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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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재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흔히들 ‘세계 속의 한국’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단순한 작업 중에 하나가 ‘역사’에 대한 재평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하나의 통일된 관점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견해와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사관에 따라 잘못 씌어진 역사에 의해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진 우리 역사에 대한 편견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활발한 토론과 자기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제도와 시스템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맹목적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현실에서 ‘역사’ 교육은 특히 그러하다. 일단 주입된 사관은 스스로 깨치고 확인하기 전에는 고스란히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고착된다.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단일 민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의 단일성을 쉽게 떠올리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 275개 성씨 중 136개가 귀화 성씨라는 사실은 ‘한핏줄’을 무색케 한다. 한 나라의 민족의식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며 혈연 공동체를 넘어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 공동체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선 민족은 의미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비교 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우생학적, 역사적 우월감은 그 근본 뿌리부터 현재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전 세계에 대한 편견과 아집으로 고정될 우려가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섣불리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매몰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위정자들은 민족과 국가를 내세워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해 왔다. 그 민족과 국가는 일부 특권층과 권력층의 직권남용과 공인된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가면으로 민중들을 현혹시켜왔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위험성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교훈과 경험들은 우리를 소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다양한 이념들이 가진 의미를 확인하는 일은 미시사를 연구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민족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 속의 한국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선행한다.

  ‘한국 속의 세계’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하다. 이 책은 냄비처럼 들끓었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한겨레 신문사에서 기획한 대국민 홍보용 내지 우리 역사 바로 알기 혹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우월감 고취하기의 일환으로 연재됐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술과 사실 확인 차원에서 냉정하고 정확하며 꼼꼼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통시적 관점을 넘어서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 옷감을 짤 수 있듯이 단선적인 역사 서술이 1차원라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2차원적 관점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며 세계사와 맞물려 납득할 만한 구체적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말고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과정에서부터 이런 작업이나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외침과 방어 생존과 독립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는 처절한 고통의 역사로만 여겨진다. 내가 받은 역사 교육은 그렇다. 그러면서 끝까지 잘 버티고 용케 살아남았다는 느낌으로 끝이었다.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가지기 위해 그렇게 서술되거나 가르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저자가 고민했던 부분은 기준은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명교류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짤막한 연재물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역사적 흐름이나 연속선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한 책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소설처럼 작은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 각개 전투하는 방식이다. 몰랐던 사실을 아는 즐거움과 우리 역사에 대한 닫힌 관점을 열린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왜곡 부분과 일본의 임나일본부, 칠지도에 대한 저자의 격한 목소리는 다소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만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의분이라고 본다.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정도라면 단점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재미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견해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안목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타임즈』에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1897. 9. 17)는 이야기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으로 각인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기적 민족주의나 국가 우월주의의 위험성을 걷어 낸다면 우리 민족과 국가도 ‘관계’ 속에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는 역사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 필요한 책이다. 서로 다른 문명들의 삼투압 작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살아온 인류에 대한 확인 작업이 단편적이지만 분명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060225-029(상), 030(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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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문학,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
김성곤 지음 / 산처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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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진부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그 어려움에 관해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문학의 성격과 본질은 인간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인간의 삶은 계속되었으며, 문학적 글쓰기도 계속되었다. 문학은 인간이고 삶인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형식과 내용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전시대에 대한 반발과 그 반발에 대한 대안으로 이어진 문예사조는 예술사의 흐름과 더불어 인류의 삶을 들여다보는 만화경과 같다. 그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치열한 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고민하고 인식하는 모습들이 곧 인류가 걸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산처럼에서 나온 <사유의 열쇠 - 문학>은 박이문의 ‘철학’편에 버금가는 구성과 내용을 담고 있다. 영문학자의 눈으로 평생 문학을 연구한 연륜과 사유의 깊이가 행간에 묻어난다. 문학 용어 사전이 아니기 때문에 문예사조부터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 용어까지 포괄하고 있어 문학사를 일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루하고 논쟁적인 역사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6부로 구성된 내용속에 최근의 현대 문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각각의 개념과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찾아 읽어도 좋을 법한 문학사전이지만 처음부터 전체를 조망하며 읽어나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포스트 시대의 문예사조들과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시도된 형태의 다양한 문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한 권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이퍼텍스트에서 테크노 픽션, 크리티 픽션, 그래픽 소설 그리고 판타지 문학에 이르기까지 가장 최근의 등장한 문학 형태에 대한 소개는 정보 차원의 소개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문학이 나아갈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 단순한 이론 설명을 위한 나열이 아니라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내적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피드백 과정을 거치도록 스스로를 독려하면서 읽어나간다면 책이 주는 내용 이상의 즐거움과 색다른 사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살아오면서 문학에 대해 단편적으로 축적된 지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도 있고, 문학 전공자라면 소홀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울러 한 번 잘못 기억되거나 오해할 수 있었던 개념들에 대한 간단한 확인과 지식의 점검이 필요하기도 하다. 문학에 대한 이론과 지식, 개념과 용어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은 소설무용론과 같다.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과 삶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학과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 인류의 삶을 돌아보라고 충고하는 듯 하다.

