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사회과학 - 우리 삶과 세상을 읽기 위한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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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그리고 우리. 자아의 확장 과정은 곧 타인과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나와 너를 구별하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조금씩 발달해 왔다. 나와 너를 넘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사회과학이 아닌가. 사회와 과학이라는 어색한 개념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조금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코드를 읽어내는 다양한 방식 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경제다. 불합리한 인간의 경제 행위, 수많은 생각의 오류, 비이성적인 사회 현상을 우리는 끊임없이 분석하고 논쟁한다. 각자의 관점이 다르고 해법도 여러 가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현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 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과거와 현재의 결과로서.

『88만원 세대』로 촉발된 세대 논쟁을 넘어 이제는 현실적인 삶의 질과 희망의 문제가 심각해 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했던 시절은 얼마나 낭만적이었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극렬한 논쟁과 장하준의 당돌한 비판적 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온몸으로 이 시대를 체감한다. 살인적인 등록금을 비롯한 비정규직과 양극화의 문제는 주택 구입, 사교육 심화, 직업의 안정성, 조세 형평성, 사회 안전망 등 무엇 하나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우리의 목을 조른다. 우리는 훌륭한 국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석훈의 신간을 망설이다 손에 들었다. 『나와 너의 사회과학』은 우석훈의 스타일대로 써 놓은 비체계적 인문서에 가깝다. 사회과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철학과 역사를 경제학으로 버무려 놓은 느낌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단계별로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말하고 사회과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의 방법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충돌하면서 융합된다.

따라서 우석훈의 강의를 들으며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 저자의 생각과 의미를 읽어내기에는 조금 난삽하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사회과학의 구체적 사례와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낸 책이 아니라 이론서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공감과 울림이 적다. 지금까지 우석훈이 보여준 다른 책들과 비교해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강의 자료와 수강생들과의 소통 과정이 드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책에 담겨 전해질 때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 책은 그 점을 간과했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가. 각 장에서 정리된 내용이나 쟁점들 하나하나는 버릴 것이 없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함께 토론하고 공부하고 생각해 볼 문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게다가 짤막한 글쓰기 연습을 통해 다음 장과 연결시키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시도한 장점이다. 읽기와 글쓰기가 한데 어우러진 책은 글쓰기 책이 아니면 찾아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인 흐름에서 이야기의 맥을 짚고 통일성 있게 전개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기존의 이론서에 익숙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은 결국 ‘현실’을 다루는 과학이다. 가설은 가능하지만 실험은 불가능한 사회과학은 다른 학문과 성격이 다르다. 예측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과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담아낼 수 있는 이론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사회과학이 왜 필요한 것인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명쾌하고 분명한 현상과 이론적 잣대가 아니라 우리들 삶의 불가해함에 대한 과학적 접근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류가 축적해 온 수많은 지식과 과학적 탐구 방법이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다만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는 정도가 아닐까.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정글을 탐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책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에 대한 고민을 풀어 놓은 책이다. 대면 상황에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저자의 이야기가 스토리 텔링으로 구체화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저자 특유의 맛깔스럽고 담백한 전달 방식과 분명한 목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어서 계속 그의 책을 기다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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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다른 탄생 시리즈 1
김해완 지음 / 그린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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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가 다른 삶을 살게 한다는 말을, 앎이 곧 자유라는 말을 믿는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소박한 삶에서 나온 믿음이다. - 12쪽

2010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89%, 학부모의 93%는 “4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목적은 당연히 ‘좋은 직장’ 때문이다. 사회,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채 단순 비교는 무의하지만 고교졸업자의 83%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공부’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산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공부중’이다.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공부는 당연히 ‘국영수’ 중심이고 수능이 그 절정을 이룬다. 스무 살이 넘으면 각종 고시와 입사시험이 또 한 번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저력은 ‘고급 인적자원’에서 나온다. 그러나 진짜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줄 서기 경쟁과 객관식 찍기 시험에 목을 맨다. 최근 들어 수시와 입학사정관제로 입시가 다양화 추세를 보이고 서술형 평가의 도입으로 과거의 문제점들을 조금씩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방향성이 없는 교육으로는 먼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다.

다양한 대안 교육이 실험되고 교육에 대한 난상 토론이 이어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은 당연히 사회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 권력과 자본의 획득 과정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좋은 직장’을 위해 오로지 ‘국영수’만 공부하는 교육과정도, 학교교육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중졸 백수 김해완의 『다른 십대의 탄생 :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를 읽다가 여러 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깨달음과 다른 무엇이다. 대안 학교를 거쳐 백수로 살아가는 93년생 해완이가 느끼는 교육과 사회, 사람과 세상은 그대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또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탄탄한 내공을 쌓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을 주는 이 책을 나는 누구에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부분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공공연한 목적이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진짜 대학을 가려고 16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에 가면 또 어떤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살인적인 등록금과 보이지 않은 스펙 경쟁, 높고도 험한 정규직을 향한 싸움 그리고 결혼과 내집 마련, 육아와 교육 문제의 순환 고리 속에 우리들의 삶은 철저하게 끼워 맞춰진다. 경쟁에 뒤질세라 남들보다 뒤처질세라 1분 1초를 아껴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국영수 공부에 목을 매는 현실을 보자.

