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 김대중 평전
김택근 지음 / 사계절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동안 김택근이 쓴 김대중 평전 <새벽>을 읽었다. 경향신문 기자출신인 저자는 김대중 자서전의 작가. 40여회가 넘는 구술과 자료를 정리해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 김대중의 삶을 두 권의 책에 정리해낸 저자의 역량에 대한 신뢰도 컸다. 김대중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책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김대중이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87년 단일화 실패와 연이은 두 번의 대선 실패, 정계복귀와 대통령 당선, 남북정상회담 등 대다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후반생은 그 자체로 당대의 한국사였다. 1997년 12월 그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정권교체의 감격을 맛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쓸쓸하고 처연하던 임기 말의 김대중, 내란음모의 ‘수괴’를 아버지로 둔 덕에 반쯤 자폐증으로 살았던 막내 김홍걸의 짠한 삶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택근의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평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저자의 김대중에 대한 경사가 지나쳐,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대중이 우리시대의 한 탁월한 정치인이었겠지만, 그인들 왜 어둡고 습한 그늘이 없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그런 그늘은 좀처럼 보여주질 않는다. 그 그늘은 1997년 구제금융사태 이후 구조화된 신자유주의적 질서(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반하는 시장주의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사회경제적 차원으로 심화되지 못한 민주주의, IT 거품과 카드대란, 부패정치의 지속 등과 같은 김대중 시대의 한계와 문제는 지적되지 않고 있다. 평전으로서는 치명적인 한계이고, 이는 저자의 친디제이 성향이 단단하게 한몫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착잡하고 답답했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책들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우리의 현대사는 왜 그리 너절하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착잡함 말이다. 어느 나라의 역사치고 우여곡절이 아닌 것이 없지만, 기만과 협잡, 조작과 야만이 이토록 조직적이고 뿌리깊게 펼쳐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 야만의 역사 한 가운데에 김대중이 있다.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빨갱이’라는 야만의 수사학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는 6.25 당시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부르주아’ 였음에도 평생 동안 빨갱이라는 누명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5.16 이후의 한국정치사는 강준만의 말을 빌어, ‘김대중 죽이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 성공한 것이 있다면, 김대중 죽이기의 과정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김대중은 아마도 정치적 리더십과 철학, 국제적 안목이 두루 갖춰진 유일한 대통령일 것이다. 박정희는 철학과 국제적 안목에서, 노무현은 정치적 리더십에서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통찰과 혜안에서도 그를 따라갈 수 있는 대통령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근원에는 보수우익의 정치적 욕망과 영남패권주의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은 권모술수의 대가, 거짓말쟁이, 위장된 공산주의자,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레떼르를 평생 달고 다녀야 했다.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보자면, 이같은 정치적 수사들은 아무런 실체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눈먼 수사학들이 창궐하고 번식해왔던 것이 한국정치다. 나는 이른바 ‘교수’라는 자들의 입에서도 “디제이가 노벨상 타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했다”는 말이 나올 때 그들의 지적 용렬함에 대해 참담했었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의 삶에서 감동스러운 것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수십년간 그를 지지해왔던 사람들과의 정서적 연대다. 낙선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했다는 말, “호남 사람들이 선거때마다 김대중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당한 푸대접이 하도 서럽고 억울해서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투표한 것입니다”라는 말. 그것은 김대중이기에 가능한 말이거니와 그가 축적해온 ‘역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진단이다. 이것이 박정희에 대한 보수우익의 정서적 일체감과 다른 것은 그것이 ‘패권적 정체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를 계승한 노무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한 것은 바로 노무현에게서 그들 자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계급적 동질성 이전의 정서적 일체감의 문제다. 그 일체감은 패권과 특권 속에서가 아니라 핍박과 설움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정서를 정치적 미성숙이라 비판하거나 계급의식의 약화라고 까대기는 쉬울 것이나, 진보정당의 어느 후보도 그런 정서적 일체감, 아니 나아가 계급적 대표성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김대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 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든지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행동하면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명 문상객 중 10분의 1인 50만 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를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 명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협력을 이루는 모든 조건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2009년 6.15 정상회담 9주년 연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