  책의 마지막 6부는 문학과 신화라는 부제를 달고 ‘신화의 현대적 해석’, ‘헤라클레스’, ‘아라비안 나이트’의 짤막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다른 장르와의 관계와 겹침을 확인하고 중첩되는 용어와 개념들을 이야기하자면 한권으로 너무나 부족하다. 양념처럼 들어간 마지막 장은 사족처럼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소홀하게 다루어야 한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벗어나 있다.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기본에 충실하도록 다른 장르와 분야에 할애하거나 나머지 장들을 충실하게 보완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더불어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여전히 서구 유럽과 미국 문학 중심의 문예이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함께 언급하고 참고하고 문학작품의 경우 그 예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또한 우리 문학에 대한 언급과 관계에 대한 설명이 단 한줄도 없다는 것은 더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작은 책 한 권에 욕심을 낼 수 없지만 문학사전이라는 출판 목적에 충실하도록 좀 더 세심한 배려와 내용 설정에 대한 고민도 병행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와 독특한 구성, 내용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잡다하고 방대한 이론 설명이나 난해한 개념을 더 어려운 용어로 설명하지 않은 점은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이제, 직접 그 작품들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손도 대보지 못했던, 혹은 아련 기억속에 묻혀 있던 작가와 작품들을 언제든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보는 일은 물론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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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평등으로 - 인권을 위한 강의
김동춘.한홍구.조효제 엮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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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꿈을 꾸면 일장춘몽, 남가일몽, 한단지몽, 호접지몽이 되지만,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내가 꿈꾸는 현실은 타인이 꿈꾸는 현실과 다른 것이 항상 문제가 생기고 충돌이 발생한다. 편견과 선입견이란 이름은 다수에 의한 비중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항상 내게 던져 주었던 모든 것들이 편견을 넘어선 곳에서 자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원론적 문제에 부딪히면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항상 반복되는 순환론의 고리가 연결된다.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다시 돌고 돌아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쉽사리 ‘편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 민주주의 원칙을 원용한 절대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도 궁금해진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합의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이기적인 삶과 금밖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가 없어질 수는 없다.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늘 이런보다 실천이, 원론보다 각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한 풍찬노숙을 견뎌내며 흰수염을 휘날리는 문정현신부님같은 분의 행동은 그 어떤 웅변보다 많은 말들을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믿는다.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라는 책은 참 난감한 책이다. 김동춘, 한홍구, 조효제가 엮은 책이라면 안읽어도 뻔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뻔하다. 그 뻔한 사실들을 우리는 왜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너무 뻔해서일까? 몰라서일까? 귀찮아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내게 이익으로 돌아올만 게 없어서?

  평등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평등을 바라보는 관점과 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여기에 늘어놓는 것도 의미 없지만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하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에 따라 많은 말들이 오간다. 단순하게 정리해보자.

  인간이 가져야하는, 가질 수 있는 권리와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순간들을 굳이 외면하면서 살아온걸까? 내가 그 인권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걸까? 그 인권을 빼앗기며 살아온걸까? 참으로 감상적이고 주관적 태도에 빠지기 쉬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기초교양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집필의도와 목적이 분명하고 오래동안 인권운동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필진들에 의해 쓰여진 책은 분명 실천적인 냄새가 강하다. 무모하거나 이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논할 수 있는 인권에 대한 정의가 우선 분명하다. 시민사회와 인권의 문제를 동양문화권에서 살펴보고 서양과 다른 현실상황을 짚어보고 소수자와 장애인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초점을 다양화하면서도 하나로 모아내고 있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순간에 나를 바꾸지 않으면 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모든 갈등과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냉정하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은 더욱 어렵고 힘들다. 편견과 평등은 중지를 모을 일이지만 개인의 의식과 사회 ․ 문화적 토대가 쉽게 바뀌지 않는 어려움속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떠오르는대로 쏟아내는 것도 지나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한 순간이 될 것이다. 시작해보자. 여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항상, 나를 인정하듯이 너를 인정하고 이론적 논의와 정책적,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보완에 앞서 의식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또 반복할 필요는 없다. 억압과 문화를 앞세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지구 곳곳의 현실보다 먼저 내 주변을 돌아본다.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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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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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 P. 148

  마술이나 환상을 믿고 싶은 사람들은 현실을 향한 욕망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든, 욕망이라 부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능성과 개연성을 뒤로한 채 꿈을 꾸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그 욕망의 공통성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욕망을 넘어 생에 대한 열정이 되고 시간의 흐름을 더불어 한 개인의 속성이 된다. 현실에 대한 다양한 인식 방법과 욕망의 표출 방법은 감춤과 숨김으로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감춤과 드러냄의 누빔점에 소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버린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누런 표지를 가끔 물끄러미 바라본다. ‘책읽기’는 과연 행복한가.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글에서 김현은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이 대립하는 접점에 위치한 호기심의 자리에 놓인 소설은 여전히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형태의 관음증을 제공한다. 살아보지 않은 생에 대한 열망과 내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절망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즐기기도 하고 안도하며 현실속의 나와 끝임없이 차별화하거나 동일시한다. 감정이입은 시에 사용되는 표현기교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하는’행위의 기본적 속성이기도 하다.