이런 현실에서 김해완의 책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0.5초간 온 세상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진공 효과를 가져온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구공간 수유 너머’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김해완의 생활과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적 깨달음이 곧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2011년 대한민국의 십대와 ‘다른 십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녀가 인문학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이대로 지속가능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어느 교실 뒤편에 학생들의 희망 학과를 적어 놓은 것을 보니 절반 이상이 경영학과였다. 다양한 삶을 꾸려가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며 걸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가 그 상상력을 제한하고 현실의 발판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점수로 한 줄 세우는 학교,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는 레밍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무지한 자의 배움에 대한 의지를 지속시키고, 그가 자기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 111쪽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학습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지다. - 155쪽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전지전능한 인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고 선생을 만나야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선생과 학생은 함께 길을 걷는 동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관계양상이 달라진다. 스승의 역할은 지식이 전달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고 배움의 의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기막힌 정답 찍기 기술을 가르치고 쉽고 빠른 지식의 습득은 진짜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해완이는 색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는 ‘44만원’ 세대다. 독립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가 않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도 어려울 테고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나아갈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해완이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제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미 속깊은 어른이 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통해 잠깐 김해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승들 중 하나인 고미숙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읽은 책과 그가 공부하는 공간과 그가 꿈꾸는 삶과 그가 걸어가야할 우리 사회가 중첩되면서 환하게 펼쳐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해완이의 다음 발걸음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희망은 학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간판으로 살 수도 없으며 좋은 직장만이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꿈과 희망과 행복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다린다. 또 다른 십대의 탄생을 기대하며.

우리는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온몸으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 독립을 한다. 사랑과 독립은 이렇게 절묘한 이중주를 노래한다. 나와 세상, 나와 너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만난다. -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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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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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념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라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은 새겨 둘만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지식을 얻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명료한 시선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그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며 개념화시키지 못한다. 지식과 정보의 양보다 질을 따져야 한다. 독선적이지 않은 범위 안에서 자신만의 범주와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앎의 세계를 넓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유시민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지식인과 정치인. 이제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느냐는 그의 향후 행보에 달려있거나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스스로 걷는 길도 중요하지만 공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공인의 선택도 그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지식 소매상으로 자처하며 글을 써 온 유시민은 정치적 수사보다 그의 수많은 글을 통해 먼저 만났다. 노무현과 함께 떠오르는 정치인이 되어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이제는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었다.

면바지를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유를 받던 청년 유시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공장에서 찍어낸 어른들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평생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한 벌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학교에 출퇴근했던 아버지처럼 유시민의 아버지도 학교 선생이었단다. 명민했을 어린 시절의 모습, 똘망똘망한 눈으로 책을 들여다보는 귀여운 모습이 떠오른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그가 웃음 많은 장난꾸러기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들고 나온 책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 각인된 유시민의 이미지다. 차가운 철창 안에서 ‘항소이유서’를 쓴 20대의 청년, 경제와 역사와 철학을 넘나드는 지식 소매상, 유려한 문장과 명쾌한 논리로 설득력 있게 독자를 사로잡는 베스트셀러 작가, 진보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차세대 대권주자가 된 정치인.

『국가란 무엇인가』는 지난 겨울부터 그의 트위터를 통해 집필 소식을 언뜻언뜻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큰 틀에서 이전에 유시민이 쓴 책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지식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류가 쌓아온 지적 토양을 자양분 삼아 2011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어 볼 수 있도록 일곱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시작되어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에 이르는 지적 성찰의 과정이다. 대략 40 여권의 책을 인용하고 분석하며 현재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정치, 사회적 토대를 정치하게 살펴보는 유시민의 안목은 명료하다. 파인만의 말을 적용하자면 개념 있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던진 일곱 개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이끌어 냈던 책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란 무엇인가?
- 홉스, 『리바이어던』
- 버트런트 러셀,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 카야노 도시히토, 『국가란 무엇인가』
- 마키아벨리, 『군주론』
- 존 로크, 『시민정부론』
- 애덤 스미스, 『국부론』
- 데이비드 흄, 『도덕감정론』
-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
-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누가, 어떤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가?
-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 플라톤, 『국가』
- 맹자, 『논어』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
-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 에르네스트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
4. 혁명이냐, 개량이냐?
- 헤롤드 J. 라스키, 『국가란 무엇인가』
- 카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Ⅰ, Ⅱ』
-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페의 일반이론』
- 하이에크, 『노예의 길』
5.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 김상봉, 박명림, 『다음 국가를 말하다』
- 이남곡, 『진보를 연찬하다』
- 막스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 프랑수아-자이에 메랭, 『복지국가』
6.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 사회』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7.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박상훈, 『정치의 발견』

맺음말
- 프랜시스 후쿠야마, 『강한 국가의 조건』

이 책들 중 대략 삼분의 일을 읽었고 하이퍼링크 책읽기를 통해 읽어야 할 책 몇 권이 목록에 추가되었다. 인용한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인류의 정치 사상사를 소개받는 책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어찌됐든 책은 책을 부르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과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기 바랄 뿐이다.

