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반 훌릭, <쇠못 살인자>, 황금가지 2004
p.266-279
[도널드 F. 래시의 해설]
반 훌릭의 이력은 갖가지 빛깔의 실타래에서 뽑아 짠 장식 직물처럼 다채롭다. 그는 학자이며 외교관이며, 동시에 예술가였다. 훌릭은 1910년 네덜랃느 령 겔드란트의 추트펜에서 인도네시아 주둔 육군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부터 열두 살까지 훌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 가족이 네덜란드로 돌아온 1922년, 어린 훌릭은 니즈메겐의 고전 어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재직 중이었던 언어학자 C. C. 올렌버크의 지도로 그는 어린 나이에 벌써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고 아메리카의 블랙풋 인디언의 언어를 알게 되었다. 방과 후에 홀릭은 중국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사람은 바게닝겐에서 농학을 공부하던 중국 학생이었다.
1934년 훌릭은 동아시아학 연구의 요람으로 유럽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던 라이덴 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전부터 관심을 가져 온 아시아의 여러 언어와 문헌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는 1932년 칼리다사(?~400)가 쓴 고대 인도의 희곡을 네덜란드어로 출간한다. 중국, 인도, 일본, 티베트의 말 숭배를 다룬 그의 학위 논문은 1934년 위트레흐트 대학의 심사를 받아 아시아 관련서를 전문으로 내는 라이덴의 브릴 출판사에서 1935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훌릭은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는 잡지에다 틈틈이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를 주제로 글을 실었다. 이글에서 아시아의 고대문화에 대한 애정과 격동하는 시대 상황에 대한 그의 겸손한 수동의지가 처름으로 드러난다.
학위를 마친 훌릭은 1935년 네덜란드 외무부에 들어갔다. 첫 번째 임지는 도쿄 공사관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근무 외 시간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학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가 탐구한 분야는 자신이 심취해 있던 중국의 전통적 학자상과 관련된 주제였다. 바쁜 외교관 활동으로 시간이 부족해 홀릭의 연구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연구의 깊이는 만만치 않았다. 과거의 중국 선비처럼 홀릭도 희귀본, 소골동품, 족자, 악기를 직접 수집했다. 명품을 가려내는 훌릭의 학식과 안목에는 내노라 하는 동양 골동품 수집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그는 탁월한 서예가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서양인으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경지였다. 훌릭은 중국의 고대 현악기인 칠현금도 연주했으며 중국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악기에 관한 두 편의 논문도 썼다. 평화롭고 생산적이었던 이 시기에 그가 펴낸 책의 대부분은 베이징과 도쿄에서 간행되어 아시아와 유럽의 학자로부터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2차 대전의 참화로 훌릭의 첫 도쿄 생활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훌릭은 1942년 다른 연합국 외교관과 함께 일본에서 철수하여 네덜란드 외교관 단장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이 머나먼 땅에서 그는 유명한 선승이었으며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끝내 충성을 잃지 않았던 승려 퉁카오에 관한 탁월한 중국어판 연구서를 편집했다. 훌릭은 유럽에서 전쟁이 종식된 1945년까지 중국에 머물다가 1947년 헤이그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 두 해 동안 주미 네덜란드 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다가 1949년, 사 년 임기로 다시 일본으로 왔다.
1940년 훌릭은 저자 미상인 18세기의 한 중국 추리 소설을 우연히 입수했다. 그리고 그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 뒤 급변하는 전황과 그 여파로 훌릭은 많은 연구 자료에 접할 수 없게 되어, 낙으로 삼아 왔던 일도 잠시 접어 두어야 했다. 그러나 남아도는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중국의 통속 문화를 어렵게 공부해 나갔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수사 및 재판과 관련된 소설이었다. 훌릭은 중국의 전통 추리담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들어가 1949년 도쿄에서 <디 공안: 디 판관이 해결한 세 가지 살인 사건Dee Goong An: Three Murder Cases Solved by Judge Dee>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한정판으로 펴냈다. 세 가지 일화로 구성된 이 소설의 간행으로 서구 세계는 중국 전통 추리담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디 공의 위업을 출판물을 통해 처음로 접하게 되었다.
중국의 지방 수령이자 유학자으 전형이었던 디 공에게 흠뻑 빠져든 훌릭은 중국의 사법 체계와 수사 체계를 더욱 깊이 있게 파고 들었다. 1956년 그는 棠陰比事라고 하는 13세기 중국 소송 사례집의 영문 번역서Parallel Cases from Under the Pentree를 냈다.
훌릭은 추리 문학에 심취한 데 이어 얼마 뒤에는 중국의 춘정문학과 춘화에 관심을 품는다. 그가 특히 흥미로워했던 시대는 명나라였다. 중국 사대부 계급에게 외도의 축첩은 벼루 수집이나 칠현금 연주만큼이나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 점을 알리기 위해 중국화에 조예가 깊었던 훌릭은 1951년 도쿄에서 기원전 206년의 춘화에서 1644년의 명나라 채색 춘화까지에 중국인의 성생활사를 주제로 다룬 육필원고를 곁들여 오십 부 자비 출간했다. 유학자와 귀족에게 외도와 통속 소설은 일반적으로 금기시되었지만, 사대부 계급 가운데 상당수가 은밀히 통정을 일삼았고 남몰래 통속 소설을 읽고 또 썼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훌릭은 많은 작품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사대부가 내세웠던 고상한 윤리적 기준은 겉발림이었고 정작 그들의 사생활은 그렇고 그런 뭇 인간의 도덕적 약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훌릭이 펴낸 춘정 소설과 춘화는 소수의 독자에게만 유포되었지만 그가 간행한 수많은 중국 추리담 번역서와 각색물은 특히 1950년대에 '디 공'을 서양에서 유명한 인물로 만들었다. 뉴델리로, 헤이그로, 콸라룸푸르로 임지는 계속 바뀌었지만 훌릭은 '디 공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여 나중에는 열입곱 권 분량에 이르게 되었다. 외교관으로서 훌릭의 마지막 임지는 다시 도쿄였다. 그는 1965년 자신이 못내 열망하던 직책인 주일 네덜란드 대사로 일본에 부임했다. 이태 뒤 본국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훌릭은 마지막 붓을 놓고 세상을 떠났다.
