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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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슈테판 츠바이크를 내리 읽게 되었다. 1장에서 멈춘 채 오랫동안 묵혀 있던 그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 나머지를 읽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합스부르크 제국 하의 오스트리아, 유태인, 작가, 평화주의자로서 살았던 그의 위치는 참으로 독특하고도 기구한 것이었다. 바로 그 자신의 위치 때문에 그의 삶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겪어야 했고, 그를 양육한 과거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여러 나라로 찢겨져 지도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유태인 친구 동료 친척들은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져버렸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평화주의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결국 먼 이국 브라질에서 자살을 하는 것으로 꺾여야 했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특정 세대, 나아가 세계사의 문화적 황금기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인 것과 마찬가지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1차 대전 이전의 유럽인들에게는 여권도 관세도 필요없었다, 라고 말할 때, 매우 놀라더라는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과연 그랬다. 그들에게는 국경의 개념이 없었다. 여행을 하고 싶으면, 괴테처럼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밤, 홀연히 이탈리아 여행을 갈 수가 있었다. 국경검문소의 불필요한 절차도 필요 없었으며, 검색대를 통과할 필요도 없었다. 이동과 거주의 자유로움은 유럽 지식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로 이어졌고, 츠바이크가 정신의 조국으로 여겼던 유럽 인문주의의 세계를 낳았다. 그는 19세기 유럽이 낳은 최후의, 그리고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인문주의의 적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히틀러의 등장과 2차 대전의 와중에 유럽정신의 몰락과 파괴를 견딜 수 없다며 자살했을 때, 그와 더불어 19세기의 위대한 정신세계는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츠바이크가 회고하는 오스트리아, 그 중 빈의 문화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빈은 야만의 문화에 저항하는 라틴문화의 전초기지로서 건설된 당대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늙고 쇠약한 제국의 왕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는 프로이드,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코코슈카가 있었으며, 말러와 쇤베르트, 그리고 글룩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 음악의 영원한 일곱 별들이 있었고, 경제학의 오스트리아학파가 있었다. 쇤브룬 궁과 이 오래된 도시를 가로지르는 링슈트라세. 이 도시의 문화를 건설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은 츠바이크처럼 많은 경우 유태인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를 지배하는 거대한 도덕적 이중성이었다. 거리에는 곳곳에 창녀가 넘쳐 났으며 숱한 지식인들이 매독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엄격한 도덕율을 내세웠던 곳. 빈은 성적 억압이 충만한 도시였으니 프로이드의 이론이 여기에서 나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츠바이크에게 국경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그는 유럽 당대의 문사들과 두루 교유했다. 파리에서는 발레리와 시를 함께 읽고, 로맹 롤랭과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성명을 준비했으며, 베를렌느와 압생트를 들이켰다. 조각에 몰입하는 로댕의 작업을 감동적으로 지켜보았고(“그때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아니 거의 모든 지상의 성취의 영원한 비밀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 집중, 모든 힘과 모든 감각의 응집, 그 무아지경, 모든 예술가가 행하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독한 은둔자 라이너마리아 릴케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런던에서는 고독한 천재 윌리엄 블레이크와 만나고 1차 대전 와중에는 취리히의 카페에서 제임스 조이스, 러시아의 망명 지식인들과 반전과 평화를 말했다.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학문>의 그 비코가 있었고, 무솔리니조차 츠바이크의 애독자였다. 세기말 세기초의 이런 풍경은 빌리 하스의 <벨 에포크> 같은 책이나 단 프랑크의 <보엠>같은 소설에서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츠바이크처럼 당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코스모폴리탄으로부터 듣는 회고는 무게감이 확실히 다르다.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에서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를 말하지만, 인터넷도 이메일도 없던 시대에 세기초 지식인들의 연대는 사뭇 감동적인 바가 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장 크리스토프>의 작가 로망 롤랭이 당대 유럽지식인 사회에서는 지도적 인물이자 지적윤리적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츠바이크나 롤랭이나 위대한 인물의 에 집착했던 작가이고, 또 그러한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이룩한 문화의 높이와 정신적 성취를 말하려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긴밀한 우정은 이해가 된다. 그래, 어쩌면 이 가볍지 않은 책을 내가 술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인물의 삶과 그 주변에 대한 오랜 호사취미에 부합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차이를 넘어선 단순한 부러움 이상의 그 무엇이다. 국가와 국가, 상이한 문화권 사이, 서로 다른 문화적 양육의 과정을 거친 지식인들 사이의 연대감각이 1차 대전 이전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관습이자 하나의 문화였다는 것,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츠바이크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자각 중의 하나이다.

