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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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책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독서 클럽>을 통해 거의 '반 강제로' 읽게 된 책이다. 특히, 독서 클럽의 리더되는 분이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 선생님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 젊은이의 호기로써 과연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렇게 칭찬을 하실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책을 읽게 된 경로로 거의 '반 강제적'이었고 또 이 책의 글쓴이에 대한 호승심도 있어서 굉장히 전투적이고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호모 에티쿠스], 즉 윤리적 인간이란 제목을 가지고 서양 철학사를 통해 나타난 [윤리학]의 흐름을 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원래 강의 내용이었던 것을 묶은 것이라서 일반적인 철학서적과 달리 구어체로 쓰여져 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하였다. 앞서서 읽은 칸트 철학에 대한 책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먼저 이 책은 모든 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 '좋은 것'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혼, 정신의 온전함이 좋은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악은 오직 선에 기생해서만 악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여도 계속되는 것은 선과 정의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탁월함(Arete)의 윤리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 문명, 서양 문명의 힘이며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탁월함에 매혹되기보다는 질투하고 시기하는데 익숙하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행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축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 다만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며 여러가지 정신의 탁월함(행복) 중 과조적 삶 속에서 의 행복, 즉 정신의 활동의 순수한 사유와 관조의 활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고 다만 우리가 정념과 어떤 식으로 관계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에 '중용'(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중용의 길을 가기위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르켜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 부름으로서 일상의 삶이 도덕적 반성의 현장임을 강조하였다.

 

 이제 유명한 스토아 윤리학과 에피쿠로스 윤리학이 소개된다. 스토아 윤리학은 개인과 전체가 충돌할 때 언제나 전체의 편을 드는 철학이며 전체가 먼저 있고 부분은 오직 전체의 지체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전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스토아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정신의 덕이므로 비이성적인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은 요구하였으며 결국 정념 없는 상태 '아파테이아'를 추구하라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에리쿠로스 윤리학은 개인의 편을 들었던 철학으로 스토아 철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하였다. 즉, 세상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는 은둔자를 위한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서로 고통을 주지도 받지도 아는 것을 추구하며 결국 쾌락주의는 개인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쾌락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일이 보다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얻는데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임에 비해 그 자체로서는 쾌락을 주는 일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손상시키고 도리어 한때의 코락보다 더 큰 고통을 낳는다면 그것을 피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고통도 불안도 없는 영혼의 절대적 평온함(아타락시아)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 철학이었다.

 

 이제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윤리학의 대표주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모든 합리적 설명을 초월하는 근원적 비약으로서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선악의 개념을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인 범주로 보기보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이 근재성을 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근대는 모든 것이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시대이므로 그의 철학으로부터 근대적 철학이 사작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으로부터 '나'가 철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렇게 '나'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근대를 가리켜 주관주의 혹은 반성의 시대라고 특징짓게 되었다. 고대적 윤리학은 객관주의적 윤리학이며 이성 중심의 윤리학인데 비해 18세기부터 더이상 도덕의 문제를 객관적 존재나 이성의 힘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은 어떤 당위에 관계되어 있으며 도덕의 본질 역시 '나'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도덕적 능력을 이성능력과 구별하였으며 이성을 통한 정념의 지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선도 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중립적 능력에 불과하였다. 결국 동정심이랴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동정심을 강조한 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고립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칸트가 등장하는데 글쓴이가 칸트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해서 자그만치 3장을 칸트에 할애하고 있다. 칸트 윤리학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처음으로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윤리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도덕을 행복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으며 도덕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이런 모든 시도를 배척함으로써 도덕의 순수성을 확보하였으며 동정심은 자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덕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그는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바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맨 마지막 장에 글쓴이의 윤리관이 잘 나타나 있지만 결국 이를 통해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 것.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 것.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을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밖에 이 책에서 높이 살 점은 외국어를 발음되는 대로 사용한 것이다. 예컨데 파이돈 = 파이드로스, 아테네=아테나이로 적었는데 이는 굉장히 긍정적인 면이다. 원칙적으로 외국어는 발음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외국어가 발음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이런 노력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윤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굉장히 성공적이다. 게다가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서를 이렇게 출판한 [한길사]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요새 과연 '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덧붙여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선생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이다. 하지만 한가지 충고하자면 이 책의 근본은 '철학' 서적임을 명심하고 도중에 읽다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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