 산물일 때가 많으며, 결국 현실의 복잡함과 갈등 속에서 성과를 일궈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비난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운동과 이념의 논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고 역사발전에 대해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하고 공격적이다”라는 것이다. 박상훈의 이 책은 진보가 ‘정치’를 외면해 왔음을, 진보가 해온 것은 스스로 진리의 담지자임을 자임한 채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노력들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정치 ‘이전’의 행태라고 비판한다. 나는 박상훈의 논리에, 따라서 진중권의 논리에도 수긍하고 찬성하는 편이다.

박상훈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적인 부작용의 가능성 내지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는 도덕적 선의 세계는 아닐 지라도, 그날그날의 일상적 실천을 통하여 선의 세계로 나아가는 행위일 것이다. 정치가 도덕적이지 않다하여 정치 그 자체를 부정하고 反정치로 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 외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베버)

마르크스주의는 한국사회에서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고, 현실로서 작동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이데올로기’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는 규준이거나 이념형을 제공할 뿐이지 현실의 질서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상당수 좌파들은 근본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힌 채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구조’로 돌려버리는 허무주의적인 환원론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노동해방’이니 ‘인간해방’이니 하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담론들이고, 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내 눈앞의 ‘사장님’과 싸워야 하는 것인지,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담론 속에는 “정치가 없다.”

김규항은 B급 좌파로서 “좀 더 왼쪽에서” 서 있으며, 비판적 지지론이나 연합정치론과 같은 개혁주의적 시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형적 비판에 치중하고 있는데, ‘담론상’으로 그를 지지할 수 있다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를 지지하긴 어렵다. 그도 어린이 교양잡지인 <고래가 그랬어>를 팔아먹어야 하는 출판자본의 일원이고, 과거에도 <영화언어>와 같은 책을 만들어 팔았던 전력이 있으니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란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 시각과 차이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접하는 장이기에 불가피하게 그것은 “정치적 경쟁”의 과정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신학적 세계에서는 불가침의 신적 영역이 존재하겠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독점되는 세계는 없다. 이 책에서 줄곧 박상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런 정치의 속성이다.

다시한번 역사를 따져봐야 할 문제겠으나, 레닌이 그토록 조롱했던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의 ‘수정주의 노선’이 과연 “배신자”로 비판받아야할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혁명의 시대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의 시대/정치의 세계에서는 불가피한 수정이 존재하며, 수정 그 자체가 아니라, 수정의 내용이 문제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맹신하는 사람들, 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민중의 힘을 운운하는 사람들(어쩌면 최장집의 ‘차가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밀양의 고등학교 선생 이계삼 같은 사람까지도), 추상적 담론의 포로이자 스스로가 만든 ‘게토’속에 함몰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매체인 레디앙이나 진보신당 게시판 같은 데에는 이런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정당을 필요로 하고, 그 좋은 정당은 한 사회내의 이익갈등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대표할 때 가능하다는 최/박 두 사람의 주장을 나는 신뢰한다. 촛불로 표현되는 ‘거리의 정치’는 열망과 실망의 주기적 반복을 통해 정치적 패배주의만을 양산할 뿐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 ‘국가란 부르주아의 정치위원회’라는 식의 규정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북한 지도부만큼이나 한국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근거없는 과도한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이라니. 국가는 공공성의 최후 보루로서 개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타도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이 책에서 또하나 새겨 들어야할 대목은 진보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가진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다. 진보진영에서 작은 정치적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들은 많은 경우 험악한 비난으로 끝이 난다. (내가 레디앙의 댓글들을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인 것처럼 비난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이니, 거기서 연대의 정치니, 연합정치니 하는 것은 애시당초 기대할 게 못된다. 윤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거 구 주사파에서 제기된 ‘품성론’이라는 도덕적 환원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없지 않겠으나, 세련되고 품위있는 진보정치인이 잘 눈에 띄이지 않는다는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거론하는 오바마의 연설이나 미국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와 관련된 대목은 두고두고 읽어볼 만하다.

