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45쪽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고 말한 사람이 톨스토이였던가. - 천명관, <고령화가족>, 128쪽

유년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은 당시엔 너무 어려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에만 묻어두었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136쪽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222쪽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피는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거기에 비추어보면 나의 삶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삶이었던지. - 천명관, <고령화가족>, 263쪽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다. 짐은 새로운 법은 아름답지만 옛날 법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생을 희롱했다가 실패했다. - 프랑수아 트뤼포, <쥘과 짐>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천명관, <고령화가족>, 2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낡은 이념의 좌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답게 살자는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들의 상식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행복의 기준도 다르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준과 목표에 따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꿈같은 이야기에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이야기로 들을까. 내가 김규항의 글을 읽는 것은 운동화 끈을 다시 묶듯 풀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혼자 걷다 보면 때로는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더불어함께 걷는 것 같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홀로 사막을 걷는 느낌일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김규항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새 위안을 받게 된다. 정색을 하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신념이 때때로 부럽고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래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는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인터뷰이 김규항을 보고 자연스럽게 읽게 된 책이다. 스스로 B급 좌파로 칭하는 김규항이 말하는 이 시대의 진보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들의 현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과정도 다르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만족도 다르다. 부끄러움의 기준도 다르고 욕망하는 것도 다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삶을 함께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 타인과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견고한 질서에도 균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대로 얼마나 우리가 더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의 소유욕에 대해 김규항은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을 비려와 “권선생께서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숙제 때문에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분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금욕 생활을 한 게 아닙니다. 욕망이 달랐던 거죠.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 안에도 그런 편린들이 있어요. 세상이 강요하는 욕망을 열심히 좇다가도 순간순간 허무감에 빠지는 건 실은 그런 편린들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는 더욱 욕망을 좇아서 허무를 극복하려 들지만요.”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 원하는 삶은 네모난 틀에 담기듯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열여덟 살 아이들의 꿈이 공무원이라니! 날마다 두근거리고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내일을 향해 달려야 할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길들여진 아이들과 길들이고 있는 어른들에게 삶은 치열한 경쟁이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고 소박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멈춰버리는 난쟁이의 꿈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페미니즘, 2008년의 ‘촛불’과 2009년의 ‘추모’ 등 김규항은 우리들 삶의 갈피들을 읽어내며 구체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담론까지 종횡무진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인터뷰이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인터뷰이의 글을 통해 작은 생각 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 놓치지 않고 깊고 넓게 들여다본다. 지승호의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김규항의 시작과 현재를 알게 되고 생각의 흐름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민한 문제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예수전』을 통해 이미 기독교와 예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김규항의 영성은 미국까지 날아가 헌금을 강요하고 전직 두 대통령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김홍도 목사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예수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당연히 믿음도 다르다.

지승호 : 백만장자들한테 ‘만족하느냐?’라고 묻자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딱 두배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대요.
김규항 : 그들은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쓰거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부자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부자가 되는 방법과 그 출발선, 부자의 기준과 부자가 되려는 목적 따위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과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불피요한 것일까. 김규항은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의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키워지는 대로 길러지고 말하는 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지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 P. 292

  이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직업, 미래, 꿈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지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람은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김규항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오십보 백보의 싸움은 되지 않도록 나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100427-0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자. 주목할 만한 신인들과 기성 작가들의 소설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요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표지의 얼굴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어떤 사이와 간격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면 김이설의 단편들은 여성과 남성, 개인과 가족, 모성과 부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극단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현실이 아름답지 않지만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두 손으로 뺨을 잡고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강요한다.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 혹은 타자의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완고하다.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면 김이설의 글은 좋은 글이다. 편안하고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조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의자같다. 하지만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기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게 좋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열세살’의 노숙인 소녀, ‘엄마들’의 대리모를 위시해서 ‘하루’의 위선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김이설은 언제나 부딪칠 수 있거나 낯선 여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 물론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불편함이다. ‘엄마들’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대리모에게 밤늦게 찾아와 술이 취한 채 쏟아놓는 넋두리에 대해 작가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고백은 처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처연하지 않고 낯설고 아프다.

