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주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5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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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 여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운명적 비극성’이라할 만한 것이 묻어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출연했던 많은 영화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운명적으로 수락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중산층 가족의 허위와 폭력성(레볼루셔너리 로드), 10대 소년과 사랑에 빠진 하층 여성(더 리더), 정치선동가의 애인(올 더 킹스맨), 안락한 상류층의 삶을 거부하고 제 몫의 사랑에 투신한 여성(타이타닉) 등 영화속의 그녀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삶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담담하게 수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여배우들처럼 쭉쭉빵빵 몸매를 만들지 않고 통통한 제 몸 그대로 살겠다는, 여배우로서는 보기드문 결기도 그녀답다.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던 <비운의 주드>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민음사)를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수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그 서늘한 감동을 잊지 못해 하디의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디는 <테스>와 몇편의 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잘 몰랐는데, 그 뒤로 <캐스터브리지의 읍장>(한마당)과 같은 하디 소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비운의 주드>의 원제는 <Jude the obscure>다. 번역 판본에 따라서 <비천한 사람 주드>, <이름없는 주드>, <무명의 주드> 등 제목도 제각각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80년대 나온 두 개의 판본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민음사판 <이름 없는 주드>이다. ‘이름 없는’ 이라는 형용사가 영어 원제에는 부합할 지 모르나, 원작의 스토리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는 ‘비운의’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지난 여름, 이 서늘한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겨우겨우 습기 많은 여름밤을 견뎌냈다. 
 

주드 폴리와 수 브라이드헤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자 사촌간인 이 두 사람의 삶을 읽다보면,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온갖 장애물들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때론 예기치 않은 우연들이 틈입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성취된다하더라도 그게 곧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은 숱하게 많겠으나 이 소설만큼 운명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랑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할 터인데, 애정 소설에 대한 형용사로는 아주 진부한 클리쉐다. 그럼에도 주드와 수의 경우에는 이 말 외에는 달리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비극적 운명은 이들이 가진 사랑에의 의지가 초래한 것일 수도, 두 사람의 집안에 내려오는 “폴리 집안 사람들은 결혼하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내력에서 온 것 일수도, 당대 영국 사회가 가진 인습과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이라면 심리학이, 집안 내력이라면 숙명론이, 인습이라면 사회학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근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라고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선의가 배반을 당하고, 사랑이 참담하게 실패하며, 욕망이 좌절되는 삶의 아이러니는 착하고 선한 근대인이 겪어야할 불가피한 운명일 것이다.

주드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학문’을 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크라이스트민스터’라는 중세적 대학전통을 잇고 있는 학문의 성지. 이 소설 속의 크라이스트민스터는 가상의 대학공간으로, 하디는 옥스퍼드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주드는 돌을 쪼개고 다듬는 가난한 석공이지만,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히며 대학에 대한 꿈을 꾼다. 언덕 위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대학도시 크라이스트민스터를 동경하는 어린 소년의 꿈은, 그러나, 한 동네의 처녀 아라벨라를 만나 풋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좌절된다. 돼지를 죽여 순대를 만드는 거친 일을 척척 해내는 억척스럽되, 지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 여자와의 삶을 위해 그는 계속 돌을 쪼개고 다듬어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좌절.

아라벨라와의 불행한 결혼은 그녀가 부모와 함께 호주로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자신의 유보된 꿈을 실현하게 위해 찾아간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그는 사촌간인 수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주드와 수는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 외에도 “한 사람이 둘로 쪼개진 것 같은” 존재이자 “속박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잘하는 일을 속박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습성이 우리 핏줄기에 들어있는” 연인들이다. 둘로 쪼개진 한 몸은, 아마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비유를 끌어들인 것이리라. 본래 한 몸이었던 남자-여자를 제우스가 남자/여자로 쪼갰다는 신화. 그런 플라톤에게서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행위다. 그래서 수가 주드의 옛 스승이자 나이차가 많은 필롯슨과 성급하게 결혼을 했어도 두 사람이 서로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두 사람의 온전한 결합을 꿈꾸는 것도 그렇게 이해된다. 주드는 수의 곁을 떠나 사도가 되려 하나 첫 결혼으로 좌절된 학문에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주드는 그의 야심과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사랑, 제도의 굴레 속에서 좌절당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주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가 두 사람의 아이를 죽이고 자신마저 자살하는 장면이다. 비극의 신인 멜포메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 아이가 남긴 유서는 “우리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떠납니다”라는 것. 크라이스트민스터의 집주인들이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이 가족에게 세를 들이지 않으려 하자 이 아이는 임신한 수를 향해 “세상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있는 편이 낫죠?”라며 “어머니는 어째서 이토록 심술궂고 잔인할 수가 있어요! 우리 모두를 좀 더 큰 고통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함께 있을 방이 없어서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가야하고 우리는 내일 쫓겨 나가야 하는데도 식구 하나를 곧 또 데려오다니!”라고 격렬하게 말한다. 이 대목은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것은 주드와 수의 사랑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어떤 운명적 장벽처럼 느껴진다.

주드와 수의 사랑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둘의 삶은 더 비극적이 되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로 인해 더 큰 비극성이 잉태된다. 수는 주드에게 “날 사랑해선 안돼요. 나를 좋아하기만 하세요. 그 이상은 안돼요”라는 말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그 한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둘은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적 완성과 사회적 공인, 내지는 제도 속의 편입은 두 사람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난 오빠의 사랑을 받는 허가가 주어진 순간부터 오빠를 두려워하기 시작할 거예요”라는 수의 진술처럼, 제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깨어지는 것이다. “서둘러 결혼하고 천천히 후회하라”라는 당대 영국 사회의 권고사항과 상반되게 둘은 결혼에 실패하고 자신들의 사랑이 낳은 비극(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결국 결별하게 된다. “안녕하 가세요, 나의 동료 죄인이며, 가장 친절한 친구인 오빠”, “잘 가시오 나의 잘못 생각하는 아내여.” 이어 주드는 다시 돌아온 첫 부인 아라벨라로부터 버림받은 채 죽는다.