“정치적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무지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 진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의 존중,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 등을 내용으로 한다. 그 기초 위에서 진보가 진보다워야 할 것이다. 진보적인 것을 위해 정치를 부정하면 안된다. 진보는 지금보다 더 그리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할 것이다.”(174쪽)

그런데, 박상훈에게 이 책의 후속작으로 ‘보수에게 말걸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진보는 말귀라도 통하지만, 보수는(특히 가스통 보수는) 말귀도 안 통하니,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만, 제발 누구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불확실하며, 무지의 가능성도 있고, 이념과 가치가 다원적이며,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초보적 상식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을까. 기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비판하고 있는 “반정치”의 태도는 진보가 만들었다기보다, 해방이후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보수정치”가 만들어낸 유산이 아니던가.  

또하나, 진보적 사회학자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어떤 분은 어느 정권을 비판하면서 정치가로서의 덕목은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은 박상훈의 논지와 통하는 데가 있다. 선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과 손잡고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설파했던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의 향방이 궁금하다. '선의'는 빠져 있고, '마키아벨리즘'만 남은 것은 아닌지? 아니 그 마키아벨리즘 조차도 최악의 것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조차도 아니라면, 선의도 사라지고, 마키아벨리즘의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퇴행만을 반복한 것은 아닌지, '국가몰락'이라는 '신화'를 비판하며, 유능한 국가를 세우리라 다짐했던 그의 요즘 생각은, 과연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다.
 

PS. 여기 인용된 군주론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라 남겨둔다. “운명은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 아무런 힘도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할 수 있는 제방이나 둑이 없는 곳을 덮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녀를 얻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하다. 운명은 여신이므로 그녀는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린다. 젊은 사람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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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매번 그냥 가다가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모든사이 2011-03-0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아렌트 젊을 적 사진이군요..

두괴즐 2011-08-0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것에 전적으로 기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저의 지향점을 구체화 할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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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꼭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어리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가사에 나오는 ‘물새’를 예의 그 경상도 사투리로 “물섀”라고 발음했다. 그의 사투리로 인해 같은 영남 사투리라고 해도 고장마다 각각 제 빛깔이 있고, 조금씩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이라고 하면 바닷가 언저리에 있어야 비로소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아우라가 생긴다는 느낌도 갖게 됐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백화가 그토록 가려 하는 고향도 ‘포구’였고,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곳도 지중해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이 아니었던가.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으면서, 비록 내 고향은 바닷가가 아니지만, 만약 이 팍팍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낙향’한다면, 그곳은 아마 바닷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요즘 들어 자주 찾는 동네의 조그만 단골 서점에 갔더니, 작년 9월에 나온 이 책이 신간 코너에 꽂혀 있었던 것. 도대체 미어터지도록 밥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간직한 터에, 이 책의 제목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물론 마음의 허기를 채울 마음의 양식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배고파 허기가 질 때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라는, 그러니까 배고프면 밥 먹어라, 그것도 바다낚시로 물고기 잡아먹으면 좋더라, 라는 책이었다. 읽고 났더니 마음의 허기가 가시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이어서, 퇴근 하는 동료 몇을 꼬셔 술을 마시러 갔다. 여기는 저자가 사는 거문도도 아니니 생선회는 어림도 없고, 겨우 모듬순대와 소주일 수밖에.

작가 한창훈의 작품은 몇 개의 단편, 그리고 읽다만 <홍합> 정도 밖에 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저널에 연재되는 글을 통하여 대전 언저리 어딘가에 살았다거나, 고향인 여수 근처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으며 글을 쓴다는 정도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은 푹 익어 곰삭은 맛을 풍기기는 해도 트렌디한 맛은 없는 경우가 많다. 임영태니, 유용주니, 공선옥과 같은 작가들 말이다. 동시에 이런 작가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살아온 핍진한 삶의 내력이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 살다보니 글이 되고, 겪어보니 소설이 되는 것. 한창훈의 이 책도 그러했다.

이 책을 기존의 분류틀로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디딤돌 삼아 자신이 아는 바다 먹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줄줄이 풀어내는데, 에세이이기도 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요긴한 정보를 담은 실용서이기도 하다. 곳곳에 펼쳐진 사연들은 손바닥 장(掌)자 쓰는 장편(掌篇) 소설같기도 하다. 부제로 쓰인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는 정말 잘 뽑은 제목인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갈치, 삼치, 문어, 고등어, 홍합, 날치, 김, 붕장어, 성게, 우럭 등등이 밥상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 고기와 해산물들이 대개 밥이 아니라 술을 부르는 안주감이라는 점에서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라고 슬쩍 부제를 고쳐도 무방하리라.