  버려진 아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순애보’의 불편한 관계 또한 관계 너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아니라고,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꿈은 환상일 뿐이라고, 불쌍한 건 오히려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잠언투의 이야기가 때로는 소설 읽기를 방해하지만 나는 누구의 소설에서도 일반화가 가능한 문장들에 밑줄이 간다. 맥락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싱글 연극배우의 비루한 일상과 꿈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막’은 “세상은 늘 두 가지였다. 있거나 없거나. 그건 예쁜가 안 예쁜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구분되었고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게 했다.”는 말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올가미처럼 옭죄는 현실 혹은 답답한 미래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앞으로 그 여자들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지 혹은 그 여자들의 관계와 남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기다려진다. 새로움이 항상 미덕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만의 새로운 영역은 무엇일지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박솔뫼의 장편소설 『을』은 독특한 감수성과 분위기를 지닌 장편 소설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제 홀로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한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을과 민주.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는 문장은 민주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는 공간인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과 관계로 시작한 듯하지만 호텔방에 대한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한 소설적 구성과 배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의 호텔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일회적 혹은 단편적 관계를 오히려 전면적, 복합적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P. 21

  밑줄이 남아 있는 문장은 그대로 소설에 대한 인상이 되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소설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것은 을이 따라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을이 관계 맺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에 매혹되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처럼 여겨진다. 깊은 갈등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탈색된 이미지와 지루한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민주의 사려 갚음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평한 것이었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민주의 무관심은 지극히 공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대개 늘 사려 깊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민주의 사려 깊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무관심이 사려 깊음으로 녹아드는 과정도 말이다. 그것이 민주의 예의 바름이었다. - P. 38

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민주처럼 무관심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의바름의 위악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결국 현실 속의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도 너에 대한 사랑도 세상에 욕망도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부끄러워진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쾌락이 아닌가. 정여울은 작품해설에서

인간은 관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쾌락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쾌락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질이기에, 그리하여 고정된 시공간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 P. 220

라고 일침을 가한다. 쾌락의 본질은 소유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건너뛰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다. 가련한 인간 『소현』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간 그의 한숨과 삶의 결을 따라가는 김인숙의 미려한 문체는 김훈의 그것을 넘어선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화려해서 지루할 지경이다.

  실존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는 일이 소설가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운명이었을까. 자신의 한 순간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그의 한과 눈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고뇌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과 막금, 흔과 석경이라는 흥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현’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관심은 굴욕의 역사도 아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비루함도 아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김인숙, <소현>, 316쪽

  한 군데 밑줄 치고 책장을 덮으니 띠지와 일치한다. 울분에 찬 소현의 독백은 시대를 건너 작가의 상상력으로 부활한다. 독자들도 물론 김인숙의 소설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100426-035~0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9년에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21세기의 시작은 20세기 초반의 흐름만큼이나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바보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만큼이나 극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4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쳐 이명박 정권의 등장, 노무현의 자살과 뒤이은 김대중의 죽음으로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보냈다. 노무현은 황혼녘의 부엉이가 되어 날아간 것이 아니라 새벽녘에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기틀이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비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목격하고 있다. 용산참사를 필두로 일련의 사태들은 ‘설마’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며 과거를 또 다른 미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 『특강』에 이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며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필수적인 프리즘이다. 역사는 어차피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객관적 사실의 흐름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책은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기 위해 필요한 조감도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이 한 얘기처럼 어디에고 처음부터 길이 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들 새 시대의 첫발을 떼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한 30여 년 역사를 공부하고 나니 남는 생각은 한 번도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각이 복잡했을 뿐이다. - P. 7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라는 머리글에서 한홍구가 술회한 것처럼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생각만 복잡했을 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가면 된다.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완고한 현실에 순응하자고 하면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한 소수의 행복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 속에 모든 사람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통해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는 일은 왜 어려운 것일까?

