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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 익숙한 것에 대한 엉뚱한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면 소설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 작가는 무엇을 써야할까. 아니 이야기꾼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어떻게 써야할까. 배수아의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소설의 틀과 형식과 규범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일반 독자에게 낯선 이야기의 구조는 색다름이 아니라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한 모양이다. 천상 소설가로 살아야하는 것이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그 고통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순한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작가가 느끼는 개인적 고민일 수도 있고 문학의 갈래가 갖는 근본적인 형식적 고민일 수도 있겠다.
8편의 소설을 모아 놓은 평범한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서사의 기본 틀은 와해되어 있다. 최근 2010년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다른 10년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소설의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모색인지 지루한 형식과 방법에 대한 도전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비단 배수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작가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설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담아내야 하거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더라도 최소한 ‘재미’를 포기할 독자는 많지 않다. 고급한 독자의 취향 - 이를테면 박상륭류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속된 갈래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이렇게 꿈과 환상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주인공의 내면 풍경 묘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소설의 다양성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단순한 서사구조를 벗어나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갈피를 쫓고 의식의 흐름을 쫓아다니는 일은 작가와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다양하게 그리고 온몸으로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과 여백, 행간의 의미와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따라간다. 소설가가 안내하는 생의 이면과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트를 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구조를 따라 가는 일이 전통적인 소설읽기의 방법이라면 낯설고 생경한 방식으로 독자들의 내면 풍경을 유추하게 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배수아는 ‘양의 첫눈’을 비롯해서 ‘올빼미’, ‘북역’을 통해 기승전결 구조에 길들여진 소설의 독법을 불편하게 만든다. 잔잔하고 일상적인 독백 같기도 하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 걷는 산책같기도 한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오히려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소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소설에 대한 판단 기준에 독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구성하는 이 외부의 물과 그림이 낯설다고. 이 독특한 비현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고. - ‘무종’ 중에서, 187쪽
소설 속의 주인공이 ‘비현실성’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설의 외부로 나아갔다는 뜻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설을 소설이 아닌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고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도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독자의 선택과 취향에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가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꿈과 환상이 어떻게 부딪쳐 소리를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 ‘빠리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중에서, 195쪽
책을 읽으면서 그날의 기분과 느낌, 날씨와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문장을 뽑아낼 때가 있다.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먹고 사는 일이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직업적 만족과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우울’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죽음과 은퇴’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선언에 대해 반박의 여지가 없을 때의 낭패감!
내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289쪽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렇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변명을 책 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뱉어내는 말과 언어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사랑은 모순의 일인극이다. 민감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는 사랑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외국 낭송극이다. 사랑은 새로운 말과 언어를 만들고 그것들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친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310쪽
100620-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