한창훈은 스스로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고 있다.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기업형/상업형 어부’가 아니라, 제 밥상위의 먹을거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농촌식 용어로 바꾸면 ‘텃밭 농사꾼’ 정도가 될 듯 한데, 그의 텃밭은 거문도 주변의 그 너른 바다라는 게 다르다면 다를 것. 나는 그의 ‘텃밭’이 부러웠고, 그 비싸다는 참돔, 감성돔에서 삼치, 고등어, 때로는 모자반이나 톳같은 해조류도 씨억씨억 잘 잡아내는 그의 재주에도 질투가 났다. 일곱 살 때부터 두뼘 짜리 막대기 낚시대에 돌멩이를 매달고 낚시를 해온 그이니, 재주없는 나로서는 다만 부러워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다생물들의 내력을 알고 나면 적어도 횟집에서의 술자리 ‘말[言] 안주꺼리’는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 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갈치의 비늘은 립스틱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숭어’는 송어의 잘못이다.(그런가, 이제 알았네) △낚시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기 좋은 것은 가족이 와서 아빠기 회 떠먹이는 모습이다. 모름지기 애비란 먹을 것을 물어오는 존재이다.(저 가련한 수컷-애비의 운명!) △군소가 많이 나는 해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바람과 생물의 저 깊고 깊은 운명적 링크) △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분향소의 흰 국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위에 올렸단다.(그러면, 삼겹살 옆에 놓인 상추는 돼지의 운명의 비는 것?) △포장마차 따끈한 홍합 국물에 소주 한잔은 추운 겨울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양식한 것이다.(그렇군, 자연산 홍합은 ‘담채’라는군) 붉은 게 홍합 암컷이고, 흰 것은 수컷, 암컷이 더 맛있다. △봄철 어미 망상어를 잡으면 임산부처럼 배가 볼록하다. 꼬물꼬물한 새끼들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생선도 뱃속에서 아이들을 키워 내보내는 구나) △날치는 가장 멀리 갈 때는 3~400미터 날아가기도 한다.(아, 푸른 바다 위를 떼지어 날아가는 ‘날치’들의 경쾌한 활강을 상상해보라)

△(자연산 김 값을) 깎지 말자.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면 눈물 난다.(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들치고,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풍천은 지명이 아니라 바람이 들어오는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이제, 고창 선운사 앞의 그 숱한 풍천장어집들을 다시봐야 겠구만) △아는 만큼만 먹을 수 있다.(유홍준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제 알아야 먹기도 하는군) △(학꽁치) 이녀석들이 몰려오면 겨울바다는 은비녀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변하고 객바위나 방파제는 아연활기를 띈다. 마을 영감님도, 환갑 다되어 가는 노총각도, 어린학생도 와서 낚는다.(학꽁치떼 몰려드는 바닷가에서 긴 뜰채로 꽁치를 잡는 저 풍경이라니!) △(낚시 밑밥용으로 남극의) 크릴 새우가 약 80% 사라졌단다. 이거 펭귄 밥이다.(온대지방의 낚시꾼들 때문에 남극 펭귄이 굶어죽어가는 이 글로벌한 세상)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은 독중의 독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래서 더 쎈 독이 약한 독을 물리친다. 복어가 해장에 좋은 이유) △광어와 도다리, 우도좌광, 좌도우광(이 놈들은 보이는 쪽에 따라 눈알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있는 모양)