죽어가는 주드가 외치는 성경의 구절들은 자기부정의 묵시록으로 기억될 만하다. “내가 태어난 날을 멸하게 하라. 남자 아이를 잉태하였다하던 밤도 멸하게 하라.”“그날이 어둠이 되게 하라. 하느님이 위에서 돌보지 말게 하라. 빛이 그날을 비추지 말게 하라. 그 밤이 적막하게 하라. 거기서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라.” “어찌하여 나는 태에서 죽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어미에서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럼 이제는 조용히 누워 쉬고 있을 것이니, 잠들었을 것이니, 그러면 쉬고 있었을 것이니! 어찌하여 비참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번뇌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가.” (욥기) 토마스 하디의 서술은 주인공들의 비극에 대해 그 어떤 감정이입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차갑고 냉정하다. 하드보일드 문체란 이런 것이 아닐 것인가. 가난한 석공 주드의 주검 옆에는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리어 신약성서와 돌가루가 묻은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가난하고 사랑에 눈먼 석공은 사회적 출세도, 사랑의 욕망도 이루지 못한 채 떠들썩한 축제의 날에 홀로 외롭게 죽어간다. 크라이스트민스터에 돌아온 주드가 이 대학도시의 시민들에게 외치는 다음의 말처럼,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고,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패배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의 가난이었습니다. 내가 한세대 안에 이루려고 했던 것은 대개 두 세대 내지 세 세대가 걸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충동은-애정은- 결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적 이점이 없는 사내에게 방해물이 되지 않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으려면 물고기처럼 냉혈한 인간이 되고, 돼지처럼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대상으로는 딱 맞는 인물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심적 고통을 안다면 나를 오히려 동정할 것입니다. (중략) 내가 여러분에게 병들고 가난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서 가장 흉한 면은 아닙니다. 나는 원칙의 혼돈 속에 빠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팔구년 전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나에게는 확고한 의견이 쏠쏠하게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들은 하나씩 하나씩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내 생활법규에서는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오히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기쁨을 안겨주는 내 기호를 따르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중략) 내 생각에는 우리의 사회적 구도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보다 더 큰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겠지요. 혹시 정말로 그들이 그것을 찾아낸다면,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 말입니다. ‘일평생 사람에게 무엇이 좋을 것인지 누가 알며, 또 몸 뒤의 태양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전도서, 6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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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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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는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강준만식 글쓰기는 ‘실명비판’이나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상찬들이 많았으나 나는 그것을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른다. 내 책장에 꽂힌 그의 책만도 30여권 정도에 이르는데, 그만큼 오랫동안 그의 책들을 읽어왔다. 처음 발간되었을 때 일인 저널룩이라는 새로운 발간형식으로 주목받았던 <인물과 사상>시리즈는 죄다 내다 버렸다. 아마 그 책까지 합친다면 더 많았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꽤나 성실한 강준만의 애독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읽을 책도 많은데, 이런 쓰레기같은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강남좌파>를 왜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르는가. 이유는 말 그대로 그의 글쓰기가 신문 기사와 칼럼, 인터넷 자료, 잡지 기사 등을 주제별로 모아 주석을 달아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이 짜깁기가 그런대로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는 그의 <현대사 산책> 시리즈일 것이다. 주제와 연도를 기준으로 주요 기사를 찾고 거기에 주석과 나름의 ‘평가’(?)를 덧붙인 이 짜깁기 시리즈는 당대의 역사를 당대의 저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있는 책이다. <대중매체의 이론과 사상>이라는 대학원생 노트 수준의 글을 모아 전공서적이랍시고 펴내는 것을 보면, 그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라기 보다는 주제별 자료수집가 내지는 그냥 저널리스트라고 보는 게 맞다.

그에 따르자면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가 아니다. 강남은 “한국 자본주의이 농축된 형태”이고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강남좌파는 실은 “엘리트”라는 이름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보보스족과도 일맥상통하고 이명박 정부의 ‘촌스러움’ 때문에 반MB적 성향을 띠는 고학력 고소득층도 강남좌파다. 강준만은 이런 강남좌파를 1) 강남이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구분하고 있고, 2) 주체의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적 강남좌파, 중간적 강남좌파, 사적 강남좌파로 구분한다. 3) 좌파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타적 강남좌파, 합리적 강남좌파,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도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의 ‘강남좌파’라는 구분은 주거지와 소득, 학력과 상관없이 진보적(좌파적?) 성향을 갖는 모든 사람을 두루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다.

미안하게도 이런 식의 개념은 저널적 흥미를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분석적인 개념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강남좌파’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유복한 집의 자손이었던 엥겔스나 루카치도 강남좌파다. 최근 들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촌스러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외연이 더 넓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 좌파적 실천을 넘어서 ‘미학적 감성’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른바 래디컬한 유미주의자들은 늘 당대와 불화했다. 단적으로 오스카 와일드를 보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라이프스타일이든 당대의 주류적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을 쓰면 될 것이다. 이런 점은 그가 사회과학자라기 보다 저널리스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남좌파’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던 중앙일보는 강준만의 이 책이 나오자마자 대서특필하는 호들갑을 떨었는데, 자신들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아젠다를 강준만이 응답한 것에 대한 반가움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강북우파는 여전히 계급배반 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 비해 강남 우파의 계급투표 성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강북우파의 선택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바가 있지만, 휴전선 부근의 주민들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선택은 날로 강화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더 이상 애매모호한 정체성에 기반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물론, 우파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가짜) 욕망의 정치가 위력적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낙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강남좌파>를 보면서 가장 짜증났던 것은 강준만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논거(라기 보다 인용) 때문이었다. 그는 강남좌파론에 기대어 우리시대의 대표적 정치인들을 차례차례로 불러내고 있는데, 그 정치인들의 목록은 노무현, 오마이뉴스(오연호),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이다. 이들에 대한 강준만의 ‘비평’은 언론의 기사에 대한 인용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범위는 한겨레와 경향을 넘어 조중동까지 이른다. 관련 기사의 진위, 칼럼의 정치적 배경, 사실 여부 같은 것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언론의 기사는 항상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눈밝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국언론의 ‘사실보도’가 기실은 많은 경우 사실을 빙자한 허위이거나 과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언론의 사실에 대한 기율’은 한국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기자에게 선배 기자가 했다는 말, “너는 기자가 아직도 ‘기사’를 믿니?”

