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가 바라보는 일상은 언제나 아름답다. 지나가는 이가 들여다보는 일상은 정겹고 훈훈하기만 할 뿐, 거기에 생활의 고단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곳 이탈리아에서도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예쁘게 꾸며진 시골집들을 들여다볼 때 어떤 어두운 면도 보이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이런저런 갈등도, 불안정한 직장도, 불안한 노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꽃이 활짝 핀 정원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져가고, 생활의 습기를 걷어낸 보송보송한 평화만이 보일 뿐. 집을 짓지 않고 유목하는 자에게 세상은 조금 더 가벼운 걸까. 꿈으로 현실을 견뎌가는 일은 슬픈 걸까, 위안인 걸까. 저녁 빛이 앞산에 가득하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85쪽
길에는 인적이 없다. 나무와 꽃과 바위들만 여기저기 어여쁘게 서 있다. 가만히 바위들을 들여다보면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똑같은 꽃도 저마다 키와 얼굴이 다르다. 생각해보니 나는 길섶의 바위에게 "넌 왜 그 모양으로 생겼니?" 따지지 않는다. 외따로 홀로 핀 꽃에게 "넌 왜 여기 혼자 피었니?"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왜 그러지 못한 걸까? 왜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한 걸가? 타인에게 내 기준을 강요하는 습관은 언제쯤 벗어던질 수 있을까? 자연이 주는 가르침대로 일상을 살아가면 좋을 텐데...-123쪽
내 소중한 친구이자 스승인 P. 그를 만난 곳은 탄자니아의 작은 마을 아루샤였다. P는 그곳 국립대학에서 2년째 컴퓨터를 가르치는 봉사단원이었다. 처음 만난 날 저녁, P는 내게 망원경과 물휴지, 직접 담근 김치를 건넸다. 세렝게티로 야생동물 사파리를 떠날 예정이던 나에게는 무척 귀한 선물이었다. P는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계산 없이 나누고, 눈앞에 있는 이에게 마음을 다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P의 집에서 점심을 먹던 날, 부엌 냉장고에 붙어있는 종이를 봤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전 세계 13억의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대 오늘, 배불리 먹을 만큼의 일을 했는가?"-205쪽
사실 나는 버나드 쇼의 재치도 좋아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의지를 더 사랑한다. 남들이 "어쩔 수 없지. 세상이 그러니까"라며 세상 탓이나 하고 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선언한다. "이성적인 인간은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비이성적인 인간은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고 한다. 발전은 비이성적인 인간의 몫이다." 멋지다. 그는 또 말한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묻는다. '왜 그럴까'라고. 그러나 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꾸며 말한다. '왜 안 돼'라고."-238쪽
상처로 남은 추억은 때로 살아갈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패한 사랑이 삶을 긍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실패와 상처 속 절정과도 같은 생의 한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그 순간의 영원성에 기대어 남은 생을 견뎌갈 힘을 얻기도 하는 법이다. 노먼의 죽음이 그녀(피터 래빗의 작가 포터)에게 독립적인 새 삶을 시작할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고독한 어린 시절이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짓게 만들었던 것처럼. 외로움이 무언가를 낳기도 하는 법이다. 내 외로움도 무언가를 낳을 날이 오리라 믿어본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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