비교적 짧았던 생애를 통해 훌릭은 외교관으로 공사다망하게 살아가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놀랍고도 아기자기한 전문적 주제를 파고들었고 자기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훌릭은 중국이 안고 있는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의미를 모를리 없었다. 학문적으로 논쟁이 불고 있는 최신 주제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매일매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의 흐름에도 밝았다. 그러나 훌릭은 그런 문제에다 연구의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훌릭은 특정 시대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하다 못해 문학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탐구 범위는 중국의 고대부터 청나라의 몰락기까지 두루 뻗어 있었다. 그의 관심 영역은 제국이 몰락한 이후 혁명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중국보다는 전통 중국에 국한되어 있었다. 훌릭은 아마추어 문학, 미술 애호가와 딜레당트가 대개 선호하는 '작은 주제'를 찾았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던 이 학문의 샛길을 탐구하면서 훌릭은 언어학자, 역사학자, 골동품 감식가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중국의 범죄 소설 또는 재판 소설은, 아득한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 오는 중요한 장르의 하나인 추리담이 후대에 와서 변형된 모습이었다... 디 공은 명수사관으로 이야기꾼의 입에 다골 손님처럼 오르내리던 영웅의 하나지만, 사실은 당나라 때의 재상으로 630년에서 700년까지 살았던 역사적 실존 인물 디런지에이다. 디 공 말고도 다른 수령, 특히 파오 정(999~1062)같은 인물은 중국의 이야기꾼, 극작가, 소설가들에게 두고두고 칭송을 받았다...
중국 전통 추리 소설의 주인공은 보통 지방 수령이다. 이야기는 수사에 임하는 수령의 시점에서 보통 구어체로 서술되는데 그는 수사관, 취조관, 재판관을 겸하면서 공공의 적에 대한 응징자의 역할까지 떠맡는다. 지방 수령은 대개 몇 개의 사건을 한꺼번에 처리한다. 한 건의 범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힘든 것이 치안의 현실이었다. 여러 건의 범죄는 이야기의 초반부에 대부분 발생하며 대개는 얽히고 설켜 있다. 중국의 극이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설교적이지 않으며 사회를 대상으로 한 범법 행위보다는 개인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주로 다룬다. 범죄라고 할 때에는 어김없이 실정법의 구체적 위반을 가리켰으며 그 내용은 보통 살인이나 강간, 아니면 둘 다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디 공은 국가나 황제의 대리자로서 범해의 증거를 확립하고 범죄자를 체포하며 법의 규정에 따라 처벌을 내렸다. 또 소설 속의 디 공은 형량에 재량권을 행사한다거나 자비를 베푼다거나 사사로운 연고에 얽매이는 법이 없었다. 디 공은 용기, 지혜, 정직, 불편부당, 엄정성의 상징이었다.
달단인, 몽골 인, 도인, 승려는 예외없이 악역으로 등장했다. 희생자는 일반적으로 농민이었다. 이야기꾼의 말을 열심히 듣는 것도 주로 농민이었다...
이야기의 저변에 깔린 내용은 사회적 정의라는 근원적 주제다. 제국 중국에서 사법 당국이 추구한 것은 응징과 교화였다. 지방 수령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하늘의 뜻과 조화를 이루도록 유념하면서 이러한 기능을 충실하고 공정하게 수행했다. 모든 재판은 관아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소를 하는 디 공은 공개석상에서 피의자를 심문해야지 은밀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디 공은 유죄와 무죄를 직관에 따라 즉각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간주되었지만 자신의 논거를 백성 앞에서 입증해야만 했으며 피의자의 자백을 얻어내야 했다. 재판의 전 과정은 세심하게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였으며 그 공소장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서명 동의가 필요했다…
1949년 디 공 이야기의 번역본을 처음으로 펴내면서, 훌릭은 요즘 독자를 위해 현대 추리 작가가 이렇게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써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훌릭은, 비록 그전까지 소설을 써 본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처음 두 편의 소설을 영어로 쓰기는 했지만 이것을 책으로 펴낼 생각은 없었고, 나중에 일본어와 중국어 번역본으로 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이 이 새로운 형식의 추리 소설에 찬사를 보내는 바람에 훌릭은 아예 영어로 펴내기로 마음먹었다. 영어는 훌릭의 모국어가 아니었지만 그는 영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학자로서의 훌릭은 남이 잘 건드리지 않는 주제를 연구해 왔는데 그런 학문적 이력은 분위기 있는 중국 추리 소설을 집필하는데 더없이 값진 자산이 되었다. 이제 훌릭은 세세한 역사적 사실과 문헌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배경을 정확히 기술하고 중국의 전통적 생활상을 실감 나게 그리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