노무현에 대한 그의 글은 조선일보 사설(이 신문의 사설이 많은 경우 ‘사심많은’ 정파적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정파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파성과 정파적 이익을 충실하다는 것을 은폐한채 보편타당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게 문제다.) , 뷰스앤뉴스의 박태견(그의 이른바 경제분석은 언제나 한국경제 붕괴론이고 망국론이다. 초치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사다.),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신우(이 사람의 글이 과연 칼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인가.), 서강대 명예교수 이태동(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중 이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동시에 인문적 가치에 반하여 글을 쓰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경향신문 전남식 부국장(이 사람은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중 언론에 대해 가장 억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유종일 KDI 교수(진보적 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노무현의 ‘아방궁’에 490억이 들어갔다는 언론의 오보를 그대로 생중계하는 사람이다.), 최장집 교수(참여정부가 사회경제적 개혁을 소홀히 했다는 최교수의 비판은 이 정부에 대한 가장 적확한 비판에 해당한다.) 등의 주장과 글들을 인용한다. 조선이나 동아, 문화와 매경,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이 동일선상에 놓이고 주제에 부합하기만 하면 장황하게 인용된다.

박근혜에 대한 글에는 정치컨설턴트 박성민, 임철순 한국일보 주필, 조선일보 사설, 조국 교수,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한겨레 성한용 기자, 동국대 강정구, 문화평론가 이재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등등이 인용되고 예의 그, 수첩공주, 외모, 말투, 박정희 신화, 주변의 인물들이 거론된다. 언론 주변과 정치인 주변을 돌고 있는 풍문과 소문들, 뒤틀린 시각으로 본 칼럼과 정파적으로 해석된 언어와 행위들, 이 모든 것들이 강준만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박근혜에 대한 강준만의 결론은? “맹목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충성파들이 쳐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박근혜의 모습,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박근혜의 당선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거창한 철학과 비전을 말할 필요도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이 나라를 어떤 용인술로 이끌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정도의 비평은 따로 책으로 낼 것도 없이 그가 쓰는 신문 칼럼에 한번 쓰면 그만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삼국지>를 내면서 소설가로서의 역량도, 대중적 인기와 평가도 급전직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가진 특유의 고집스러운 노골적인 우파적 시각(따라서 반페미니즘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평론가 김현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두고, '베끼기의 문학적 의미'라는 평론을 썼을때, 정작 김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뒤의 이문열의 행보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던 김현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창작이 아니라 ‘베끼기’다. 소설가가 ‘베끼기’로 돌아섰을 때, 그것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설가로서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문열이든, 황석영이든, 장정일이든 삼국지를 쓰면서부터 그들은 이미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강준만은 베끼기에서 한참 더 나아간 ‘짜깁기’다.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를 읽고 이건희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심한 착각이 될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좀처럼 자신을 내비치지 않고 있는 이 은둔의 CEO에 대해, 언론을 통해 소개된 몇 개의 에피소드를 근거로 제대로 그를 평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강준만은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짜깁기’만을 해왔으니 그의 짜깁기 이력도 거의 20여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짜깁기에 동원된 재료들이 이미 반쯤 썩은 것들이니 아무리 잘 짜깁기해봐야 그건 짜깁기일 뿐이다. 짜깁기라도, 그의 연구실에 파일링되어 있는 이 쓰레기 자료들을 전부 폐기하고 다른 재료로 짜깁기를 했으면 좋겠다. 조중동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정작 글쓰기에 조중동 기사를 주요 글감으로 삼는 모순이라니, 더구나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강준만 식 글쓰기의 파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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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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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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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서하진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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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의 장편소설 <나나>는 책 표지가 인상적이다. 상아빛 네글리제를 입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은 여인의 뒷모습. 눈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데, 얼굴을 위쪽으로 약간 치켜든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오른손이 오른쪽 목덜미에 가 있고, 왼손은 허벅지에 놓여 있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한껏 자극한다.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그 얼굴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유디트’의 그것을 닮아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욕망에 가득찬 얼굴로 대상을 유혹하는 여인의 표정. 이 책의 표지는 소설이 여인의 욕망과 그 욕망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라는 것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미혼의 사십대 남자 인영이 있다. 그는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으로 약국을 하며 살고 있다. 그에게는 남모를 고뇌가 있는데, 바로 배다른 누이인 ‘나나’에 대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 나나는 어머니의 사별로 재혼한 계모(희주)가 데리고 온 이복동생. 소설은 나나에 대한 욕망을 어쩌지 못하는 인영의 주저와 갈증(“나나의 눈에 물기가 차오르면 그의 목을 타고 갈증이 올라왔다”라는 문장 같은 것), 그리고 그에게 다가온 구원으로서의 애란에 대한 애정을 에피소드로 엮어가면서, 나나가 가진 세속적 욕망의 좌절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나의 세속적 욕망이란 비엔날레의 총감독이 되는 것, 이를 위해 그녀는 인영의 유산이 될 집을 저당잡혀 거액을 대출받고, 이를 비엔날레 심사위원에게 건네고, 청와대 비서관을 유혹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자를 유혹하는 팜므파탈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아름다워지며 그것으로 남자를 유혹한다.

서하진이 말하듯 이 소설의 얼개는 신정아 사건에서 빌려왔다. 인영 아버지의 죽음은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에서 차용한 듯 하다. 팜므파탈이란 거부할 수 없는 마성(demon)적 존재여야 하는데 신정아를 그렇게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메리메의 단편 ‘카르멘’이 가르쳐 주듯이 팜므파탈로서의 여성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덫이고 늪’이라 말한다)그것이 죽음으로 향한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매혹당하는 것, 또 그런 존재에게 팜므파탈이라는 이름이 가능할 것이다. 팜므파탈은 끊임없이 사랑할 남자를 찾고 그를 잠자리로 유혹하는 지상의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상의 질서를 초월해 있는, 성(聖)과 속(俗)을 동시에 갖는 존재여야 한다. 공포와 매혹, 우주적 성녀와 마성적 창녀의 혼합? 글쎄, 신정아에게서 그런 면모를 발견하긴 어렵지 않을까. 이 소설의 나나가 팜므파탈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속’이 많고 ‘성’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이 소설은 공학적으로 잘 쓰여진 작품이다. 문장은 섬세하고 차분하며 아주 깔끔하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사십대의 작가가 원숙하게 써낼 수 있는 소설로 보인다. 그렇다고, 좋은 소설인 것 같지는 않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공학적으로 잘 써낸 소설 정도로 밖에 달리 평가의 여지는 없는 것 같다. 오피스레이디(OL)들이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사나흘 출퇴근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달래줄 만한 정도다. 읽으면서 가끔 “마흔, 더이상 젊지 않고 더 이상 이르거나 늦지도 않은, 그 어떤 것들을 포기할 수도, 그를 향해 달려갈 수도 없는 나이”라거나 “행복은 때로 죄책감을 담보로 한답니다”와 같은 대목에 마음을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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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2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 신(new)자유주의에서 신(neo)자유주의로 아산재단 연구총서 313
고세훈 지음 / 집문당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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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시리즈는 사실 새로울 게 하나도 없는 내용이다. 비정규직 문제, 워킹푸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등의 화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보언론이나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되었던 문제들이다. 초기자본주의,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조선의 주장인데, 시민단체와 다른 것은 그것을 ‘4.0’는 섹시한 이름을 붙이는 포장술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뭐, 그것도 영국 언론인의 책 제목에서 훔친 것이니 사실 조선의 독창성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한다.) 나로서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핵심적 화두였던 이 문제들을 좌파들의 선동쯤으로 치부하다 이제야 심각한 표정을 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의 뻔뻔스러움이 역겹다. 한편으로는, 조선마저도 이 문제들의 해결을 주장하고 나선 마당이니 신자유주의의 극복에 대해서는 얼추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리라는 역설적 낙관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결국 맹목적 시장주의에 대한 견제와 복지의 확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벤담주의와 복지국가 전통
 