이 책은 각 장마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의 관련 대목을 인용해 놓았는데, 실학의 자장안에서 공부했던 손암선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인어’(人魚)를 묘사해 놓은 부분이 재밌다. “모양은 사람을 닮았다. 역어는 바닷 속 인어로서 눈썹 귀 입 코 손 손톱 머리를 다 갖추고 있으며 살갗이 옥처럼 희고 비늘이 없고 꼬리가 가늘다. <술이기>에 이르기를, 교인(鮫人, 인어)은 물고기와 같으나 물속에서 옷을 버리지 않고 눈이 있어 곧잘 우는데,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구라 잘 치기로 유명해 황당한 구라 모음집인 <산해경>을 냈다지만, 이런 산해경스러운 실학자의 설명은 뜨악하다. 당시로선 절해고도였을 흑산도에서 역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용을 생각하는 와중에 떠올리는 실학자 정약전의 인어 생각이라니. 아마 외로움이 불러낸 허깨비였을 터인데, 그런 상상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버텼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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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어와 숭어가 발음만 비슷하지 전혀 다른 어종인데 아직까지 슈베르트의 숭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이른바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짓말 때문이지요.국내에서 잡히는 송어 중 무지개 송어가 외래종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소는 생김새가 괴상해서 식용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사이 2011-02-14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군소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거 같다는..ㅎㅎ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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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쓴 <내 젊은 날의 숲>을 한 달 째 가방에 넣고 다니다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서사의 골격이 그리 튼실하지 않은 그의 소설은 띄엄띄엄 읽어도 좋고, 중간에 서사의 흐름을 까먹어도 읽기의 흐름이 방해받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훈은 더 이상 장편소설을 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그는, 드넓은 채마밭을 어떤 기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호미 한 자루로 일구고 있는 가난한 농부다. 그에게 어울리는 경작지는 뒤꼍의 작은 텃밭이지 너른 들판이 아니다. 생래적으로 단편의 호흡인, 단편의 문장을 가진 그가 부실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문장의 힘만으로 장편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걸 읽어내는 독자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김훈이 고유의 문장을 만들어낸 보기 드문 소설가인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저 먼 옛날의 <문학기행>으로부터 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김훈의 문장을 오랫동안 보아 온 셈인데, 이젠 좀 지겹다. 이 ‘지겨움’은 그의 문장이 실어나르는 ‘숙명적 현실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라 할만한 김훈식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한 관찰력과 세심한 독해력으로 풍경의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니 본래 풍경의 안쪽으로 스미고자 하는 관찰자의 시도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허무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안으로 스미지도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지도 못할 때, 그에게 남은 길은 이 엄정한 우주만물의 질서를 숙명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 그는 가진 것이 닳고 닳은 한자루 호미 밖에 없으므로, 뙤약볕에도, 눈보라에도 제 목숨의 연명을 위하여 땅을 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쓰럽다기보다는 엄중한 삶의 리얼리즘이므로, 차라리 엄숙하다.

김훈이 “사내의 할 일이란 모름지기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혹자는 그의 남근주의를 탓하고 성별분업의 차별적 질서를 옹호한다라며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김훈에게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한 개별자가 운명적으로 감당해 내야할 삶의 몫은 그날 하루 식구들의 입으로 넘어갈 ‘밥’을 만드는 일이며, 그 밥을 목으로 넘길 때의 비릿한 질감을 맛볼 때, 그 삶의 리얼리즘은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적 일상성이 된다. 자신에게 부과된 목숨의 값을 맨 몸으로 버텨내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김훈식의 인생론. 어떤 초월의 의지에도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목소리에도 현혹되지 않는 이런 시각. 개발바닥의 굳은 살을 만지며, 그 개가 맨발로 버텨왔을 삶의 리얼리즘에 경의를 표하는 것. 이런 인식은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어반복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세속적 트임의 각성도 던져주지 못하며, 아유, 정말 지겹다. <내 젊은 날의 숲> 어딜 펴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김훈식의 문장과 만난다.

