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요새 본인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글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 소로우의 대표작인 <월든>을 전부 읽었으며 이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인 <시민의 불복종>이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이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요근래 <촛불시위>를 통해 과연 '시민의 불복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굉장히 궁금하였다.
 

 이 책은 시민의 불복종, 돼지 잡아들이기, 가을의 빛깔들, 한 소나무의 죽음, 계절 속의 삶, 야생사과 이렇게 총 6개의 다른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 중 첫번째 <시민의 불복종>은 최초 출판되었을 때는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였으나 <시민의 불복종>이란 이름으로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주장하며 모든 정부가 때로는 불편한 존재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정의'인 정부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내가 허용해 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며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주장한 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며 투표는 일종의 도박이므로 불의의 법들이 존재하면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라고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이에 대한 글쓴이의 답은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하나의 방법으로 글쓴이가 취한 것과 같이 불의의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것 등이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기득권자들은 스스로 법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불의의 법을 지키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단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양심과 생각이 지시하는데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말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현재 <촛불 시위>도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며 과거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는 전부 '테러리스트'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요새 어떤 국회의원이 집시법을 강화하는 법률을 국회에 상정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지켜볼 문제이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는 세금이 '이라크 전쟁'을 뒷받침하는데 쓰인다는 점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외 글쓴이의 글들은 자연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일종의 [노장 사상]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글쓴이가 공자에 대해 박식한 점을 가만하면 어느정도는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소로우 특유의 위트있는 문체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은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다.

 

 결국 '요새 시절이 하 수상'하고 촛불시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시민의 불복종>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과거 멕시코 전쟁을 통해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글쓴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나름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월든>이란 책을 알게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본인이 개인적으로 2007년 최고의 책으로 꼽는 <지식e>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월든>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껏해야 [자연 보호]를 강조하는 평범한 책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동안 자연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육 혹은 잔소리를 들어왔던가? 그런 잔소리를 듣기에도 머리가 아픈데 괜히 시간과 노력을 들어서 스스로 다시 한번 '뻔한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에 독서클럽에서 이번주에 읽어야할 책으로 <월든>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국 본의가 아니게 <월든>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단 생각보다 두꺼웠다. 기껏해야 [월든 호수]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옮긴 책인데 왜이리 두꺼울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만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마치 [로빈슨쿠르소]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책의 글쓴이는 정말로 '위트'가 많고 '반어법'에 뛰어나서 중간중간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월든 호수의 자연을 독자가 직접 월든 호수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문학적으로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었다.

 

 <월든>의 뛰어남은 이런 1차원적인 <월든 호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데에 그치지 않는다. 글쓴이는 더 나아가 19세기에 팽배하던 물질문명자본주의, 그리고 국가의 횡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이 책을 통해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글쓴이가 <월든>을 쓰게 된 목적이 바로 자신이 아무런 연고나 도움 없이 물질문명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여 이런 삶이 오히려 더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물질문명의 허구를 고발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글쓴이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삶의 질은 떨어지게 되고 소모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휴식과 영양을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반전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면서 기존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국가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거북했던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글쓴이 자신이 <월든>에서 인도의 '베다 경전'이나 공자의 '논어'등을 수 없이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미개인이라는 둥, 문약한 중국인이라는 둥, 아랍인보다 우리가 더 우수하다는 둥 [백인 우월주의], 혹은 [우생학]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꾸준히 받게 되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글쓴이가 주장하는 '노예 해방'도 자신이 흑인과 동등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뛰어난 인간으로서의 자비심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자신은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서 이렇게 좋은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힘들게 물질문명에 빠져 사는 것에 대한 우월감이랄까? 아니면 왠지 독선독단에 빠져있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민감해서일까?