고세훈의 <영국정치와 복지국가>(집문당)을 읽은 것은 신자유주의 담론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에서 뒤늦게 등장한 이른바 ‘복지담론’ 때문이다. 고세훈은 <영국노동당사>(나남)라는 방대하고도 훌륭한 책을 쓴 정치학자이고, 최근에는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앞의 책은 반 이상을 읽었고, 뒤의 책은 아마 1-2장 정도를 보고 덮었던 듯 싶다. 그는 영국 노동당사를 서술하면서 19세기 후반 안개가 짙은 어느 날 열린 사회주의들의 회합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서술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책의 주요 내용은 다 까먹었어도 그 대목만은 기억에 선명하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고세훈이 건조한 정치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세례를 받은 축축한(wet)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고려대 교수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넓게 보아 최장집 사단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의 복지국가적 전통을 서술하기 위해 19세기 벤담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벤담의 주장이야말로 영국적 복지국가의 사상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벤담주의는 “행복의 계산”에 기초한 다분히 산술적인 “효용”논리에 입각해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행복이나 고통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며, 국가적 차원에서 그 ‘총합’을 증가시킨다면 행복의 총량은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가 소개하는 벤담주의의 웃기는 점 중의 하나는 “노예의 이익을 고려하면서도 노예 소유주가 얻는 행복의 양이 노예들의 고통의 총합을 초과한다면 노예사회도 효용의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벤담에게 빈곤의 문제는 하층민의 도덕적 결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재분배 정책은 “근로의 동기를 소멸시킬 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돼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제러미 벤담이 파놉티콘의 설계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같은 과감한 주장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곱씹어봐야할 것은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문제 혹은 근로의지의 부족 탓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일 것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는 19세기 벤담주의자가 아직도 득시글대고 있다.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우창 선생의 글(http://goo.gl/NATYT)도 그 합리적 핵심을 충분히 이해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개인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사람의 근원적 도덕의식”보다 “제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벤담주의가 이후 영국 복지정치에 남긴 유산이라면 국가가 개입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회공학적 원리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유방임을 주장했지만 효용원리에 따라 법체제를 교정함으로써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이는 자유방임(laissez-faire) 자본주의 시대에 국가개입 사상의 단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조 전반기에는 벤담주의의 영향하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의회개혁, 수정구빈법, 어린이 노동을 금지한 공장개혁, 교육개혁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실행되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디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구빈소가 왜 그렇게 처참한 몰골이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방임을 넘어 국가개입으로
 

영국의 19세기 말은 ‘신(new) 자유주의’ 시대로 불리는데, 이유는 그 이전의 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와서 자유방임이라는 신화는 점차 위축되고 광범위한 국가개입이 이뤄지게 된다. 이 시기의 이론가는 그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이다. “사적 개인이 효율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단일한 정치경제원칙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즈음의 집권당인 영국 자유당(whig party)은 국가 재정정책과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도구로 삼아 부의 공정한 분배를 이루고자 했다. 저자는 1905년-1914년 자유당 정부를 영국 역사에서 복지국가로의 도약을 이룩한 최초의 정부로 평가한다. 노동쟁의법을 도입하고, 1914년에는 빈곤아동을 위한 무료급식을 의무화했다.(정확하게 영국 자유당이 도입한 것은 ‘선별적 무상급식’이지만, 우리는 그조차도 거의 1백년이나 뒤늦은 셈이다.)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노령연금을 지급하고(이것도 우리는 참여정부에 와서 시작되었다.) 1912년에는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다. 1911년에는 건강보험과 실업보험을 축으로 하는 국민보험이 도입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당 정부가 자발적으로 개혁조치들을 취한 것이 아니라 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살아남으려면 노동계급의 표를 끌어내야"하기 때문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점차 자본주의 체제의 도전세력으로 등장하는 노동계급을 달래고 떠오르는 사회주의를 피하기 위해 복지입법을 주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의 이런 야심만만한 정치적 시도는 1923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자유당의 하위파트너였던 노동당에게 수권의 자리를 빼앗기면서 보수-자유 양당 체제는 영원히 사라지고 대신 보수-노동이라는 새로운 양당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 자유당의 몰락과 노동당의 부상이라는 역사적 현실은 노동계급의 성장에 따른 필연이라는 점, 계급적으로 모호한 정당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한국사회의 ‘계급’이 구조화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참여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영국 노동당은 1900년에 창당해 23년만에 집권당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들도 희망을 가져봄직하다.(물론 강남좌파만이 아니라 ‘강북우파’가 등장하는 마당에 계급정치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보수당의 온정주의와 복지국가로의 도약
 

이 책의 2장은 보수당에 의해 진행된 복지정책을 다루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전통에는 일국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가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빈민과 하층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영국 보수당의 ‘온정주의’를 의미한다. 보수당이 중산층와 부유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면, 그것은 이국보수주의(two-nation)가 될 것이다. 영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원조는 그 유명한 에드먼드 버크인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낸 무질서와 난동에 염증을 느끼고 보수주의의 사상과 철학을 가다듬은 인물이다. 그의 입장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귀족이 가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것이다. 보수당의 복지정책은 바로 그런 귀족적 책임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영국 보수당 정치 가운데 기억할만한 정치가는 벤저민 디즈레일리다.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과 수상을 지낸 디즈레일리는 맨체스터 자유무역회관에서 2병의 브랜디를 마시며 3시간 동안 진행된 연설에서 대외적으로 영국 제국의 건설과 대내적으로 ‘인민의 조건’의 개선을 주장한다. (정치인이 술 마시면서 하는 연설이라, 이런 낭만이라니!) 뒤이은 수정궁 연설에서는 “노동자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공장주들의 잔혹한 행위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은 인민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위대한 토리당의 정책적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편다. 이런 디즈레일리의 주장은 신보수주의, 토리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그의 보수당은 노조지도자인 맥도널드로부터 “보수당은 5년동안 자유당이 50년 동안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노동계급을 위해 해냈다”는 감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보수당의 이런 개혁과 온정주의적 전통은 노동당의 정책과 충분히 ‘합의’ 가능한 것이다. 고세훈은 2차 대전 이전에 영국 정치에는 “국가 복지를 향한 혹은 국가개입주의를 위한 뚜렷한 ‘합의’가 존재했음을 증명해주었다”고 평가한다. 
 