용산참사 이야기를 통해 ‘국가’의 의미와 역할을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결국 진보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유시민의 생각과 주장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자유와 정의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약본 표지에 선명하게 손글씨로 인쇄된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가 이 책을 웅변한다. 진보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생각은 ‘국가’에 집중된다. 국가의 역할과 의미를 생각하며 정부와 국가의 관계를 짚어보고 도대체 어떤 정부를 가져야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정치인 유시민의 바람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람의 꿈과 희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책 속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이 책에의 핵심은 ‘진보정치’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연합을 제안하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 막강한 파괴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 향후 유시민의 정치적 행보와 정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의미가 새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이 책을 지식인 유시민의 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의 책으로 볼 것인가. 내용의 갈피들을 살펴보면 유시민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 그리고 개인적 고뇌를 읽어낼 수 있다. 독자들의 판단과 행동은 물론 책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사유과정과 지식 소매상으로서 안내자 역할을 기대해 본다. 그가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 바람은 순진한 독자의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인류의 지적 자산을 섭렵하고 현실 정치에 대해 고민해 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충분하다. 책과 현실, 그것은 영원한 애증의 관계이다. 지식은 실천이지만 현실을 위한 도구로만 볼 수 없고, 책 속에만 갇힌 지식 또한 무의미할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이고 나는 또 어떤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나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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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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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긍정’ 신드롬. 컵에 물이 반쯤 남아 있으면 반밖에 안 남은 게 아니라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 거짓된 신화로부터 잠을 깨는 일은 쉽지 않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비난.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왜 매사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그래서 대안이 뭔데?’, ‘왜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거야?’, ‘그래봐야 네게 득 될게 없잖아?’,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세상 모나게 살지 마’, ‘적을 만들어서 좋을 거 없잖아?’ 주변에서 흔히 들어본 이야기거나 남에게 충고한 말들이 아닐까?

연초에 일본인 작가가 쓴 『긍정의 심리 스위치』에 대해 혹평을 하자 담당 편집자가 덧글을 남겼다. 읽지 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침묵하고 외면하면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고, 적어도 적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택은 잔인한 법.

우리는 평생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교육받는다. 어느 교실 책상 이름표마다 ‘positive mind’라고 써있다. 담임선생님이 권유하는 생각의 방식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비판적으로 사고하라’는 주문은 교육과정이나 국어교과서에서 ‘비판적으로 읽기’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든 단어다.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긍정’이 ‘희망’으로 치환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암묵적으로 긍정적이라는 말은 희망적이라는 말로 전환되며 비판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이라는 뉘앙스로 인식된다. 과연 그럴까?