“강은 자유사행으로 남류했다. 강이 지평선을 넘어올 때, 먼 상류쪽에 저녁 햇살이 닿으면 강은 수면위로 붉은 노을을 이끌고 저무는 고원을 건너왔다. 강은 비무장 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서쪽으로 굽이쳤고, 그 굽이의 언저리에서 일어서는 산맥을 따라서 동부전선은 잇달린 봉우리들을 넘어갔다.” “두루미들은 갑자기 외마다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두루미들의 비명소리는 탁했고, 속이 비어서 들판의 저쪽 가장자리에까지 닿았다. 가까이서 울부짖는 두루미 소리도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들은 작은 불결이나 훼손도 묵과하지 않았다.” “그 닮은 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이런 식의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다. 그건 <자전거 여행>이거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같은 김훈의 다른 에세이보다 더 버겁게 읽힌다. 이미 산문에서 충분히 말해진 담론을 굳이 소설로 반복해야 하나.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남한산성>이 그나마 읽히는 까닭은, 이들 소설에는 ‘서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서사는 김훈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김훈의 빈곤한 서사적 상상력을 대신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그나마 읽을 만 했던 것은 그의 세심한 주의력과 관찰력이 ‘풍경’을 향할 때다. 자등령 언저리의 숲을 묘사하거나, 휴전선 부근의 풍경을 말할 때 김훈의 문장은 시적으로 빛난다. 시적이므로, 시간성은 실종되어 없고, 그러니 시간성을 원리로 하는 서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래 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외부의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개별자의 ‘상처’를 더듬어나가던 에세이스트가 아니었던가. 그가 풍경을 바라보고, 짧은 김훈식 문장으로 써내려갈 때, 풍경과 더불어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도드라지지 않고 풍경과 더불어 있다. 김훈에게 ‘인간’은 오롯한 존재가 아니라, 저 자연적 질서가 만들어낸 풍경의 일부이면서 풍경 그 자체이기도 하므로.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김훈도 이런 책을 써서 가계에 보탬을 도모할 만큼 궁핍하지도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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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안녕하세요 심혜리입니다~ 잘 지내시죠?
김훈의 이 책은 저도 읽으면서 '김훈의 바운더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지만,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어쩐지 겹쳐지는 점들(스물 아홉, 아빠의 죽음, 방황..)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좀 애틋하게 읽었습니다.
참,, 며칠전에 아빠 1주기에 맞춰 창비에서 유고시집이 나와서요,, 선배께도 한권 드리고 싶은데.. 조만간 만나게 되면 드릴게요.ㅎㅎ 곧 뵈어요~^^

모든사이 2011-02-1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네. 혜리씨. 원래 책 리뷰라는 건 칭찬과 주례사로 이뤄져야 마땅한데 이런 식으로 쓰니 잘 알지도 못하는 김훈선생께 미안하네..ㅎㅎ 심호택 선생의 시집이라니, 나야 고맙지 아주..더구나 '따님'이 주는 책이니..

프리즘 2011-09-2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점점 정형화되어가는 김훈님의 글이 조금은 안타까웠죠...
 
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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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어곡(別於谷)은 강원도 정선 부근의 간이역이다. 2005년 3월 21일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된 뒤, 2009년 8월 민둥산 억새 전시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라고 임철우는 쓰고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 역은, 간이역이 풍기는 쓸쓸한 낭만과 서러운 삶을 그대로 온축하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는 이 역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유전을 같은 이름의 소설로 써냈다.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 지성사) 제목 그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별을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술술 잘 읽히고 등장인물들이 살아온 내력은 가슴시리다. 잘 쓴 소설이겠으나  내러티브의 밀도는 촘촘하지 않고 짓다만 건축물처럼 어딘지 허술하다.

임철우의 소설을 읽은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아버지의 땅>이니 <달빛 밟기>, <그 섬에 가고 싶다>같은 소설들. 그가 가장 공들여 썼다는 <봄날>은 아직 보지 않았다. 임철우의 예전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이 소설에서도 ‘역사의 서정화, 혹은 서정의 역사화’쯤으로 해석할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서정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방식 말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은 하나의 개별적 존재이되, 어느 날 닥쳐온 역사의 광기를 홀로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개인에게 부과된 역사의 무게는 전쟁(6․25)이거나 광주학살이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기차와 시골 간이역이 뿜어내는 향수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루한 시와 소설의 전통 속에서 기차와 역은 늘 그런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눈 내리는 날 시골 간이역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에서 전형적일 것이다. 가난과 궁핍에 젖은 사람들이 대합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있는 모습.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사평역에서) 귀성열차를 탈 때마다 이 시구를 얼마나 자주 되뇌었던가. 내 손에 굴비와 사과가 없더라도 귀향의 내면은 언제나 상처와 얼룩들로 그득했었다.

