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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길>

고창환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모래 바람 비껴갈 때 꿈벅거리는 눈

감았다 뜨면 보이리

사는 것이 이렇게 흠집투성이구나

 

먼 하늘 별들이 돋으면

오래 멈춰 서서 생각 깊게 바라보자

 

너덜거리는 시간이

긴 그림자를 끌며 지나도

가뭇없이 멀어지는 것들을 꿈꾸지 말자

 

사는 것이 모래 벌판에

길을 다지는 일이지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의 굴절이었구나

 

함부로 흘러나간 삶을

거짓처럼 사라진

물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마른 나무 그늘 목을 축일 때면

짓물러진 발자국이라도 가만히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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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요즘 이곳 시골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사막 너머/ 먼 데서 신부를 데려와야 한다 

예식은 읍내 식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창밖 지붕 너머 들판과 냇가 건너/ 멀리 앞산까지 온통 뿌연 예식장 

드디어 신부가 온다/ 누우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산 넘어 신부가 날아온다 

신부의 가는 허리에서 방울 소리 울리고/ 속눈썹은 회초리처럼 길고/ 양털 가죽신을 신은 걸 보아/ 신부는 유목의 바람 세찬 곳에서 오나 보다 

혼례는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잔치를 거들고 즐기느라/ 목력과 산수유도 종일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프다 

그런데, 혼수용으로 신부를 따라온/ 염소구름은 어떻게 한다지?/ 이 뿌우연 봄날, 고삐를 매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버릴 터인데 

<반달곰이 사는 법> 

지리산 뱀사골에 가면 제승대 옆 등산로에서 간이 휴게소를 운영하는 신혼의 젊은 반달곰 부부가 있다 휴게소는 도토리묵과 부침개와 간단한 차와 음료를 파는데, 차에는 솔내음차, 바위꽃차, 산각시나비팔랑임차, 뭉게구름피어오름차 등이 있다 그중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것은 맑은바람차이다 

부부는 낮에는 음식을 팔고 저녁이면 하늘의 별을 닦거나 등성을 밝히는 꽃등의 심지에 기름을 붓고 등산객들이 헝클어놓은 길을 풀어내 다독여주곤 한다 

그런데, 반달곰 씨의 가슴에는 큼직한 상처가 있다 밀렵꾼들의 총에 맞아 가슴의 반달 한쪽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일전에 반달보호협회에서도 찾아왔다 그대들, 곰은 사라져갈 운명이니 그 가슴의 반달이나 떼어 보호하는 게 어떤가 하고, 

돌아서 쓸쓸히 웃다가도 반달곰 씨는 아내를 보자 금세 얼굴이 환해진다 산열매를 닮아 익을 대로 익은 아내의 눈망울이 까맣다 머지않아 아기 곰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우리는 하늘을 아장아장 걷는 낮에 나온 반달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험한 산비탈 오르내리며 요즘 반달곰 씨는 등산 안내까지 겸하고 있다 오늘은 뭐 그리 신이 나는지 새벽부터 부산하다 우당탕 퉁탕......, 어이쿠 길 비켜라, 저기 바위택시 굴러 온다 

<빈집> 

지붕밑 다락에 살던 두통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가구를 들어내 휑하니 드러난/ 벽들은 오랜 망설임 끝에/ 좌파로 남기로 결심했고 

담장이덩굴들이 올라와 넘어다보던/ 아름답던 이층 창문들은/ 모두 천국으로 갔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낡은 피아노의/ 건반은 고양이들이 밟고 지나다녀도/ 아무도 소리치며 달려오는 이 없다/ 이미 시간의 악어가 피아노 속을/ 다 뜯어먹는 늪으로 되돌아갔으니 

구석에 버려져 울고 있던 어린 촛불도/ 빈집이 된 후의 최초의 밤이/ 그를 새벽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벌써 어떻게 알았는지/ 노숙의 구름들이 몰려와/ 지붕에 창에 나무에 떼처럼 들러붙어 있다 

이따금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그들의 퇴거를 종용해보지만, 부력을 잃고/ 떠도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철거반이 들이닥칠 때까지/ 한동안 그들은 꿈쩍도 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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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의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함께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그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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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나무> 

실뿌리가 자라서 

굵은 뿌리가 되고 

나무 밑동에서 조금씩  

조금씩 줄기가 생겨 갈라지고 

줄기에서 나뭇가지 퍼져나가 

가지마다 수많은 이파리 돋아나고 

마침내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 보아라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하여 나무는 위로 

위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위로 

아래로 힘껏 온몬을 뻗으며 

실처럼 가늘어지는 나뭇가지들 

그 무수한 가지 끝마다 

햇볕이 쌓이고 

빗방울이 머물고 

바람이 걸려 조금씩 

조금씩 줄기를 기르고 

밑동을 굵게 살찌우고 

마침내 땅속으로 들어가 

엄청나게 많은 뿌리가 갈라지며 

넓고 깊게 퍼져나간다 보아라 

하늘로부터 땅을 향하여 나무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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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새들이 잠든 뒤> 

... 

내부순환도로를 달려가는 차량 소음이 새소리를 대신하고, 매일 키가 자라는 동네 가로등 불빛이 한결 밝아지면, 불쌍한 것은 길가의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들이다. 밤새도록 가로등과 자동차 전조등과 아파트촌으 불빛에 시달리면서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이 가로수들은 어둠마저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오복빌딩> 

... 

옥상에는 키 작은 향나무 몇 그루와 저수 탱크와 붉은 벽돌집이 있다. 문패 없는 이 옥상옥에서 빌디으이 주인이 산다. 

그 위로는 하늘이다. 

이 하늘이 아까워 건물주는 매일 밤 고층 아파투를 짓는 꿈을 꾸는 것이다. 

<처음 만나던 때> 

조금만 가까워져도 우리는 

서로 말을 놓자고 합니다 

멈칫거릴 사이도 없이 

-너는 그 점이 틀렸단 말이야 

-야 돈 좀 꿔다우 

-개새끼 뒈지고 싶어 

말이 거칠어질수록 우리는 

친밀하게 느끼고 마침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경어로 인사를 나누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뒤돌아볼 줄 모른다면 

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향하여 시속 140km로 내닫는 

표범이 훨씬 더 빠릅니다 

서먹서먹하게 다가가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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