유방암 판정을 받고 온통 미국식 긍정주의를 경험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은 너무 늦게 나온 책이다. 알맹이 없는 『생각버리기 연습』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사람들에게 치열하고 깊은 고민 대신 운명에 순응하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세상사를 외면하며 내 마음의 평화를 찾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긍정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았기 때문에 생긴 용기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긍정’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나 마약에 비유한다. 정말 마음이 달라지면 현실도 달라질까? 냉정한 자기 분석과 합리적인 상황파악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계획조차도 ‘긍정’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시크릿』,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시멜로 이야기』 종류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며 스스로 조금만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성공이 보장된다는 믿음이 마치 또 하나의 종교처럼 보인다. 손해 볼 건 없으니 어차피 똑같은 결과라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나쁜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불안과 공포에 기댄 긍정이 과연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미국의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토론과 창의성을 키우는 대신 오지 선다와 정답을 요구하는 수능시험. 획일적 사고와 체제 순응적인 교육의 틀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버릇없음’, ‘교사에 대한 권위 도전’, ‘삐딱한 시선’ 등으로 치부한다.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문화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작 가르쳐야 할 것은 잘못을 외면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력과 냉정한 비판의식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실천의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낙관주의의 어두운 뿌리를 들여다본다. 역사적 배경을 통해 불평을 금지하고 긍정심리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기업, 종교, 학계에서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산업화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일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적당한 판단은 미뤄두고 어떤 현상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해 보자. 우리는 비합리적인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뇌’는 늘 거짓말을 하고 생각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낙관과 긍정의 힘이 인간의 삶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의 말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가 종교처럼 받들고 있는 돈의 힘, ‘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신화처럼 굳어진 긍정과 낙관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지, 문제가 있는 것인지 논란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말대로 ‘긍정적 사고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의무가 되었다’(140쪽)고 생각하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이 책은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거꾸로 문제의식을 갖거나 왜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게 아닐까. 나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 긍정과 낙관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가슴이 아닌 머리가 하는 이야기도 들어보자. 머리로만 살 수 없어도 맹목적으로 가슴만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110419-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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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들은 이렇게 읽었다! -
    from 도서출판 부키 2011-04-26 16:52 
    긍정의 배신 독자 리뷰 모음 독자들은이렇게 읽었다! 긍정? 혹은 부정? 편집자 주 : 책이 출간되면 가장 기다려지는 건 독자들의 반응입니다.긍정의 배신의 경우판매량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독자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내심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왜긍정의 배신은 독자 리뷰가많지 않은 거지? 하며간단한 논의를 하기까지 했어요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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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미세한 감각이 발 끝에 전해진다. 그러더니 속도가 줄고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낭패. 다행이 차량이 뜸했고 금방 갓길에 세울 수 있었지만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엔진의 피스톤 운동시 밸브의 타이밍을 조절하며 연료를 조절해주는 벨트가 끊어진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견인. 누가 10분 후를 예측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인터체인지 입구 카센터에 내려 길가에 심어 놓은 수선화를 한동안 들여다본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봄햇살을 받으며 노란 꽃을 피운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릴없이 다음 일정을 조정하며 오랜만에 무료한 정적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천양희의 시를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많은 시인이 있으니 수많은 시가 명멸하고 읽히지도 않고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에서 천양희 시인은 축복받은 시인이 아닌가 싶다.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시부터 서정시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시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도 시는 여전히 제 갈길을 걸어보지만 독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는 언제까지 쓰고 읽히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전자책의 매출이 종이책을 처음으로 앞질렀다는 충격적인(?) 소식 때문일까, 시는 더욱 아득해진다.

새가 있던 자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오나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모든 문학은 개인적 상황과 감정에 이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 문학인 이유는 현실 밖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배설구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창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천양희의 시를 읽다가 문득, 호흡을 가다듬고 한동안 상념에 빠지거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되새긴다.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세상에 참 좋은 말은 얼마나 많은가. 풍성한 말잔치를 통해 그럴듯한 이미지와 언어유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시는 독자의 직, 간접적 경험과 조우하는 순간 오롯이 가슴에 새겨진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다양하다. 시집 한 권을 통해 시인의 생각과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고 한 편의 시에서 단 한 구절이 평생 가슴에 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위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우두커니 봄이 가고 여름이 올까? 그리고 내년이 오고 십년이 흐를까?
나는, 우리 모두는 어처구니가 아닐까?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굴우굴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나이와 세월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 아니, 젊다면 쓰지 않을 시도 있는 법이다.


순서가 없다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고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고
어느 시인은
기막힌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어느 선배는
의젓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마음은 잡아도 잡아도 놓치고 마는 것
너무 고파서 너무 놓쳐서
사랑해를 사냥해로 잘못 읽은 사람도 있다고
나는 말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은 위대한 것이라고
슬픔에게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다시 어느 시인은
피 같은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삶에는 대체로 순서가 없다

*황지우의 시「피크닉」에서.


한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시집은 한 시간만에 읽는 짧은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어야할 의미로 가득해야 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들은 무엇보다 오래오래 생각하며 읽게된다. 나만 그런가?

생각은 강력한 마약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다
생각하다 흩어진다
생각이 화근이 된 뒤부터
가끔 생각 없이 하루쯤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
생각 어디에 고비가 있는 것도 같다
세상에 생각처럼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의 중독
생각하다 사람들의 깊이 괴로웠으므로 웃음을 고안했고
깊이 생각했으므로 신은 죽었다고 폭탄선언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껌처럼 씹다 뱉고
생각이 우산처럼 폈다 접힐 때
생각 끝에 나는 겨우
백사장에 생각 짧은 치욕을 썼다 지웠다
한줌 모래가 어찌
하루에도 천년을 사는 생각만 할까
생각해보면
나를 살게 한 건 생각 끝에 나온 생각이다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
생각에 기대 시를 생각해내는 밤
생각은 오늘 나의 다짐이니
생각은 나를 따르고 시를 뒤따른다
바닥까지 생각의 허리 구부리고
이제 막 시 한짐 밀고 갈 시간이다
생각에는 먼 것이 있고
나에게는 생각이 있다


오늘도 옷깃을 여미며 하루를 살았다. 기약 없는 내일이 다가온다.

옷깃을 여미다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11041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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