 

전쟁으로 인해 이스탄불의 뒷골목으로 피신한 아우에르바하는 참고할 책이 없어 기껏 몇 권의 책을 읽고 읽어 <미메시스>를 써냈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전세계에서 6천만권 이상의 책이 팔렸던 베스트셀러 저자인 츠바이크는 유럽 최대의 장서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장서도 없이, 문화적 불모지나 다름없던 브라질에서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하여 그가 살아낸 당대 유럽의 문화를 기록한 것은 보기 드문 지적 장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인문주의의 안쪽에는 문화예술의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원천이라는 것, 그리고 평화와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역동적인 서술은 1차대전 직전 빈 거리에 나부끼던 호전적인 광기와 불가해한 전운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히틀러의 등장과 2차대전에 관한 서술은 몰락과 하강의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그 최초의 인류사적 광기로서 1차대전 직전의 분위기는 한 사회에 전쟁과 파시즘이 어떻게 전염병처럼 감염되어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 최초의 군중의 출발에는 뭔가 당당한 것, 감동적인 것, 그리고 매력적인 것까지 내포되어 있어 이것을 피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에 대한 모든 증오와 혐오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한동안의 추억을 나는 나의 생애에서 놓치고 싶지 않다. 수천 수십만의 사람들은 평화시에 더 한층 느껴야 했던 일, 즉 그들은 하나라는 것을 이때만큼 느꼈던 일은 없었다. 2백만의 한 도시, 거의 5천만의 한나라에서, 그들은 세계사에 결코 다시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 각자는 그 미미한 자아를 불타고 있는 군중 속에 서로 체험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는 모든 이기심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정화한다는 것을 그때에 느꼈던 것이다. 신분, 언어, 계급의 모든 구별은 그 순간 넘쳐나오는 형제애의 감정으로 덮였다. 낯선 사람들도 거리에서 서로 말을 나누었고, 오랫동안 서로 피하고 지내던 사람들도 서로 손을 맞잡았으며 도처에 생기 넘치는 얼굴이 보였다. 각 개인이 자기 자아의 드높여짐을 체험했고, 그는 이제는 이전의 고립된 인간이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집단적 광기는 이토록 아름다운 공동체성으로 빛난다. 이 대목에는 파시즘의 속성과 신화가 모두 담겨 있다. 불과 얼마 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에 시달리고 갈증에 괴로워하면서 몇 주일을 참호나 진지에서 빈둥거려야 한다는 것, 적은 구경도 못하고 멀리에서 분쇄되고 사지를 절단 당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궁핍과 약탈, 파괴의 나날을 거친 뒤에 조각조각 찢겨져 버렸다. 인상적인 대목은 여성적 섬세함으로 빛나는 시인 릴케가 어울리지 않은 군복을 억지로 입고 츠바이크 앞에 나타난 일, 군국주의의 망령이 한 여리고 섬약한 시인을 어떻게 몰락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어색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애처로울 정도로 어색하게 보였다. 옷깃은 너무 답답하게 조여 있었고, 어떤 장교에서나 장화를 찰칵 부딪히고 경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당황해 했다.”)