 

 이렇게 비록 비판 받을 점이 있지만 이 책은 현대에는 긍정적인 면을 좀 더 중요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재도 [인종주의]가 알게 모르게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환경파괴][물질문명]에 대한 경고로써 이 책의 존재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참고로 많은 <월든> 번역본이 존재하지만 이 책이 가장 잘 번역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옮긴이가 직접 월든호수도 방문할 정도로 노력을 많이 하였으니 혹시 잘못된 번역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이라면 이 책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고백하건데 만약 이 책을 독서클럽에서 읽으라고 권장한 책이 아니었다면 본인은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사람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제목도 아닐뿐더러 이 책의 제목만 보아서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책은 번역된지도 오래되었으며 책의 재질 또한 요새 많이 사용하는 매끈매끈하고 하얀 종이가 아니라 마치 <똥 종이>같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책으로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왜 <니어링 부부>의 삶이 많은 귀농 부부의 Role model이고 아직까지도 이 책이 읽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1900년대 초반에 반전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많은 부작용에 대해 고발하고 많은 강연을 하였으며 스스로 농촌으로 귀농하여 스스로 그런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런 그들의 삶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것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그들의 삶이 과연 현재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있다.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물질적 평등]을 가져오겠지만 이런 경우 사회적, 과학적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뎌딜 수 있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도시적 삶에 적응하려다가 반전운동 등으로 반역죄로 몰리고 직장을 잃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으며 남에게 봉사하는 삶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은 산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점 말고도 그들은 끝까지 자신이 목표했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요즘 세상에는 이른바 [변절]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니어링 부부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은 요즘 세상에서 본 받을 필요가 있는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위인들과 달리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까지 살 정도로 장수를 누렸다. 비록 사람들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있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면 공기좋고 물좋은 농촌에서 스스로 육체적 노동을 하면서 사는 삶이 최고라는 것을 그들 부부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한 거리를 던져주고 있지만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 나오는 부분과 [정신척 체험], [영혼] 등에 언급한 부분은 조금 가려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리고 스코트 니어링의 아내인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이기 때문에 그들 부부의 삶에 대해 좋은 면만 강조해서 쓴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적 삶과 자본주의가 이 세계의 절대 원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좀 더 다르고 새로운 삶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워보는 것이 어떨까? 물론 이 부부의 삶에 대한 비판도 함께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199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으로 책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독서 클럽>을 통해 거의 '반 강제로' 읽게 된 책이다. 특히, 독서 클럽의 리더되는 분이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 선생님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 젊은이의 호기로써 과연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렇게 칭찬을 하실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책을 읽게 된 경로로 거의 '반 강제적'이었고 또 이 책의 글쓴이에 대한 호승심도 있어서 굉장히 전투적이고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호모 에티쿠스], 즉 윤리적 인간이란 제목을 가지고 서양 철학사를 통해 나타난 [윤리학]의 흐름을 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원래 강의 내용이었던 것을 묶은 것이라서 일반적인 철학서적과 달리 구어체로 쓰여져 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하였다. 앞서서 읽은 칸트 철학에 대한 책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먼저 이 책은 모든 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 '좋은 것'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혼, 정신의 온전함이 좋은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악은 오직 선에 기생해서만 악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여도 계속되는 것은 선과 정의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탁월함(Arete)의 윤리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 문명, 서양 문명의 힘이며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탁월함에 매혹되기보다는 질투하고 시기하는데 익숙하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행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축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 다만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며 여러가지 정신의 탁월함(행복) 중 과조적 삶 속에서 의 행복, 즉 정신의 활동의 순수한 사유와 관조의 활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고 다만 우리가 정념과 어떤 식으로 관계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에 '중용'(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중용의 길을 가기위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르켜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 부름으로서 일상의 삶이 도덕적 반성의 현장임을 강조하였다.

 

 이제 유명한 스토아 윤리학과 에피쿠로스 윤리학이 소개된다. 스토아 윤리학은 개인과 전체가 충돌할 때 언제나 전체의 편을 드는 철학이며 전체가 먼저 있고 부분은 오직 전체의 지체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전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스토아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정신의 덕이므로 비이성적인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은 요구하였으며 결국 정념 없는 상태 '아파테이아'를 추구하라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에리쿠로스 윤리학은 개인의 편을 들었던 철학으로 스토아 철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하였다. 즉, 세상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는 은둔자를 위한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서로 고통을 주지도 받지도 아는 것을 추구하며 결국 쾌락주의는 개인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쾌락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일이 보다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얻는데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임에 비해 그 자체로서는 쾌락을 주는 일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손상시키고 도리어 한때의 코락보다 더 큰 고통을 낳는다면 그것을 피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고통도 불안도 없는 영혼의 절대적 평온함(아타락시아)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 철학이었다.