귀향 열차에는 기형도의 ‘조치원’에 등장함직한 사내들도 언제나 쿨럭거리고 앉아 있었다.“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의심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조치원) 조치원 역의 그 허름한 역사에서 내려 버스를 탈 때마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을 한 채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이는 사내들을 만나고, 그들이 “크고 검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역사를 빠져나가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서울살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인 사내들. 내가 아는 그 사내들은 성수동 마찌꼬바에서 손가락이 뭉개져 귀향하거나, 지하철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기차가 모더니티를 상징한다면, 곽재구나 기형도, 그리고 임철우가 보여주는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더니티가 부과하는 폭력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와 얼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차 그리고 역사(驛舍)는 한국적 모더니티의 슬픈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것은 시골 소읍의 기차역에서 간호사로 취직이 되어 떠나는 큰 딸을 떠나보냈던 순간이었다(고 형은 내게 말했다.) 기차는 스물을 넘긴 처녀를 싣고 한국 모더니즘의 집약체인 도시로 내달릴 것이다. 제 품의 자식을 저 거친 대처로 내보내는 부성의 내면은 눈물범벅이었을 것이다. 말없이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사내를 꽁무니에 달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내면은 한국적 모더니티가 부과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

기차가 모더니티의 빠른 질주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의 ‘물결’에 있을 것이다. 기차는 선으로 뻗으면서 면으로 확장한다. 비행기와 선박이 점에서 점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기차는 철로와 철로를 둘러싼 지역을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모더니티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선박과 비행기는 이차원적인 연결이 없어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연결될 따름이다. 일본의 만주정복을 앞장서 이끌었던 만철은 일제의 싱크탱크이자 불모의 땅 만주에 모더니티의 신세계를 열어 젖혔다.(만철, 고바야시 히데오) 기차가 가는 어디든 이런 ‘근대의 질주’가 벌어졌는데(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그럼 초고속 열차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상징일 것인가.

질주하는 기차의 모더니티는 홀로 선 근대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기차와 역사 주변을 다룬 시와 소설들에 등장하는 개인들이 한결같이 상처와 얼룩으로 번들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임철우의 이 소설에서처럼, 퇴락한 시골 역사에서 시를 쓰는 젊은 시인이거나,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늙은 역무원이거나, 위안부로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들어온 노파이거나, 유년의 트라우마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중년 아낙이거나 죄다 기차와 역사 주변에 살아갈 인물들로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어쩌면 기차가 주는 사비유(死比喩)적 인물들과 내러티브 때문에 이 책이 덜 재미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골의 간이역은 퇴행성 낭만주의에나 어울릴 법한 배경이고, 개인이 감당하는 역사적 상처도 한국소설에서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다. 임철우의 서정의 역사화, 역사의 서정화는 그리 성공적이질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절 집중해서 읽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이 소설을 후다닥 읽고도 못내 영 찜찜했던 것은 낭만이 끝간 데까지 간 것도 아니고, 낭만이 거세된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낭만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촌기차역은 밀리오레라는 거대한 쇼핑몰 한구석에 옛모습 그대로 처박혀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거대 쇼핑몰에 짓눌린 옛시절의 신촌역사는 낭만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임철우의 퇴행성 낭만주의가 꼭 그 짝이다. 그래도 주말 하루를 보내게 한 소설인데, 너무 혹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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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가 틀렸다 패러독스 4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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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에르 바야르는 움베르토 에코보다 재기나 유머감각에서 훨씬 아랫길이다. 에코가 보여주는 풍자와 비아냥에 비하자면 너무 진지한 편이다. 그럼에도 서구 인문학의 계보와 이론을 종횡하며 독자를 기죽이는 다른 이론가들보다야 더 유쾌하고 발랄하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를 읽고 느낀 생각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되풀이 읽어야 겨우 해득할 수 있는 책과 아무 생각없이 그저 낄낄대며 읽어가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책이겠다. 인문학 독서에 맛을 들인 독자가 지하철에서 ‘치매방지용'으로 읽기에 딱 좋다. 충분히 지적이면서도 아주 잘 읽힌다. 적당히 사유를 부추기면서 읽는 재미도 함께 주는 책이다. 가격과 부피, 심지어 활자가 인쇄된 종이의 재활용 종이 재질까지도 이런 평가에 딱 알맞다.