 

 

 

 

히틀러는 츠바이크의 책을 불살랐고, 그가 준비하려던 오페라도 나찌의 심의 끝에 불허되었다. 독일을 벗어나 피신한 런던에서는 망명한 프로이드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이 살육의 시대에 한없이 죽어가는 희생자들 가운데서도 기념할 만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이 그의 관을 영국의 땅 속에 묻었을 때, 우리들의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이땅에 바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헌사만큼 육중한 무게감을 갖는 것도 드물 것이다.), 츠바이크는 브라질로 망명한 뒤 이 긴 자서전을 쓰고 아내와 함께 음독 자살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와 아내의 죽음은 완벽한 체념의 어떤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있고, 아내는 그의 목을 안고 얼굴을 품속에 묻고 있다. 절망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숙명적 체념 같은 인상이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과거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성취된 것은 모두 멸망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몸 바쳐 살아온 우리의 고향, 유럽은 우리의 삶을 훨씬 넘어서 파괴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뭔가 다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옥과 연옥을 지나가야 한단 말인가.

 

태양은 풍부하고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내 앞에 나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번 전쟁의 뒤에 지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그 그림자는 내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밤낮으로 나의 모든 생각 위를 떠다녔다. 아마도 그 그림자의 어두운 윤곽은 이 회상의 의 많은 페이지 위에도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유태인답게(?) 자신이 정주하던 곳에서 뿌리 뽑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유태인들처럼 시온주의자도 아니었으니 그에게 인종의 조국은 없었다. 그에게 조국이 있다면 빈 혹은 유럽의 문화계쯤이었을 것이다.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자기의 전부를 투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의 자살은 히틀러의 광기에 절망한 지식인의 자살이라기보다는 좀 더 큰 차원의 인류사적 자살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을 이해하고 경험한 자만이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유럽문화의 절정기를 살아본 자만이 그것의 몰락이 주는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장군인, 국경과 세관, 출입국관리소의 직원들로 둘러싸인 국민국가시대에 그와 같은 지식인은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말한 이상이 19세기의 본질을 알았을 리 없다. 기껏해야 번역과 수입으로 이뤄진 重譯의 동경에서 잠깐 그것을 맛보았을 뿐일 것이다. 이 책을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읽었는데, 이런 여름에는 가벼운 책보다는 무겁고 두꺼운 책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트리아의 빈과 짤즈부르크는 가보지 못한 곳이다. 츠바이크로 말미암아 세기말 세기초의 빈에 대한 흥미가 생겨났는데, 1장 링슈트라세에서 머물고 있는 <천재들의 붉은 노을 : 세기말 비엔나>를 다시 읽어야 겠다는 의욕이 이제야 샘솟는다. 이것도 부채감이라면 부채감이다. 그런데, 짤즈부르크의 츠바이크 집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의 수많은 수집품들과 장서들은 그대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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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9-1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그리 잘 알지는 못하면서도 매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몇 권씩 구해서 읽고 있지요. 비극적인 그의 최후는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 장서는 힐링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인데, 브라질에서의 삶이 얼마나 쓸쓸했을지 짐작해봅니다.

모든사이 2013-09-12 15:23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는 장서 외에도 괴테같은 명사들의 필적 수집가이기도 했죠. 댓글 감사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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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새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면서 그가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무겁고 진지한 소설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노벨문학상 반열에 오르는 작가라면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좀 더 나은 소설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의 팬들은 이 선명하게 엇갈리는 데, 나는 거의 빠에 가까웠고 그의 소설 대부분을 읽어온 처지라 이번 소설이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레이먼드 카버와 피츠제랄드의 순정한 팬인 그가 써온 많은 소설들은, 이들 미국 소설의 문체와 스토리 감각을 자기 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사소설적인 전통에도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경쾌하고 쿨한 그의 소설이 매력적이었고,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인물들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하루키가 일종의 팬시상품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팬시상품은 독특하고도 통일적인 캐릭터에 기반한 유사상품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일정한 고정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팬시상품의 캐릭터는 좀처럼 변하는 법이 없다. 헬로키티는 그걸로 아무리 다른 것을 만들어도 헬로키티여야 한다. 하루키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의 전작들인 <노르웨이의 숲>이거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유년의 기억들, 과거의 흔적들이 오늘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흔적들을 찾고 대면한다는 기본 스토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배경과 인물의 속성들이 조금 달라졌을 뿐 반복은 여전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에서 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이 뜨겁고 축축한 여름에 그의 소설은 복잡한 두뇌회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설이고, 점점 더 부실해져가고 있는 내 두뇌가 소화하기에는 적당한 정도로 가볍다. 하루키의 캐주얼리즘은 역설적이게도 이 지리멸렬의 한국사회가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기호품이다.