  <마이너리그>이후 오랜만에 접하는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스토리보다 서사구조가, 문체나 구성보다 짤막한 단상과 생에 대한 잠언적 경구가 돋보인다. 독자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생을 통달한듯한 격언을 던져넣는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장 속에 어색하지 않게 툭툭 던져지는 말들이 예민한 감수성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단아함을 넘어 투명한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함을 소설들에서 찾을 수 없는 단면을 보여준다. 제 색깔을 드러내는 과정인 작가의 목소리는 강경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흡인력과 탄탄함이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진다. 소설 속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비밀과 거짓말>은 치정극도 아니고 멜러물도 아니다. 영준과 영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확인하는 생의 비루함이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든 ‘생’은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거나 더럽지도 않다. 그게 그저 사람의 생일 뿐이다.

그 애가 감추려는 데 진실이 있어요. 때로는 거짓말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구요. 거기 붙여놓은 비밀이라는 봉인을 떼지 마세요. - P. 162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일말의 의심도 의혹도 없이 모든 사람이 믿어버리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은 진실인가. 봉인을 떼지 말라는 소설 속 전언은 현실에 적용될 때 더더욱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미칠 것 같은 일에 분노하지 말라.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 거짓이 사실보다 더욱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사람들이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오래 음미하는 대신 밑줄을 그어보고 머리와 가슴을 지나 손끝에서 처리되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

  죽음이 모든 진실을 밝혀주지도 묻어주지도 않는다. 생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스런 많은 사람들과 말과 글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소설보다 아름다운, 혹은 소설보다 강렬한 비밀과 거짓말이 숨어 있다. 퍼즐처럼 조각난 생의 비밀들 속에서 아직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영준과 영우의 아버지 정욱에 대한 사실들은 이 소설이 전하는 진실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다. 소설 속의 영화로 제작되는 ‘비밀과 거짓말’이 전하는 진실은 숨은 그림처럼 모두의 가슴속에 숨어 있다. 주변을 돌아보라. 그리고 거울을 보라.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 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 283


0603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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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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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 덩이들을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르르 깨지더니,

참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 하나가 되었다.

  오랜만에 나온 강은교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서시다. 하나되는 사랑, 분개하던 나와 네가 만나 하나되는 아름다움이 이 시집의 전하는 메시지다.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각자 주장하는,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느껴지던 그 아름다움은 나의 존재 방식이기 이전에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한다.

  <허무집>과 <풀잎>, <빈자일기>로 이어지는 강은교의 시의 절정은 더 이상 예민한 촉수와 감각적이고 치열한 정신을 동반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혼란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강은교의 시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까. 시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참신한 감각과 전통에 대한 관심은 편안하지만 즐겁지 않다. 특히, 3, 4부로 모아놓은 가야 소리집과 행사시들은 깊이있는 울림보다 전통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어울림 정도로 그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는 않는다. 풀잎에서 보여주던 명징한 언어도 깊은 성찰도 희미해져 간다는 것은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희미해져가는 빈 자리를 채워가는 다른 방식이다.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시인의 몫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떤 변화인가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것은 독자의 즐거움이다. 그 변화와 태도가 긍정인가 부정인가는 시인이 선택할 몫이고 독자가 평가할 몫이다. 다른 시인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가 강은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은 ‘소리’이다. 귀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고요 속에 빛나지 못하는 침묵은 또 다른 소음이다. 시인은 ‘소음’과 ‘침묵’ 사이에 서성거린다. 귓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은 특정한 소리에 대한 호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가 없는, 침묵은 또 다른 소리이다.

목도리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지금 누구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듯 영원한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관조적 자세다. ‘마치 내 목에 그랬던 것처럼’ 상황과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건조하게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가 메마르다.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보다 상상에 근거한 목도리의 행위가 주는 비애는 배신감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깝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비온 뒤에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진흙처럼 좀체 떨어져 나가지 않는 지긋지긋한 그리움과 지금, 이 순간에 가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날은 가까운 미래이거나 과거의 어느 날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사랑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때 몰랐’던 것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미완성의 문장이 긴 여운보다 무미건조한 모래 바람을 일으킨다.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의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0603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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