과연 이같은 온정적 보수주의가 한국사회에서 가능할 것인가. 한나라당에는 디즈레일리와 같은 정치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복지’문제에 있어 여․야간의 ‘합의’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밥먹는 문제를 두고도 정치적 타협을 하지 못하고 ‘주민투표’를 하는 마당에 이런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김호기는 이명박 정부를 두고 봅 제솝의 개념을 빌어 “두개의 국민(two-nation) 국가전략”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국민을 ‘적과 동지’로 나눠 두 개의 선택과 배제를 하는 마당에 전간기 영국 보수당과 같은 일국 보수주의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은 척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에 보수당이 오히려 복지를 크게 도약시켰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수당이 복지개혁을 추진할 때 정치적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감한 개혁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페이비언주의와 노동당의 복지정책
 

이 책의 3장은 노동당 정치와 페이비언주의를 다루고 있다. 페이비언협회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단체로 윌리엄 모리스나 시드니/비어트리스 웹 부부, 버나드 쇼 등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저자는 페이비언협회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 표나게 드러내고 있는데(고세훈은 <페이비언 사회주의>(나남)의 역자이기도 하다), 중산층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협회는 각종 조사와 연구 작업을 통하여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혁명을 거부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체제이행을 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편다. 다분히 중산층 엘리트주의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으나 이들은 정당에의 ‘침투’를 통해 각종 개혁입법들을 도입하고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페이비언주의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편향성을 지닌 것은 아니며 근본적으로 중립적인 도구로서, 활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익하고 자비로울 수 있다.” 노동계급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파국적’ 시각에 비하자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시각에서는 지나친 낙관론일 수 있겠다. 
 

영국 노동당의 복지정책은 이들 “페이비언들의 인적, 이념적, 방법론적, 정책적 영향력이 넓고도 깊게 드리워져 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하지만 불행히도 2차대전 종전 이전까지 노동당이 집권했던 기간에는 이렇다할 복지정책에서의 진전이 없었다. 노동당의 집권기간 동안의 실적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서는 물론이고, 전전의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성취한 것들과도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부실하고 취약했다.” 노동당이 노동계급을 배반하는 역설이 벌어진 것. 페이비언협회와 그 정치적 실천조직으로서의 노동당이라는 문제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비춰 대단히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진보정당의 중요한 토대중의 하나는 정책생산능력을 가진 싱크탱크 집단이라는 점, 80년대라면 개량주의라고 비판받았을지 모르지만 정책은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진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반대”라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구호로는 한진중공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김대호(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15)와 김기원(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20)의 주장이 내겐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전후 30년의 합의정치와 복지체제의 위기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전전의 합의의 전통과 전시연립내각의 경험 속에서 보수-노동 양당 간의 ‘합의정치’를 꽃피운다. 영국 복지체계의 기틀이 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베버리지 보고서는 1943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거의 수정없이 통과되고, 종전 직후의 노동당 정부에서 추구된 혼합경제의 개입주의적 정책구도를 1951년부터 13년 장기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그대로 계승한다. 1979년 대처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영국 정치에는 이같은 합의에 기반한 국가개입과 복지정책의 기본골격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 시기 노동당은 자본주의 붕괴론이라는 추상적 이론에서 하강하여 구체적 현실과 접목된 정책을 폄으로써(수정주의) “이론을 정책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이 둘을 일관되고 통합된 지평 위에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1945년 전쟁영웅 처칠을 누르고 집권한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가 이룩한 쾌거다. 애틀리 정부 집권 6년 동안 12개 산업의 고용규모는 전체 노동력의 20%에 달했다고 한다. 가족수당법, 국민보험법, 국민의료법, 산업재해법, 국민부조법 등이 제정되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복지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영광의 세기도 오래가진 못했다. 윌슨-캘러핸 노동당 정부를 거치면서 ‘전후 30여년의 복지국가적 합의체제’는 파국을 맞게 된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노동당은 케인즈주의를 점차 포기해나갔고,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복지지출은 과감히 삭감되었다. 노동당은 1979년 광부파업으로 상징되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을 거치면서 대처의 보수당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노동당에 의한 합의정치의 몰락과 복지후퇴를 고세훈은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노동당 정치는 서유럽 사민주의의 주 내용인 완전고용과 복지급여를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하고 여타의 정책적 대안들을 모색하기 보다는, 축적의 위기로 간주된 상황 앞에서 언제나 철회될 수 있는 부차적 수단의 하나로서 취급했다. 특히, 노동당의 복지정책은 경제정책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언제나 후자가 설정하는 조건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예컨대, 케인즈주의적 경제관리 정책이 완전고용, 물가안정, 지속적인 성장, 그리고 국제수지의 안정 등을 확보하는데 실패하면 복지국가적 합의자체에 ‘원인무효’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5장은 대처의 시장자유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영국 보수정치의 역사 속에서 보면 대처주의는 영국 보수주의의 특징이 아니라, 일종의 과격한 일탈로 평가될 수 있다. 우선 대처 자체가 과거의 보수당 정치인들과 출신성분부터 달랐다. 명문 귀족이 아니라 공립학교(grammar school) 출신의 식료품상 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상업광고에서 말하듯이 ‘수퍼마켓’ 딸이 아니라, 말하자면 대형마트 운영자의 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전직 시장이기도 했다.) 고세훈은 대처에 이르러 영국 보수주의가 ‘일국 토리이즘’에서 ‘이국대처리즘’으로 전화되었다고 평가한다. 대처는 케인즈주의적 합의, 전후 지속된 영국식 복지체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데, 이것은 합의보다는 개인적 소신을 앞세우고, 공식적인 내각보다는 비공식적인 보좌진들을 통해서 일을 도모하는 대처의 개인적 스타일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기 대처리즘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영국병’을 뽑아 버렸다는 식의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실제는 이와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대처 집권 초기 영국 제조업의 20~30%가 도산하면서 제조업의 기반이 와해되었고, 대처 집권 10년 동안 무역적자도 급등했으며, 집권이후 1979~1993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1.6%로 대륙국가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1979년 이래 최하위 20%의 실질소득은 3% 감소한 반면, 상위 20%의 그것은 50%나 증가할 정도로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대처리즘은 과연 성공했을까. 대처는 소비를 부추긴 스테로이드경제, 민영화를 통한 주식소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열광, 과격한 노동조합에 대한 무력화 등을 통해 정치적으로 지지를 동원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처리즘의 공격적 신자유주의가 가능했던 까닭은 “북해 석유가 주는 횡재와 더불어 방대한 국유재산 매각을 통해 얻은 재정적 지원의 덕이 컸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역사상 어떤 영국 정부도 “북해 석유와 민영화라는 황금거위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는 것. 경제상황만 놓고 보면 대처시대는 ‘전혀’ 성공한 정부가 아니었고, 그 시대가 낳은 여파는 전후 최악의 불황을 낳기도 했다. 저자의 말대로, 북해 석유와 민영화, 그리고 거기에 추가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대처의 장기집권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복지정책과 관련하여 역설적인 것은 대처시대에도 복지의 양적 규모는 줄어들기는 커녕, 과거 노동당 시기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복지의 정치적 불가역성’이다. 그러나, 대처시기에 와서 복지는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최소생활을 위한 선택적 안전망이라는 최소개념으로 추락했다.
 

