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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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암기가 아니다. 하지만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여사를 암기 과목으로 기억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 있는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사실들을 기억하기도 바빴다. 시험을 목적으로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다. 그러나 역사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와 같다.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얼마나 지루한 흑백 화면인가.

  한 나라의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원시시대에서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현대의 순서대로 역사를 서술하는 직선적 역사서술은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데 유용하지만 졸음이 쏟아진다. 이런 통사류의 역사는 수없이 많다. 평면적인 서술 방법에서 벗어나 입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책이 주목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세계사이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를 내세웠다.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가 그것이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선 욕망은 물질과 동경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쓰였다. 커피와 홍차, 금과 철, 브랜드와 도시를 중심으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조망한다. 서양 근대화의 힘이 되었던 모더니즘, 군주들의 영토확장에서 비롯된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을 몬스터로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세계사의 중심에서 서 있었던 종교를 통해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20세기가 전문가를 필요로 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통합적 지식인 즉 백과사전적 지식인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학문간 경계를 넘어 창발적 사고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단편적인 지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정보는 흘러넘쳐 주체할 수가 없다.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하고 정확한 것들을 수렴,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이 미래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굴러왔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세계사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과 관점은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를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어떤 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관점에 따라 문제의 원인을 달리 진단한다.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도 다르다.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은 바로 이런 통찰력을 기르는 데 있지 않을까? 결국 역사는 인간의 삶이다. 역사는 중심에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은 물론 행동 양식과 삶의 패턴을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 세계사를 읽는 즐거움 인류의 발자취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사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설명이 명확하다. 구체적 지식이나 복잡한 흐름에 연연하지 않고 재미있고 즐겁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다섯 가지 힘’과 ‘인간의 감정’을 통해 역사를 읽는다고 선언한 말이 빈 말이 아니다.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말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저자는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낚시대를 제공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한 권의 책에 대한 높은 평가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나 이 책은 다른 책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역사도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세계사의 지루한 흐름도 필요하다. 흥미와 신선함 측면에서만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세계사에 관한 다소 딱딱한 통사적 흐름이라도 읽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읽어 둘 필요가 있다. 이 책 한권으로 세계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둘째, 다양한 관점을 읽혀야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외에도 세계사를 지배한 힘은 여러 가지이다. 그 핵심 키워드는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저자의 관점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름의 기준과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책을 풍요롭게 읽어내는 좋은 방법이 된다. 마지막으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설을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세계사의 흐름과 사건을 저자가 이해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역사는 해석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역사에 관한 다양한 관점의 책들을 읽어두면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저자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조금씩 다른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도 사건도 그러하다. 사랑은 영원히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말도 그렇다.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 수만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한다. 역사학자의 관점이나 깊은 지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지금-여기’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읽는 진정한 이유다.


10022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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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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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잊고 지내던 첫사랑이 생각난 것처럼 반갑게 ‘최승자’를 만났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즐거운 일기』를 통해서였다. 시를 쓰며 살아보겠다는 꿈을 꾸던 무렵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오규원이나 최승자, 이성복, 황지우, 정호승을 만나면서 시인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허접한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최승자의 시가 하나의 세계로 보였다. 살리에르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낭패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서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았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표제작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을 떠올린다. 당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냉소와 반어가 발랄하게 튀어 오른다. 그 젊은 시인을 다시 만나는 일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나이 들어 많이 아팠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기운찬 울림이 아니라 멀고도 쓸쓸한 세계의 침묵을 보여준다.

  영원한 삶은 없다.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 모든 작가가 한번쯤 부딪치는 문제겠지만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저기 저 ‘먼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이거나 자웅동체처럼 한 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혹은 한 세계를 완전히 잊고 산다. 곧 만나게 될 그 세계를 완전히 외면한 채.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시인은 세월의 학교를 졸업한 모양이다. 그래서 ‘바다는 바다, 섬은 섬’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다만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이다. 우리도 그런가? 걱정인가 바다가 커져서? 나는 무슨 바다를 건너려하는가?

