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신라 시대때 사용하던 우물이 3개 남아 있다고 한다. 두 가지는 알고 있는데, 하나는 모르겠다. 남산 어딘가에 있다던가. 하나는 황룡사지 터에서 발굴된 우물이고, 하나는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재매정이다.

재매정은 김유신 장군의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이다. 집 규모가 꽤 컸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할 만큼 우물이 크다. '재매'는 김유신 장군의 부인 이름. 우물에 부인의 이름을 붙여줄 만큼 김유신 장군이 아내를 사랑했던 걸까. 아님, 전쟁으로 집안을 자주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잘 건사했다고 이름을 붙여줬던 걸까. 그때 살아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우물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김유신 장군이 전쟁터에서 오랜만에 경주로 돌아왔을 때 일이다. 경주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시 전쟁터로 떠나야 했던 김유신, 집에 잠시 들러 우물물을 떠마셨다고 한다. 우물물을 마신 김유신은 "물 맛이 그대로구나"하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전쟁터로 떠났다나.

옛말에 집안이 망하려면 우물 물맛부터 바뀐다는 했다. 김유신은 물맛을 보고 집안에 아무런 변고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집안을 잘 꾸려가는 부인을 믿었기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전쟁터로 떠날 수 있었겠지.

재매정엔 남아 있는 건 우물 뿐이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그 당시 김유신 장군의 집에 사용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춧돌 십여개가 한 군데 모여있다. 아쉬운 점은 우물이 폐쇄되어 물맛을 볼 수 없다는 것. 돌로 막아 놓았는데도 어떻게 집어 넣었는지, 쓰레기가 물 위에 떠 있다. 제발 쓰레기 좀 아무데나 버리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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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총

 

경주에 오는 사람들이 꼭 들리는 곳 중 하나가 대능원이다. 천마총이 그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대능원은 하나의 고분공원으로 충분히 들려 볼 만한 곳이다. 잘 깔려진 포석, 잘 자란 잔디, 크고 낮은 고분들...

대능원엔 모두 23기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대능원을 만들기 위해 황남동 일대를 정비하던 70년대 100기가 넘는 무덤의 흔적이 발견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던가. 그런데도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은 하나도 없다. 미추왕릉은 이 무덤이 미추왕릉이 아닐까 짐작한 후손들에 의해 미추왕릉으로 지정된 것이고, 발굴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역시 무덤 주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발굴 중 지석이 발결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노서동 고분군엔 일제시대때 붙여졌다는 번호를 단 비석이라도 세워놓았는데, 대능원엔 그것마저도 없다. 팻말이 붙은 건 미추왕릉과 천마총 뿐이다. 번호를 알더라도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데, 대능원에 발굴이 된 고분이 하나 더 있다. '검총'이라고 붙여진 그 무덤은 일제시대 때 발굴이 되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호우총을 제외한 신라 고분은 모두 일제시대때 발굴되었다. 그런데 일제 시대때 발굴된 무덤들은 모두 노서동과 노동동에 있다. 황남동에 있는 무덤들이 훨씬 규모가 큰데도 불구하고 황남동의 고분이 발굴되지 않은 건 검총의 역할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검총은 꽤 큰 규모의 고분인데도 불구하고 발굴 유물은 정말 빈약했다. 철로 만든 검과 창 등이 발굴되었을 뿐이니까. 검총에서 화려하고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더라면, 일본인들은 황남동의 다른 고분들을 더 파헤쳤을 것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유물들을 빼돌리지 않았을까. 연구를 한다는 목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그때 발굴된 고분이 검총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검총이 어디 있냐고? 대능원 정문에서 천마총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다보면 두 갈래 길이 두 번 나온다. 두 번째 나오는 갈래길 가운데 무덤 자락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고분이 하나 있는데, 그 고분이 검총이다. 팻말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씩 갈 때마다 이야기를 해준다. 이 무덤 때문에 황남동 일대에 자리잡은 고분들이 무사했다고... 그래서 70년대 떠들썩했던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 있을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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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5-02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시대에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우리 유물들을 도굴해가는 넘들이 아주 많았다고 하더군요.
투탕카멘의 피라미드를 발굴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연사를 못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혹시 검총도 그랬을까요? ^^
이번에 꼭 들러봐야지.(뻔히 또 천마총만 들를 뻔했지 뭐예요?)
 

경주 고분을 둘러보면서 알게 된 지식 하나.

고분 - 말 그대로 오래된 무덤. 일반적으로 고분이라고 할 때 시대적 하한선은 삼국시대.

능 - 왕이나 왕비의 무덤.

총 - 높고 큰 무덤이라는 뜻.  발굴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왕족의 무덤임에는 분명한데,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다.

분 - 발굴은 하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무덤.

묘 - 일반 신하들의 무덤. 김유신묘, 김인문묘 등

호 - 일제 시대때 그 당시 남아 있던 고분들의 번호를 매긴 적이 있다. 그 번호를 그대로 따와 사용하고 있다. 황남동 155호분은 발굴하기 전 천마총을 일컫던 용어이다. 경주 일대에 위치한 고분 번호 중 155번인데, 황남동에 위치해 있어서 황남동 155호분이라고 불렀다. 번호는 특별한 규칙 없이 작위적으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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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비 머리 부분

경주는 고분의 도시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만큼 고분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무덤 주인이 알려져 있는 고분은 딱 두 기 뿐이다. 김춘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신라 태종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 그것이다. 이 두 기를 제외하고 주인이 알려져 있는 무덤은 대개 누구 무덤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무덤들이다. 그래서 그 무덤들을 일컬을 땐 전 **릉이라고 한다.