 

<색채>는 단순화하자면 주인공 쓰쿠루의 발기부전 극복기. 쓰쿠루는 고교시절 그와 단짝으로 어울리던 그의 친구 네 명으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절교를 당한다. 그가 고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 그는 아무런 설명도 맥락도 없이 자신의 소우주와 같았던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자살충동과 함께 이 젊은 날의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그에게 사라라는 연상의 여인이 찾아오고, 그녀의 충고대로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 결과 그가 알게 된 것은 쓰쿠루의 친구들이 그를 왕따시킨 것은 여리고 섬세했던 멤버 시로(유즈)를 강간했다는, 시로 자신의 주장때문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이 사춘기 공동체는 붕괴되고 만다. 과거의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시로의 우울증과 신경증이 빚어낸 판타지였다는 것이다.

 

쓰쿠루를 자살충동으로 몰아갔던 이 왕따사건은 이 다섯 명의 공동체가 사춘기의 욕망과 열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억압함으로써 유지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색채가 없다는 것은 쓰쿠루의 이름에서 비롯하는데, 이름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 또한 색채가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중립적인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색채가 없는그가 합류하여 헌신하고 있는 이 공동체에서 성적인 욕망은 인위적으로 거세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공동체는 성적 욕망의 돌출(강간이라는 의사사건) 앞에 무기력하게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사춘기 공동체에서 욕망의 거세는 인위적인 억압의 산물이며 부자연스러운 절제의 결과다. 아주 프로이드적이게도, 쓰쿠루의 억압된 욕망은 유즈와 에리 두 여자 멤버와의 섹스라는 꿈으로 등장한다. 욕망을 거세한 쓰쿠루는 에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고, 에리와 유즈 사이의 보이지 않는 욕망의 충동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쓰쿠루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성적인 억제가 불러온 긴장감이 적지 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쓰쿠루는 그렇게 상상했다. 후일 그에게 생생한 성적인 꿈을 꾸게 한 것도 아마 그런 긴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언가였으리라. 그것은 또한 다른 네명 에게도 무엇인가를(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른다. 시로는 아마도 그런 상황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감정 조절을 요구하는 긴밀한 인간관계를 더는 버텨 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멤버 중 한명인 시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어린 시절의 관계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쓰쿠루에게 섹스는 없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는 인위적으로 욕망을 거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되는 연애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새로운 연인으로 등장한 사라와의 정사도 발기부전 앞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니, 그가 과거의 흔적을 찾아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은 거세된 욕망의 시간을 찾아, 그것이 결과한 사건들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 이후에야 그의 발기부전은 치료될 수 있고, 사라와도 온전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에게 이라는 코드는 거의 모든 소설에 내재되어 있거니와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프로이드의 성적 억압에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성적, 문화적 억압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사춘기의 성적 억압에 관한 것이자 프로이드식 치료를 받는 한 사내의 발기부전 극복기, 심리치료를 위한 글로벌한 순례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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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여행법 - 세상의 모든 길들
미셸 옹프레 지음, 강현주 옮김 / 세상의모든길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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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옹프레가 쓴 <철학자의 여행법>의 원제는 ‘theorie of voyage’, 그러니까 여행의 이론쯤 되겠다. 여행기니 가이드북이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론은 처음이다. 백번 양보해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까지는 인정하더라도 여행에 대해 무슨 이론이 필요하단 말인가. 목적지를 정하고, 일정을 예약하고, 짐을 꾸리고, 여행지를 방문하는 그 단순한 일에 무슨 이론적 고찰이 개입될 수 있나. ,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전국민의 애독서가 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이 알아야 보인다인문주의 여행의 길을 터놓았을 때, 우리에게 여행은 길 위에 스민 삶의 무늬[人文]를 이해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여행이라는 자신의 행위와 결과를 비춰보는 준거로서 여행의 이론도 성립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 책은 인트라다로 시작해 코다로 끝을 맺는데, 여행이 오페라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서곡과 격렬한 종지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행의 서곡은 갈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뼛속 깊이 유목민의 기질을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도리없이 때가 되면 여행을 갈망하게 되고 짐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방콕은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을 위배하는 부자연스러운 짓. 이동에 대한 열망, 변화에 대한 열정, 움직임에 대한 욕구, 자유에 대한 숭배, 돌발 행위에 대한 욕망, 이 모든 것들이 여행자들의 유전자 안에 있다. 여행자들의 예수는 나는 어디에서도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도시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성문을 떠나는 영원한 출발자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다.

