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어트, <황무지>

T.S. The Waste Land


I read, much of the night, and go south in the winter.

밤에는 대개 책을 읽구요, 겨울엔 남쪽으로 옮아 가지요.


At the violet hour, when the eyes and back

Turn upward from the desk, when the human engine waits

Like a taxi throbbing waiting,

I Tiresis, thought blind, throbbing between two lives,

Old man with wrinkled female breasts, can see

At the violet hour, the evening hour that strives

Homeward, and brings the sailor home from sea,

The typist home at teatime, clears her breakfast, lights

Our of the window perilously spread

Her stove, and lays out food spread

보랏빛 시각, 책상에서

눈과 등이 일어나 뒤돌아보고, 인간의 엔진이

털털거리며 기다리는 택시처럼 기다릴 때,

비록 눈은 멀었건만 남녀 두 가지 삶의 중간에서 두근거리며,

쭈그러진 여자의 젖가슴을 가진 늙은 사나이 나 티레시아스는 보노니,

이 보랏빛 시각, 귀로를 재촉하고

바다에서 뱃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저녁때 되어 돌아온 타이피스트는 아침 설겆일을 하고

스토브에 불을 피우고는 통조림한 음식을 늘어놓는다.

(김종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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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무언가 찾아올 적엔>, 창작과비평사 2003


누군가 살고 있기에


새가 와서 잠시 무게를 부려보기도 하고

바람이 와서 오래 힘주어 흔들어보기도 한다

나무는 무슨 생각을 붙잡고 있는지 놓치는지

높은 가지 끝 잎사귀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잎이 다 시드는 동안 나무는

가슴을 수없이 잃고 찾고 했나보다

그의 둘레가 식었다가 따스해졌다가 반복하는데

내가 왜 이리도 떨릴까

아직 가까이하지 않은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하고

곁으로 빨리 오지 못하는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한

온기가 나를 감싼다

그의 속에는 누가 살고 있기에

외롭고 쓸쓸하고 한없이 높은 가지 끝에

잎사귀들 얼른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그의 생각을 끊어놓고 이어놓고 하는 걸까

나무가 숨가쁜 한 가슴을 꼬옥 품는지,

나도 덩달아 가슴이 달떠지는 것이어서

내 몸속에도 누가 살고 있기는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보는데도 나는

무슨 생각을 그리움처럼 놓쳤다가 붙잡았다가 하고

여전히 그는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

새가 부려두고 간 무게를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바람이 흔들어대던 힘을 견뎌야 생각이 맑아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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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 와 있네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깜박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잡아도 놓치는 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물살도

갈수록 느는 건 삶에 지친 겹주름

볕에 보면 물비늘로 반짝이는 책

낙장없이 펼쳐지는 大藏經이네

어느 한 대목만 읽어도 아하!

내 생의 유실물이 모두 보이고

어영부영 지나온 산과 들이 보이네

내 마음속 빈터에 몰래 심어둔

홀씨 하나 싹트는지 궁금한 봄날

거룻배 노 저어가 찾고 싶은 날

오던 길 새삼 뒤돌아보면 이런!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네.


*『시인의 모자』(2003,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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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타

 

                          이달균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6인시조집, 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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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민음사 2003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채우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 만큼이 인생이다



저녁 일곱시


만약 네가

저녁 일곱시에 온다면

그 시간에 온다면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을 확정하고

네가 온다면 정말 그렇다면

나는 아침부터 초롱꽃을 따

네가 올 길가의 가로수를 따라

가지런히, 보기도 아름답게

등 길을 만들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의 손놀림은 빨라지고

마음도 조금씩 들뜨겠지

그 들뜬 마음을 점점 흥분되겠지

꽃초롱이 한 둘 만 만들어질수록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저 하늘에 핀 태양을 바라보며

왜 그리 걸음이 더디더냐 원망할 거야

너를 그리는 내 숨 가쁜 마음이라면

분명히 원망하고도 남을 거야

그러나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고

온종일 바쁜 마음으로 만든

등꽃이 불을 밝히면 거의 미쳐버릴 거야

왜냐하면 일곱시가 되어가기 때문이지

네가 올 일곱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나 이젠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야

너를 맞이하는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지

나의 기다림은 무척 행복할 거야

인생에서 기다림처럼 행복한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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