신라 시대 사람들은 지석을 남기지 않았다. 지석은 커녕 비석도 제대로 남겨놓지 않아 무덤 주인을 알아보기 힘들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어디에 누구 무덤을 썼다 하는 장지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아닌 두루뭉실한 위치 기록에 가깝다. 그나마 그 장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법흥왕 이후부터라나.

무열왕릉의 무덤을 알아보게 된 것은 무덤 앞에 있는 비석 때문이다. 비석의 몸체는 없어졌고 거북 형상과 이수만 남아 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비석 앞에 있는 이 무덤이 무열왕릉임을 알게 된 것이다.

비석의 거북 형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뛰어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 거북 모양은 거북이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거북은 앞뒤 모두 발가락 다섯개를 지니고 있는데, 헤엄칠 때는 뒷발 엄지발가락을 숨겨 네 개만 보인다고 한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거북이 4개의 뒷발가락을 지니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라나. 또 한 가지, 거북이 헤엄치는 형상임을 입증하는 게 거북 턱 부분의 붉은 색이다. 거북을 자세히 보면 헤엄칠 때 턱이 붉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무열왕릉비의 거북 입 부분을 보면 붉다. 유독 입 부분만 붉은 건 바로 헤엄치는 거북 형상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나.

화강암인 바위에서 유독 입 부분만 붉게 된 까닭은 모른단다. 하지만 신기하다. 어떻게 거북의 입 부분만 붉으스럼한 이유는 무엇인지. 화강암 중에서도 철 성분이 많은 부분을 얼굴로 만들어 그런 것일까. 아님, 특별한 성분을 바위에 발라 천년이 넘도록 붉은 색을 띨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무열왕릉 앞으로 이수에 새겨진 글자를 썼다는 김인문 묘와 김춘추의 구대손 김양의 묘가 있다. 봉분 크기가 좀더 큰 것이 김인문 묘라고 한다. 혹자는 무열왕릉 앞에 있는 두 기의 무덤 중 한 기가 김유신의 묘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금 김유신묘라고 알려져 있는 무덤이 왕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기 때문에 이런 의견이 나오고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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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택에 늘 공짜로 경주기행을 합니다.
 
내 인형이야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57
셜리 휴즈 글 그림, 조숙은 옮김 / 보림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첫인상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지만, 글과 그림을 곱씹다보면 어느 새 푹 빠지게 되는 책이 있다.  최근 읽은 책 중에도 그런 책이 있다. 바로 셜리 휴즈의 <내 인형이야>이다. 사실 처음 셜리 휴즈의 <내 인형이야>를 보았을 때만 해도 그다지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사실적이긴 하지만 선도 굵고 느낌이 거친 이런 그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의 성화에 못이겨 책을 들고 읽어내려가는데, 이내 마음이 동하는 거다. 그림에서 받은 첫인상과 달리 글은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아이 역시 데이브와 몽이의 이야기에 쉽게 몰입했다. 낡았지만 침대에 함께 누워야 하는 인형이 있고, 손에 쥐고 있어야 잠이 드는 수건이 있기 때문일까.

아이가 내 분신마냥 아끼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동질감에서 책에 빠져들었다면, 난 엄마의 입장에서 책에 빠져들었다. 몽이를 찾는 데이브를 위해 가족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따뜻했기 떄문이다. 나 같은 경우, 아이가 뭔가를 찾으면 대충 찾아보다가 야단치기 일쑤였다. 물건 제자리에 두지 못해 엄마에게 찾아달라고 한다고. 그도 아니면 나중에 찾아줄게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 이런 나와는 달리 데이브네 부모는 아이를 위해 기꺼이 마음을 열어준다. 늦은 밤 아이를 위해 집안 곳곳을 뒤지는 부모의 모습에서 아이는 사랑받고 배려받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누나는 또 어떻고. 데이브를 위해 곰 인형을 기꺼이 포기하는 누나라니... 책을 읽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형제 자매간의 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내 형제 자매를 한번쯤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가족간의 사랑 말고 책에서 눈길을 끈 게 있다면, 바로 바자회이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바자회를 열고 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바자회에 나오는 물건도 그렇고, 임하는 사람들 마음가짐도 그렇고. 그런데 벨라네 학교에서 열리는 바자회는 마치 축제라도 연 듯한 분위기이다. 가장행렬도 하고, 아버지 달리기나 이인삼각 달리기도 하고. 학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교에 가야 된다고 하면 지레 걱정부터 하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몽이를 찾았으니 이제 데이브는 잠을 푹 잘 수 있겠지. 벨라도 다른 곰 인형 친구들과 사이좋게 침대를 사용할 수 있을 테고. 데이브처럼 우리 아이들도 수건이며 인형을 손에 쥐고 잠을 청하겠지. 아주 오래도록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볼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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