 

여행의 욕망이 생물학적 본성인 것처럼 실제 여행의 주체도 우리가 아니다. 무슨 얘기인가. 우리가 여행의 목적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고 그 장소에 의해 우리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지도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단어, 이름, 장소, 지역이 갑자기 우리의 주목을 확 끌어당기는 순간이 있고, 우리는 그에 이끌려 결국 그곳을 여행지로 선택한다는 얘기다. 이 판단의 리얼리즘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게 한때 그것은 모로코의 탕헤르였고, 스페인의 아랑후에스였으며, 런던의 블룸즈버리였으니, 내 기어이 이곳들을 가고 말리라.) 여기에 목적지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풀려 주는 것은 독서다. 그 책은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다. 추천하건대,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라거나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중국과 일본같은 책쯤 되겠다. 이럴 때 우리가 욕망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 역시 우리를 만들게 된다.”

 

이 철학자의 여행에 대한 권고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부분은 연인과 여행하지 말고 친구와 여행하라는 대목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두 이성간의 사랑은 위험해지거나 깨지기 쉽다. 낯선 남자(여자)와의 자유로운 교류를 방해하고, 상대에 대한 의무로 인해 여행의 자발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반면 시간과 공간 열정을 함께 쓰는 동안 우정은 견고해지고, 한 사람의 피로는 다른 사람의 지구력을 강화시켜 주고, 한 사람의 부족함은 다른 사람의 풍족함으로 채워진다.” 그래, ‘신혼여행은 여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비로소 갖게 된 둘만의 시간과 공간일 따름이고, 부부끼리의 여행에서 아옹다옹하는 커플이 숱하게 많았으니, 이 역시 여행의 리얼리즘에 해당될 수 있겠다.

 

이 철학자는 이밖에도 여행에 대한 다채로운 통찰들을 풀어놓고 있다. 사하라 사막의 일출시에 뜨는 오렌지색과 중세 도시의 그늘진 골목길을 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거닐었던 시칠리아 사원의 오돌도톨한 바위를 만지는 것과 같은 감각의 확장이라는 것,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세계주의자가 되는 경험이라는 것, 비행기 여행을 통해 우리가 위대한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파스칼의 전언을 실감케 하는 순간) 등이 그러하다. 이 점에서 옹프레는 느림 혹은 걷기의 예찬자가 아니라 글로벌한 세계를 긍정하는 기술예찬론자이다. 그에게 노트북과 스마트폰은 여행의 방해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행 경험을 제공해주는 기술적 조건이다.

