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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왕릉 - 천년 왕국 신라의 역사로 들어가는 문, 과학과 상상력으로 만나는 우리 문화유산 3
이종호 외 지음, 정준호 그림 / 열린박물관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한 건 실수했구나 하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아이들 학교에서 도서바자회를 했는데, 이 책을 판매했었다. 바자회 목록에 이 책을 넣었는데, 솔직히 책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알라딘 리뷰 평점이 괜찮게 나온데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왕릉을 소개한 책이라기에 판매 목록에 책을 넣었다. 추가주문까지 넣을 만큼 호응도 무척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바자회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결코 목록에 넣지 않았을 거다. 의도는 좋았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결함은 소제목 2장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발굴된 천마총이라니.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발굴된 곳은 금관총이다. 경주 교동에서 금관이 발견되기는 했는데, 도굴로 발굴된 것이다보니 이 금관은 발굴연도를 정확히 모른다. 일제시대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금관발굴은 노서동 고분군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한 금관총에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서봉총과 금령총 등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다. 모두 일제시대에 발굴된 것이다.
천마총 금관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최초로 발굴을 했기 때문이다.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은 일본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주도했다. 교동에서 나온 금관 역시 일본인이 도굴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분발굴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해방이 되었을 때 발굴기술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실정이었다. 일본 고고학자 한 사람이 남아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발굴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있어왔던 발굴들은 한참 더 시기를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여기에 관한 내용은 조유전의 <발굴이야기>에 자세히 나온다.)
어쨌든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발굴된 곳이 천마총이라면 나머지 금관들은 언제 발굴이 되었단 말인가. 경주에 있는 고분발굴은 70년대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인가.
내용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순장에 대해서 다룬 부분인데,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하기 전까진 순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황남대총 남분에서 순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순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록에 거의 나와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가사상태로 무덤 속에 순장했거나 무덤을 닫기 전 모종의 행위를 통해 순장자의 목숨을 앗지 않았을까 보고 있다. 가사상태라면 무덤 속의 희박한 공기탓에 서서히 질식했을 것이니까. 20쪽의 그림에서 보듯이 그렇게 순장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기록상 순장자는 5명 정도였던 것으로 나온다. 한명이 아니라.
더군다나 왕비의 무덤 속에 함께 순장할 궁녀를 걱정하는 신료이야기라니. 순장은 당시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의식이었다. 순장이 금지된 건 그 무렵 들어온 불교와 당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논농사 등으로 인한 인식전환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순장자의 유골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해서 순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남대총과 같은 합장의 형태는 '왕과 왕비를 어찌 함께 묻을 수 있는가? 그건 불충이다'라는 신하들의 충정에서 나온 게 아니고, 무덤 자체가 크다보니 합장을 하고 싶어도 합장을 할 수 없어서 나온 하나의 방편이다. 천마총을 만드는 데도 거의 100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황남대총의 남분은 그보다 더 규모가 크다. 조성에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들어갔을 거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합장을 하려면 그 무덤을 다시 헐고 묻어야 되는데 시간과 인력, 금전적인 영향을 고려했을 때 합장을 하는 건 비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능선을 같이 쓰는 것이다. 남분 옆에 무덤자리를 조성하되 능선을 엮어서 한 무덤처럼 보이게 하는 것. 황남대총의 표주박같은 모양은 그래서 나왔다.
이야기가 자꾸 길어진다. 기대하고 봤는데 오류가 너무 많이 눈에 띄니까 그런 모양이다. 경주 대능원은 대능원으로 묶이기 전까지 황남리 고분군으로 불렸다. 70년대 경주사적지 조성작업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 현재 23기의 무덤이 관리되고 있다. 250여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능원에 있는 왕릉 크기의 고분 250기가 존재하려면 그 일대가 모두 고분으로 뒤덮여야 한다. 대능원과 노서동, 노동동 일대의 고분을 다 합쳐도 50기가 넘지 않는다.
표지그림도 오류다. 왕릉 주변에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왕성 바로 앞에 왕릉을 만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릉 바로 앞과 뒤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대능원 주변에 100기가 훨씬 넘는 무덤이 존재했을 거라는 발굴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대능원과 노서동, 노동동 일대는 왕족의 무덤이 있던 특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왕족의 무덤 사이에 집이 들어서는 걸 누가 용인할까. 무덤 사이사이에 집이 들어선 것은 무덤이 관리되지 않고 무너지기 시작하면서일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표지그림처럼 기와집 사이에 왕릉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경주왕릉을 전공하는 학자에게 한번만 고증받았더라면 사전에 다 바로잡았을 오류들이다.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다.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들려주는 데 있다. 상상력은 그 있는 사실과 사실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연결하는 하나의 연결고리여야 하는 것이지 있는 사실조차 잘못되게 알려주는 건 아니다. '과학과 상상력으로 만나는 우리 문화유산'이라는 부제에 어울리게 고증을 받아서 다시 출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내용이 잘못된 정보 몇 가지로 인해 좋지 않은(?) 책이 되어버린 게 너무 아쉽다.
더불어 책을 살펴보지 않고 바자회 목록에 올린 탓에 오류가 있는 책을 모른채 구입한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