  쓸쓸하고 머나먼 세계를 인식했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만큼 살았다는 말이다. 넓고 큰 이치와 흐름을 읽어내고 작고 누추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본다. 해가 지는 푸른시간과 하늘이 없는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보다 끔찍하다.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다변이 달변은 아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온몸으로 진실을 드러내듯 그렇게 시간과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자명해질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은 지금, 현재를 즐길 줄 모르고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죽음을 말하듯 원론과 원론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울타리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라질 것들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자괴감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는 지당한 말씀.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돈이 되어버린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삶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흐린 날에는 주막에 앉아 한 잔 술을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먼 하늘에 상현과 하현을 구별하지 못해도 달이 둥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 만월과 초승달은 하나다. 차고 기우는 자연의 이치는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흐린 날, 달은 어떻게 바라 볼 건가. 그래도 어디엔가 달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

흐린 날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10022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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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보는 한국여자 -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상의 심리학
문은희 지음 / 도서출판 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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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였을까, 여자와 남자가 달라진 때가. 아니, 처음부터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건 아닐까? 경험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것은 모두 안다. 이론적 바탕도 논리적 설명도 필요없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생물학적 지식보다 선험적 인식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성의 차이 즉,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을 평생 간직하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런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문화적 성역할에 의해 자신이 인식하는 성(gender)은 차이가 많다. 눈에 보이는 차이와 보이지 않는 차이만큼 간격이 큰 sex와 gender.

  세상의 모든 여자는 우리의 어머니이고 누이가 아닐까 싶다. 여자를 무조건 사회적 약자로 분류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차별적 시선과 의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문화적 차이 때문에 남자와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여성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름과 틀림을 인식하지 못하는 편협한 시선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 과격한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모순과 문제가 많긴 하지만 그들이 견뎌온 굴종의 시간과 아픔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다만 여성의 문제를 감정적, 온정적 태도에 의지해서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성학은 이제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등에 깊이 탐구한다. 본격적인 여성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남자와 다른 여자의 심리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문익환, 문동환의 여동생 문은희. 오빠들에 가려 유명인사라고 볼 수는 없지만 문은희는 이 땅의 여성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주고 치유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듯하다. 의대에 입학했지만 결국 심리학 박사로 끝난 특이한 이력이 주목을 끈다. 저자는 할머니라고 불릴 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맑고 푸르다. 그의 영혼은 청년을 보는 듯하다. 생물학적 성(sex)이 아닌 사회적 성(gender)이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이며 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드럽게 알려준다.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상의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문은희의 『눈치보는 한국여자』는 사단법인 알트루사(국제여성단체)의 집단상담모임에서 심리 치유를 목적으로 쓴 글들을 모았다. 이 책에서 특이한 점 한 가지는 여성을 ‘니’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니, 어머니, 할머니, 아주머니’ 등 여성명사에 ‘니’라는 접미사가 흔히 사용된다. 한자말 대신 사용한 ‘니’가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이 책은 니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와 니를 중심으로 한 관계 양상을 풀어낸 책이다.

  짤막한 글들이지만 결국 그 무게와 깊이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준엄한 가르침도 정교한 논리도 아닌 따뜻하고 고운 우리말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이론과 합리적 근거가 없는 감정적 위로라는 말이 아니다. 순 우리말의 사용과 어려운 이론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고도 그렇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서 길어올린 지혜는 요란하지 않고 담담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럽고 소박하다. 문은희의 글이 그러하다. 전체 4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하지만 결국 나를 넘어서야 하며 관계 속에서 나는 완성된다.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나는 시민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햐 한다. 저자는 이 말의 차이와 간격들을 잘 알고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분야가 어떤 곳이든 조금씩 발을 디뎌야한다.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허명과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자리만 지키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퇴보이다. 문은희는 한국여자에 ‘눈치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뜻에 따라 나의 말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은 결국 불행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낳는다. 한국 여자들이 눈치보는 대상은 무엇이며 무엇일까?