 

이 책은 여행 계획을 세우기 한참 전에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지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행은 우리 안에 있던 상처와 고통, 권태와 번민, 아픔과 불행, 슬픔과 우울을 깊이 들여다보는 에고티즘’(자아주의)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거칠게 말해 자존감의 회복을 위한 여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먹고사니즘이 지배하는 자존감 제로의 시대에 확실히 여행을 가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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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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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읽다. 펭귄 클래식판의 동명 소설에는 <가정의 행복>, <악마>, <신부 세르게이>와 함께 이 경장편 소설이 실려 있다. 세종로 어느 건물의 한 구석에서 일요일 당직을 보며 이 19세기 소설가의 파국적 상상을 못마땅해 하며 책장을 넘겼다. 톨스토이는 결혼과 사랑, 가정과 행복이라는 당대 러시아인의 일상을 그리는 데 탁월한 소설가라는 생각이 든다. 계몽주의자인 이광수가 열광하던 농업사회주의적 계몽사상가보다는 이런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줄 때 더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톨스토이는 일제 강점기의 이광수가 아니라 차라리 현대의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치정과 질투를 뺀다면, 아마도 음악의 독한 전염력에 대한 사유가 불거져 나올 것 같다. 어떠한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직접성의 예술로서 음악이 가진 강력한 호소력은, 이 소설에서 치정과 질투의 맹목성과 유비관계를 이룬다. 아내와 바이올린 연주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사내는 사건의 원인은 음악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음악 이전에 애정도 욕망도 사라진 나른한 부부관계가 있었음에도 그것은 치정살인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게 사내의 믿음이다.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렇게 맹목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음악이 된다.

 

그들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처음 나오는 프레스토를 아세요? 아시냐고요? ... 이 소나타는 정말 무시무시한 음악입니다. 특이 이 부분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니 음악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뭔가요?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음악이 도대체 뭐지요? 음악이 영혼을 고양시킨다고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이고 거짓입니다! 음악은 무서운 작용을 합니다. 어쨌든 제게는 그랬지요. 음악은 영혼을 고양시키지 않습니다. 음악은 영혼을 고양시키지도 천박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음악은 영혼을 자극할 따름입니다.”

 

음악은 그것을 작곡한 사람의 정신세계로 곧바로 저를 데려갑니다. 저는 작곡가와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와 함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옮겨 다니는데, 제가 왜 그렇게 되는 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작곡한 베토벤은 왜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었는지 틀림없이 알고 있기에 그 상태가 의미가 있겠지만, 제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음악이 자극은 하지만 끝을 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 소설에서 아내와 바이올리니스트간의 불륜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가정될 뿐 톨스토이는 그 둘의 관계를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사내의 질투가 만들어낸 판타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이 사내의 음악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욕망에 대한 인식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 음악이 맹목이라면, 살인으로 치닫는 질투도 맹목이다. 그것은 살의를 자극하고 급기야 코르셋을 뚫고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는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치정극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그러므로 한 사내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결혼, 질투와 욕망의 심리 드라마로 보는 게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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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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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왜 걸작이고, 명작인지 모르겠다. 미국태생의 자유분방한 '아가씨' 데이지 밀러가 고루하고 인습적인 19세기 유럽귀족문화가 만든 편견으로 몰락하는 이야기. 그녀는 잘생긴 이탈리아 청년과 숙녀가 가서는 안될 곳에 함께 산책을 하고 거기서 얻은 열병으로 죽는데, 이것은 그녀의 분방한 자유가 19세기 유럽귀족들의 삶의 방식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고루한 유럽문화에 의해 천박한 미국문화가 죽는 셈인데,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일 것 같다. 19세기 유럽은 벨에포크를 정점으로 쇠락하고, 헐리우드를 앞세운 자본주의 미국문화가 그 자리를 잠식했으니 말이다. 유럽은 미국에 진 것이다.

 

단편이라기 보다는 조금 길고, 장편은 더더욱 아닌데, 펭귄 클래식 판은 앞에 데이비드 롯지의 긴 서문과 헨리 제임스의 글을 함께 실어 장편소설의 두께가 되어 있다. 열광적인 사랑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이렇다할 드라마적인 요소도 없고, 다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분방할 뿐인 미국 젊은 여자의 행태 정도가 전부인 소설. 그녀의 성격(character)이 조금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있을 뿐인 이 소설이 고전에 반열에 드는 이유를 도무지 알수 없다. 오후 한때 무료한 시간을 함께 했으나 실망스러운 소설이다. 굳이 누구에게 읽어보라 권할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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