 

 이제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윤리학의 대표주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모든 합리적 설명을 초월하는 근원적 비약으로서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선악의 개념을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인 범주로 보기보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이 근재성을 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근대는 모든 것이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시대이므로 그의 철학으로부터 근대적 철학이 사작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으로부터 '나'가 철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렇게 '나'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근대를 가리켜 주관주의 혹은 반성의 시대라고 특징짓게 되었다. 고대적 윤리학은 객관주의적 윤리학이며 이성 중심의 윤리학인데 비해 18세기부터 더이상 도덕의 문제를 객관적 존재나 이성의 힘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은 어떤 당위에 관계되어 있으며 도덕의 본질 역시 '나'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도덕적 능력을 이성능력과 구별하였으며 이성을 통한 정념의 지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선도 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중립적 능력에 불과하였다. 결국 동정심이랴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동정심을 강조한 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고립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칸트가 등장하는데 글쓴이가 칸트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해서 자그만치 3장을 칸트에 할애하고 있다. 칸트 윤리학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처음으로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윤리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도덕을 행복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으며 도덕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이런 모든 시도를 배척함으로써 도덕의 순수성을 확보하였으며 동정심은 자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덕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그는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바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맨 마지막 장에 글쓴이의 윤리관이 잘 나타나 있지만 결국 이를 통해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 것.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 것.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을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밖에 이 책에서 높이 살 점은 외국어를 발음되는 대로 사용한 것이다. 예컨데 파이돈 = 파이드로스, 아테네=아테나이로 적었는데 이는 굉장히 긍정적인 면이다. 원칙적으로 외국어는 발음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외국어가 발음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이런 노력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윤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굉장히 성공적이다. 게다가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서를 이렇게 출판한 [한길사]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요새 과연 '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덧붙여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선생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이다. 하지만 한가지 충고하자면 이 책의 근본은 '철학' 서적임을 명심하고 도중에 읽다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파리 사이언스 - 과학선생 몰리의 살짝 위험한 아프리카 여행
조수영 지음 / 효형출판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을 선택하든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의 제목은 '사파리 사이언스'인데 이는 [사파리][사이언스]의 합성어라고 쉽게 알 수 있다. [사파리]라 함은 일반적으로 여행을 뜻하는 단어이고 [사이언스]는 과학을 뜻하는 영어단어이다. 이런 책 제목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어떻게 여행과 과학의 조합이 가능할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작업을 글쓴이는 놀라울 정도로 수월하게 완성시켰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완성한 글쓴이는 물리학을 전공한 평범한 대한민국의 중학교 여교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쉽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높은 산에는 물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혹시 화학을 전공하여 물리화학을 배웠다면 PV graph를 통해 높은 산에는 압력이 낮아서 물이 고체와 기체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지만 직접 글쓴이가 찍은 킬리만자로 산의 사진과 함께 배우게 되면 학생들 입장에서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프리카 여행기에 가까운 책이다. 특히 동아프리카를 북남으로 횡단한 여행기인데 혹시라도 동아프리카 여행에 관심이 있는 경우에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하고 유용한 정보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1페이지당 사진이 1개 이상 꼭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로 인해서 마치 자신이 동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과거 아프리카 침략의 역사를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유명한 다이아몬드 유통회사인 '드비어스'의 설립자 세실 로즈가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독점하였는지 잘 알 수 있었으며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사를 통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대짐바브웨 같은 아프리카의 문명을 보면서 흑인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우생학'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아프리카가 침략을 받았던 역사에서 벗어나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떳떳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 하기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편집에 아쉬운 점이 한가지 있다. 가끔 1 페이지 전체가 사진으로 구성된 경우가 있는데 가끔 그 사진때문에 글자가 안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글자를 검정색 말고 다른 색으로 하여 글자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행 도중에 만난 한국인들은 전부 한국 여교사라는데 한국에서 여자의 직업으로 최고로 치는 것이 [교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여름, 겨울마다 외국으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직업이 교사말고 있을까? 나는 언제쯤 외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요근래 보기 드문 아프리카 여행서이자 과학을 접목한 굉장히 훌륭한 책이다. 게다가 수많은 사진과 쉽게 읽히는 문체로 인하여 마치 실제로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당장 내일이라도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비록 여러가지 제약으로 인해 직접 아프리카로 떠날 수 없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아프리카를 체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