복지국가의 퇴조, 노동당의 우경화
 

대처의 시대에 폭동과 테러, 대중의 소요와 범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최근의 토트넘 폭동과 관련하여 되새겨야할 대목이다. 대처시기 노동당은 뭘 하고 있었을까. 노동당은 1979년 패배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황당한 정책과 강령을 주장하고 있었다. 1983년의 노동당 선거강령은 영국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소득정책의 폐지, 일방적 핵비무장, 상원 폐지 등을 내걸고 있었는데, 이 강령은 “역사상 가장 긴 자살문서”라는 평가를 받으며 선거에서 참패했다. 블레어는 이같은 당내 강경좌파의 몰락과 대처리즘의 승리 한 가운데에서 부상했다. 알려진대로 블레어의 노선은 기든스가 정초한 ‘제3의 길’이었는데, 이는 과거 노동당 정부를 ‘구좌파’로 비판하면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노동당의 ‘신수정주의’라고 불린다. 
 

블레어의 복지정책은 ‘일을 위한 복지’(welfare to work)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국가복지가 교육과 훈련, 탁아등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고 조세체제도 근면에 대한 보상과 유인을 위한 제도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보상받는’ 체제가 자리잡을수록 실업과 복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3의 길의 복지개념은 김대중 정부에 의해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바 있다. 고세훈은 '일을 위한 복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데, 그것은 노동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업의 구조적 순환을 해결하지 못했고, 훈련된 새 노동자가 기존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후자를 쓸모없는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전치효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블레어 정부에서도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직전의 메이저 정부보다도 더 악화되었다. 블레어 정부는 경제성장을 통해 고용증가와 재분배를 꾀한다는 ’성장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증상은 한국의 보수층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화이기도 하다. 고세훈은 “성장이 빈곤이나 불평등을 자동적으로 해소시키리라는 가정, 혹은 최고 소득세와 기업세를 낮추고 소비세를 높여서 투자, 성장, 고용을 촉진하고 그렇게 창출된 흑자를 복지 등 공공지출을 위해 활용한다는 논리는 불행하게도 현실세계에선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블레어 시대는 복지를 노동시장 유연화와 급부조건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재상품화‘했던 시대로 평가된다. 제3의 길에서 국가는 기업활동을 위한 안정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에 한정되었고 경제사회정책에서도 경제자유주의와 시장보수주의가 두드러졌다. “국가의 재정위기는 시장실패나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과도한 복지지출이 결과한 복지국가 자체의 위기이며 복지지출의 과잉은 복지사기꾼, 복지의존적 저변계급(underclass) 탓이라는 우파의 상투적 견해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같은 이른바 ‘책임전가의 정치’는 한국사회의 보수언론이 확대재생산하는 유력한 담론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3의 길에 이르러 노동당은 더 이상 ‘노동당’임을 포기한 듯하다. 과거의 합의가 ‘수정된 좌파’(보수당의 노동당으로의 접근)이라면, 블레어 시대의 그것은 ‘수정된 우파’(노동당의 보수당에로의 접근)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영국에서 전후 합의정치에 기반한 복지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에 대해서 저자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민영화는 대세가 됐고 노동운동의 사기는 최저점에서 헤어날 줄 모르며 세계화는 압도적인 권력으로서 국내 정치의 운신을 제약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은 유럽 사민정당 가운데 가장 우경화된 정당으로 평가될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더 비관적이다. “한국정치는 생성의 꿈틀거림을 용납하고 그 과잉을 여과하며 견제할 만한 존재 영역의 광범위한 중간지대를 가져본 경험이 없다. 이론이 없으니 이념이 없고, 이론과 이념의 죽음도 없고, 그 부활 또한 없으며 합의도 합의로부터의 이탈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는 갈수록 비대해져 왔지만, 그것은 조야한 권력의지의 난투였을 뿐 존재와 생성의 여지는, 있었다면, 그 가공의 신기루 앞에서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복지한국, 희망은 있는가
 

그래, 저자의 이 비관론 만큼이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국의 복지에 대해서 더욱 비관하게 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비롯하여 복지담론을 주도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등장하고,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이 현안으로 등장한 것은 과거에 비하면 한층 진전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담론들을 정치화하고 제도화하는 정치권을 보노라면 저자의 비관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영국이 내세우는 ‘전통’도 ‘합의’도 없으며, ‘계급정치’의 가능성은 더더욱 기대하기 난망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8년 경제위기를 통해 우리가 따라가야할 자본주의의 ‘모델’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보았어도, 경제선진화를 떠들며 미국 자본주의 따라가기를 떠들었던 그 사람들은 여전히 중요한 정책입안자의 위치에 있다. 엊그제 한겨레 칼럼을 보니 이정우는 영국의 폭동을 보수연립정부의 예산삭감과 재정삭감에서 찾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91714.html) IMF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순치된 탓일까.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집회와 비정규직 철폐 집회가 영국같은 폭동으로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나저나, MB의 ‘공생발전’은 복지국가일까, 아닐까. 박근혜의 복지는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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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9-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복지 정책은 통 모르지만, 유시민씨가 장관할 때 만든 '노인요양보험'은 '유시민 알러지'가 있던 보수층마저도 극찬할 정도로 복지 아이디어의 현명한 성공 사례였다고 들었습니다. 새삼 그이가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돌이켜지면서, 역시 배우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저는 '유빠'는 아닙니다만..)