  자본과 권력 -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욕망의 블랙홀. 그것이 다수의 행복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독점하는 있는 소수를 위해 남용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가장 손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만큼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일이 문명을 이룩한 인간 역사의 역할과 기능이다. 머나먼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눈 뜬 장님의 시대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계층적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흑백 논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극단적 지역주의에 기반한 투표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우리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이며 역사의 발전과 퇴행의 갈등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혹은 무엇을 위한 정책과 제도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늘 똑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가?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벼랑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 P. 9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을 통해 확인된 공인된 국가 권력의 횡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어떤 경찰, 검사, 기자, 정치인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나? 이 책의 저자 한홍구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우리 역사에서 지난 600년 동안 부모들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왔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내내 권력에 도전하면 모난 돌이 정 맞고, 귀양 가고, 멸문지화를 당했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개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도 젊은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거죠. - P. 269

  1960년 4. 19와 1980년 5. 18에 대해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가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사라졌다.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우리는 착각한 것일까? 이 책은 5. 18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7년 6월로 이어진 현대사의 흐름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정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라기 보다 철지난 잡지나 빛바랜 신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기분이 너무 우울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이나믹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는 국가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신산스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이었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사소한 일상과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 작은 소망과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척박해도 꿈꾸고 노력하면 지500년을 버틴 조선 왕조도 19세기 들어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닫힌 체제로 굳어졌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지렁이도 용이 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P. 269

상식과 이성이 통용되고 합리와 논리가 사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쯤 쓸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가 될수록,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나날이 가혹해질수록,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될수록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암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정한 룰과 게임의 법칙을 통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 나눔과 배려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길은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옳고 그름과 선악의 가치 판단은 아니더라도 삶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00418-0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불길한 예감을 전해준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 중에서 30%는 일어나지 않고 45%는 사소한 것이며 25%는 과거의 것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불안이 기실 쓸데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거나 준비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까지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어야 하며 간접 경험의 즐거움은 예상할 수 없을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정해진 순서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보다 우리는 때때로 황당하고 기괴하지만 딱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바로 편혜영의 『재와 빨강』같은 소설 속에서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순간도 빈틈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가? 아니면 게으르게 하고 싶은대로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쪽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치열하게 욕망할수록 불행해지고 포기한 듯 절망하는 편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의 아이러니다. 삶이 부조리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과 룰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모든 예술은 사라진다. 말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보여줄 것이 없다면 소설가는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편혜영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은 위험한 상상과 불온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 설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의 인생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건은 단순하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개발하던 주인공은  C국에 파견된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C국에 도착하자마자 불행은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동창생 유진의 말을 믿을 수 없으나 출국하기 전날 그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혼란스런 그는 감금생활을 해야하는 아파트에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쓰레가 더미로 뛰어 내린다. 부랑자 생활을 거쳐 방역업체에서 쥐를 잡게 된다. C국에 파견된 것도 쥐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주인공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어둠과 파괴 그리고 동물적 상상력의 세계가 재로 표현된 것 같다. 눈부신 빛과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빨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재와 빨강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이미지로 주인공 사내의 아이러니한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듯하다. 기괴한 이미지와 칙칙한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동일시된 자아를 발견한다.

  조금씩 상황만 다를 뿐 이보다 더 지독한 반전과 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혀 낯선 세계에서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주인공은 전염병과 낯선 언어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버틴다. 멀쩡한 직장과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한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과 타인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에 극적 반전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지 않은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욕망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되는 모순. 이것이 아마 모든 인간의 운명은 아닐까?

  편혜영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신종플루의 공포가 전세계를 뒤덮던 시기에 인간의 삶은 언제든 극적 반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읽히지만 새롭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우리에겐 언제든 필요하다. 생경한 방식으로 인간과 삶의 방식을 통찰하고 있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다려진다.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작가들의 애정만큼 가열차게 욕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헛된 욕망이며 오히려 불행을 경고하는 빨간 신호등일지라도 말이다.


100413-0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