이런 책들은 내 경우에 ‘대가의 외도’ 쯤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쓴 ‘재즈’에 관한 책,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영림카디널)이거나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범죄소설 비평서 <즐거운 살인>(이후) 같은 경우다. 자신들이 기초하고 있는 이론적 토대를 의외의 분야에 적용하면서 매니어로서의 취향과 결을 보여주는 책 말이다. 경제학 책만 쓰는 경제학자, 문학비평서만 내는 평론가, 정치학 책만 내는 정치학자,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인간적 매력이 없다. 김우창 선생이 동양화를 분석하거나(<풍경과 마음>), 김현이 만화에 대해 쓸 때(<김현 예술기행>), 나는 그들의 읽기의 폭과 깊이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바야르의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이어 두 번째인데, 이 책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홈즈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은 책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문학평론가인데, 역시 비평가들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호사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것도 모자라, 거기 나오는 탐정의 추리가 왜, 어떻게 틀렸는지 시시콜콜하게 따지며 책 한권을 쓰고 있다니 말이다. 추리소설이 소설일진대, ‘미학적 비평’을 넘어서 허구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고전문학 전공 교수가 홍길동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나머지 “홍길동은 살아 있다”라며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쓴 적이 있었다.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 사이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인 셈이다. 허구와 실재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그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 이거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까?

물론, 바야르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는 시각을 ‘분리주의’로,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을 ‘통합주의’로 부르고 있다. 바야르는 후자다. 그는 “허구와 실재 사이의 높은 투과성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어떤 허구 세계에 어느 정도 긴 시간 동안 살게 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뿐 아니라 이 세계의 주민 역시 때때로 우리 세계와 와서 산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거리에서 책 밖으로 걸어 나온 돈키호테를 만날 수도 있으며, 교외의 산책길에서 보봐르 부인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모스크바 역에서 안나 카레리나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한발 더 나아가 “문학작품의 인물들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고 그 세계와 우리 세계를 오가는 데도 어떤 자율성을 누린다고 믿는 신념”에까지 이른다. 셜록 홈즈는 그를 창조한 코난 도일의 손에서 벗어나 작가를 배반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가발전 하여 작가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는 생각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자답게 셜록 홈즈를 죽이고 나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코난 도일의 욕망과 무의식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코난 도일은 “내가 홈즈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며 홈즈와의 정신적 공생이 주는 불안을 토로한다. 피그말리온 신화처럼, 작가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질투를 느끼기도 하며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텍스트와 실재를 혼동하는 이런 태도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바야르는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책 속에 갇혀 있다고 상상하는 건 위험한 허상이다. 홈즈의 예와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괴롭히는 방식은 인물들이 가진 자율성이 어떤 순간에는 우리 세계로 건너와서 우리와 더불어 조화롭게 지내거나 우리의 실존을 깊이 뒤흔들어 놓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진짜 환상적 차원은 다트무어 황무지를 공포로 사로잡는 무시무시한 개보다는 작가와 독자가 문학작품 속 인물과 맺는 관계에 있다. 책의 마력을 텍스트에만 한정하는 것은 허상이다. 텍스트란 책을 가까이하는 위험을 무릅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모은 집합의 핵심일 뿐이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텍스트를 접할 때 인식하게 되는 어떤 ‘심리적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홈즈의 활약에 열광하기도 하며 범죄자를 증오하기도 한다. 텍스트를 읽는 순간은 지금 여기의 ‘나’를 잠시 잊고, 텍스트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아니며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 대한 사랑도 역시 심리적 실재이며 내면의 진실일진대, 가시성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체제’ 속에 사는 거주민들이며 그 세계 바깥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셜록 홈즈가 뭐가 틀렸다는 건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범인은 유산상속을 노린 스테플턴이며 그는 바스커빌가의 전설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황무지의 늪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홈즈의 추리는 거기서 그친다. 그러나, 바야르는 이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구성하면서 범인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 베릴이라고 주장한다. 코난 도일은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하여 소설을 써 내려 갔지만 텍스트는 그의 의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여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베릴이 범인임을 밝혀 나가는 바야르의 추론과 근거들은 작가의 서술보다 오히려 더 치밀하다. “무기도 협박도 상처를 주는 말도 없는 살인, 희생자가 다른 인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스스로 죽는 살인, 범죄 역사상 이보다 더 멋진 성공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진짜 범인인 베릴은 남편인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작가 코난 도일과 홈즈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면서 가장 성공적으로 완전범죄를 성취해냈다. 텍스트는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써내려가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길을 간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실재 세계와 허구 세계 사이를 거침없이 돌아다닌다는 우리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허구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돌아다니는 일도 있다고, 문학 세계도 우리네 세계처럼 유령들로 가득하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광화문 한복판에서 애련에 몸살을 앓는 안나 카레리나를 만난들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21세기 디지털 TV에서 온갖 돈키호테들을 만난다하더라도 눈 비빌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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