모든사이 2011-09-06 13:10   좋아요 0 | URL
유시민을 비롯한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의 방향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는 블레어의 그것을 한국사회에 적용시킨 것이지만, 참여정부의 그것은 복지가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유력한 경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한계가 뚜렷했지만, 적어도 당시로서는 복지정책의 방향을 전환시킨 시도였던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아쉬운 대목이지요..
 
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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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이 책 표지 뒤에 쓰인 발문을 인용하자면,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찾아 헤맸으며, 2864일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이다. 이 소설의 애절함은 바로 이 발문의 숫자가 보여준다. 앞 뒤 맥락 없이 수치만 보자면, 소설의 주인공은 세상에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집요한 ‘스토커’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박물관을 만들어 그녀를 추억하는 집요함이라니, 참으로 질긴 인간이다. 사람에게는 망각의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망각의 강, 레테>(문학동네)를 쓴 하랄트 바인리히의 주장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 케말은 외려 망각의 순간 삶이 멈추어 버리는 사람이다.

두 권짜리 이 소설을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읽었다. 소설이 난해해서도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다. 이 소설속의 시간은 남주인공 케말의 내면을 따라 아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이어서 어떤 박진감이나 속도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퓌순인데, 터키어를 모르는 처지에서 이 이름은 내게 영자니 순이니 하는 지극히 전통적인(?) 한국 여자이름을 상기시켰다. 그 퓌순의 내면은 거의 도드라지지 않고, 대부분 케말의 시선과 내면이 주조를 이룬다. 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고통과 희열, 고뇌와 설렘,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희비가 오르고 내리는 감정의 굴곡이 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은 퓌순과 케말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첫 장면은 의미심장한데, 그날 퓌순은 귀걸이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퓌순이 잃어버린 귀걸이는 둘만이 간직하는 내밀한 사랑의 실존을 상징하는 소도구쯤 될 것이다. 훗날 재결합한 케말과 퓌순이 8년 만에 다시 사랑을 나누고 난 뒤 케말은 이 귀걸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여간, 부유한 기업가 집안의 아들인 케말은 약혼식을 앞두고 사촌동생인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대학입시를 앞둔 18살의 퓌순은 미인대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 둘은 케말의 아파트에서 한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섹스를 하며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이 44일이 그들이 8년 뒤에 다시 결합할 때까지 온전히 함께 한 시간들이다.

퓌순은 케말의 약혼식에 초대받아 약혼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직후 케말에게서 사라져버린다. 케말은 그녀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퓌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케말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고 약혼녀 시벨과도 결국 헤어지게 된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만나 마시는 술은 칼바도스다. 케말에게 칼바도스는 터키 고유 술인 ‘라크(laki)’다. 케말은 라크를 마시며 겨우겨우 실연의 세월을 견뎌낸다. 다시 만난 퓌순은 영화감독 지망생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절망한 케말은 그녀의 집을 매일 방문하며 퓌순을 바라보고,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는(사실은 훔쳐오는) 것으로 8년의 세월을 보낸다. 이 집요한 사랑은 퓌순이 이혼을 하고 케말과 결혼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될 듯하나, 뜻밖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만나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케말은 퓌순의 귀걸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신은 귀걸이도 못 알아봤어!” 이 말을 남긴 퓌순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케말의 남은 인생은 전세계의 박물관을 돌아보며 퓌순이 남긴 것, 퓌순과 인연이 있는 사물, 퓌순의 흔적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바쳐진다. 과연 실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이스탄불에 있다는 ‘순수박물관’이다. 파묵은 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소설가인 자신을 등장시키는데, 부엔디아 가문의 일대기가 양피지에 쓰인 역사였다는 <백년동안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바로 그 순수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의 내력, 그것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 안내서라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모든 진열장, 모든 상자, 이 모든 물건들을 본다면, 내가 팔년 동안 저녁 식사 때 퓌순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녀의 손과 팔, 머리카락의 굴곡, 그녀가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모습, 눈썹을 치켜 올리는 모습, 미소, 손수건, 머리핀, 신발, 손에 쥔 수저, 이 모든 것에 내가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본다면 사랑이 커다란 관심과 커다란 연민이라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케말은 사랑이 무엇인가 묻는 퓌순의 질문에 “사랑은 퓌순이 도로, 인도, 집, 정원 그리고 방을 거닐 때, 야외찻집, 식당 그리고 저녁 식탁에 앉아 있을때, 그녀를 바라보는 케말이 느끼는 애착을 일컫는 말”이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이들의 사랑에서 ‘바라보기-보여지기’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다. 사랑이 마악 싹 텄을 즈음 44일간 이뤄진 육체적 관계는 그 후의 사랑의 내구성을 규정짓는 중대한 의식이지만, 8년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케말은 퓌순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그녀의 부모와 남편이 있는 집에 매일이다시피 찾아가 함께 게임을 하고 티비를 보며 마치 한 식구처럼 살아간다. 퓌순을 바라보는 것, 그게 케말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다. 케말은 바라보고, 퓌순은 보여진다. 영어의 ‘see’가 ‘보다-알다’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듯이, 시각은 전통적으로 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케말은 퓌순을 바라봄으로써 그녀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고, 자기 안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말하자면, 케말은 바라봄의 주체고, 퓌순은 바라봄의 객체다.

이 소설에서 퓌순은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세 번 정도 등장한다. 그 첫째는 케말과 사랑을 나눈 뒤 “이제 내 삶은 당신과 결부되어 있어”라고 말할 때, “걱정 마, 죽을 때까지 당신 이외에 그 누구와도 잠자리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할 때, 그리고 죽기 직전 “당신은 귀걸이도 못 알아봤어”라고 말할 때다. 그녀의 발언이 주체적인 까닭은 거기에 그녀의 진심과 더불어 어떤 결단의 감정이 강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퓌순의 죽음은 애절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불가피한 비극이거나 그녀가 가진 사랑의 상관물인 귀걸이에 대한 케말의 무신경함 때문이 아니다. 퓌순은 죽기 전 케말과의 대화에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방해했던 케말에게 “당신 때문이야, 난 내 인생을 살지 못했어.... 너희들은 내가 유명해져서 너희들을 떠날까봐, 질투심 때문에 날 집에 붙들어 두었어”라고 말한다. 8년 동안 바라봄의 객체로 포획된 여성, 설사 내밀한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퓌순의 삶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바라봄의 감옥에 갇힌 수인, 그녀가 케말의 사랑에 마냥 행복할 수 없는 이유다.

바라본다는 것은 ‘안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지배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임철규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의 한 구절에서 훔쳐온 것이다. 임철규는 “눈은 ‘본 바’를 타자화하며, 이 ‘타자화’는 ‘차별화’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차별화는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이 마치 전체인양 틀짓는 인식의 작란이 자리잡고 있다.” 바라봄에는 ‘인식의 제국주의’가 스며들어 있다는 얘기다. 자살에 이르는 퓌순의 절망은 바로 그러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바라봄의 대상으로서 객체화되어 케말의 삶과 “결부”되어 있는 그녀의 삶은, 주체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기는커녕,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 거기에 케말의 ‘시선’은 “퓌순은 삼순(담배) 한 개비를 평균 구분 동안 피웠다”라고 말할 정도로 집요하지만(시선의 일방성), 정작 그것은 ‘귀걸이’를 배제하고(선택적 배제) 종국에는 퓌순마저 타자화하는 시선의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케말에게 순수박물관은 시각에서 시작하여 온 감각으로 확장되는 퓌순에 대한 기억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황금의 순간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독법을 달리하자면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결과로 남은 ‘순수박물관’은 남성적 시선의 대상물로 채워진 박물관이 아닐까. 그가 18살의 대입을 앞둔 사촌 동생 퓌순과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고 그녀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아다닐 때부터, 이들의 사랑에는 불가피한 비극성이 내장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래 인정하자, 이 소설의 바라보기를 두고  폭력적이며  지배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친 윤리적 독법일 것이다. 이 지극히 애절한 사랑을 아주 가난하고 앙상하게 읽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눈은 바라보면서 사물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또한 눈물을 흘리는 기관이기도 하다. 임철규는 앞서의 책 말미에서 “아도르노는 희망은 망각된 것의 복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그 ‘망각된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고 있는 눈물’로 가득찬 ‘울고 있는 눈’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케말은 자신의 수집품을 바라보며 퓌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고통을 받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의 순수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도 “커다란 관심과 연민”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타자는 비로소 시선의 감옥에서 나와 바라보는 자와 슬픔과 공감의 눈물로서 조우한다.  이 때의 눈물은 제국주의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희열과 고통, 깊은 공감과 연민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게 순수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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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2011-08-1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희망은 망각된 것의 복귀'라.. 그리고 희망의 복귀는 '울고 있는 눈'이라.. 이 소설을 읽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이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모든사이 2011-08-12 14:01   좋아요 0 | URL
이 리뷰만 보고 책 안보면, 이 소설을 반페미니즘 소설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ㅎㅎ

이영은 2011-08-1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은 어떨지 모르지만 님의 리뷰만 보면 한 인간의 어쩔 수 없었던 욕망의 흐름을 끝까지 밀고가서, 끝을 보고야만 지점에서 섰을 때 느껴지는 어떤 슬픔... 이런 게 느껴지는데,, 반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이 맘 속에 떠오를 새는 없이. 아, 그런 것도 있겠다. 소설을 읽으면 읽는 내가 여자라도 남자주인공에 동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요. ㅎㅎ 나만 그런가?

트레바리 2011-08-15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희랍말 '이데아'가 '본다'가 아닌 '듣는다'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서양 철학이나 문명 자체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거라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어쨌든 "바라봄의 감옥에 갇힌 수인"에 대한 기막히고 흥미진진한 사랑 곡절에 다시 혀를 내둘렀습니다.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 영묘는 17세기의 어느 왕이 둘도 없는 죽은 왕비를 기려서, 22년간 매일 2만여의 노동자를 동원해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은 것이라 합니다. 예전 티비에서 본 기억대로라면, 묘를 지키는 시종의 木像에 손발톱과 머리카락 한올까지 실제 것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심어놨다고 하더군요. 그 왕도 아마 죽은 왕비의 눈과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을 겁니다... 과연,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텍스트 횡단과 교직의 재미를 늘 보여주셔서, 저도 모르게 자꾸 어설피 따라하게 되네요..^^

모든사이 2011-08-15 22:44   좋아요 0 | URL
텍스트 횡단과 교직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저것 읽은 것을 뒤섞어 쓰는 글인데, 그게 때로는 지나친 텍스트에의 몰입을 막아주기도 하더군요. 텍스트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채택한 우회적 글쓰기랄까요.. 사실 글쓰기랄 것도 없지요. 9 to 6의 삶을 사는 월급장이일진대, 책을 들춰보는 것은 그런 일상에 대한 초월의 욕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월하고 싶으나 초월은 못되고 주저앉아 버리고 그 텍스트에 대한 글쓰기 마저 꽁꽁 마음을 감추고 오로지 텍스트에 몰입하여 글을 쓰게 되는 이 너절함이라니 말이지요.

트레바리 2011-08-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시다면 혹시, 정명환 선생의 아래 대목이 좀 위안(?)이 되시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령있게 요약하는 재주가 없고, 필자의 본지를 왜곡할까 저어해서, 많이 길지만 그대로 옮겨 봅니다..^^
"고래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노동하는 자아와 지적, 정신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는 자아의 양자로 구분해 왔고 그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이중의 활동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주경야송’이라는 옛 중국의 구절이다. 한데 그 당시에는 인간이 자신을 이분하는 것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밭갈기와 책읽기라는 두 가지 활동은 이율배반적이거나 대립적이기는커녕, 도리어 연속적이며 동질적이었다고조차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양자가 모두 인간의 존재를 다스리는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터득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가 되면 사정은 벌써 달라진다. 그는 망원경의 렌즈를 연마하는 일상적 노동과 철학적 탐구 사이에 어떤 긴밀한 관련을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양자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모순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생계를 위한 노동 때문에 사색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가 본질상 양립하기 어려웠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정명환, "세계화와 인문학자", <현대의 위기와 인간>에서)

모든사이 2011-08-17 08:2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호모파베르와 호모사피엔스를 일부러 '분열'시키는게 더 나을 때가 있더군요. 의도된 정신분열이 사는데 더 편하더라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