  출판사를 만들어 도서출판니로 이름붙였다.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이 쉽진 않겠지만 200여 페이지를 읽다가 만난 하얀 백지는 내 머리를 비우게 했다. 파본은 있을 수 있지만 전혀 표나지 않는 백지 - 그것도 무려 7페이지 - 는 읽는 사람을 황당하게 했다. 실수를 줄이고 조금 더 신경써서 책을 만드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신경써야 하는 이유는 때때로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은희가 들려주는 한국여자 이야기는 슬프다. 조금 더 자신을 찾고 스스로와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상황과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것을 앞세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일단 스스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과 근거를 마련하자.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여자라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아픔과 슬픔을 달래주는 위안과 평화의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1002180 -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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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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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혹은 자유

  아침이 밝아오는 동편 하늘 혹은 해질녘 서쪽 하늘을 물들인 빛의 산란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바늘 하나 꽂을 곳 없는 세상에 태어나 반복적인 일상과 힘겨운 생존의 몸부림. 모두 같은 꿈을 꾸는 세상은 불안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의 무지개를 그려보지만 만만치도 않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박민규는 이렇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는 신현림에 말을 행동에 옮기고 있는 몇 안 되는 지구인처럼 보인다. 스스로를 ‘무규칙이종소설가’로 규정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우리는 그의 일상과 내밀한 정신세계를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소설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작가를 이해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한 개인에 관한 궁금증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조금 더 잘 읽어보려는 의도이거나 작가가 말하는 세상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문법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소설을 만나면 독자들은 불편하거나 극단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일탈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현실 밖의 세상을 동경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이 아닌가. 현실에 발 딛고 비상(飛翔)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 세계를 경험한다. 지극히 이성적인 일탈 혹은 몽환적 자유.

  박민규의 소설들은 ‘틀’을 버린다. 2010년 34회 이상문학상작품집 『아침의 문』은 ‘이상(李箱)’의 문학정신을 가장 잘 반영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수상했던 어떤 작가보다 이 상에 가장 어울리는 수상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그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들은 그가 앞으로도 일탈의 환상과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일상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힘들여 쓰지 않는 그의 소설을, 어깨를 긴장시키지 않는 그의 문장을 킥킥거리며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희망과 환타지 너머

  수상작 ‘아침의 문’은 자살사이트에 만난 사람들의 동반자살 실패가 시작이다. 물론 죽지 못한 한 사람이 문제다. 생을 긍정한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의 끝에서 만나야 할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소설은 주제는 물론 그 이유를 찾는 데 있지 않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살은 삶의 그림자 놀이?

  사람들은 오늘을 사는 이유가 내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이다. 외면하고 싶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은 때때로 우리의 목을 조른다. 아무생각 없이 매일매일 행복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박민규는 육하원칙에 따라 주인공의 일상을 명백하게 밝히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직업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비정규직은 아닐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존재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이 생을 살다가 사라진다. 생명의 탄생만큼 신비한 죽음의 세계는 늘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다. 외면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박민규는 죽음의 입구에서 탄생을 바라본다. 그것은 생을 긍정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비루한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위안이다. 자선 대표작으로 뽑은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가 바로 이 일상의 권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희망 없는 오늘을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민규는 희망 없는 희망은 가능한지 묻고 있다. 보이지 않는 혹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일탈을 시도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차라리 눈물겨운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위로와 공감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밖의 것들은 또 다른 소설을 통해 확인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 시작이라고 소설 쓰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박민규의 문학적 자서전을 읽으며 ‘ㅋㅋㅋ’. 꿈없는 청춘, 희망 없는 일상, 3류 들의 고통을 즐겨 보여주는 박민규에게 희망이나 환타지가 아니라 그 바닥을 보여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어설픈 사회소설이 어울리지 않는 박민규에게 우리는 적나라한 현실과 차마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기분이 든다. 조금 더 철저하게 혹은 더욱 더 환상의 세계를 보여 달라고 조르고 싶은, 박민규의 힘을 믿고 싶다. 우리에게도 박민규는 필요하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달라.


주목할 만한 소설가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단편 중 ‘통조림 공장’과 윤성희의 ‘매일매일 초승달’은 수상작으로도 손색없다. 소설적 완성도 면에서 이미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 듯 싶다. 독자들의 개인적인 취향이 있겠지만 소설의 다양성, 실험성을 고려하더라도 두 작품은 단연 돋보인다.

  전성태의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이야기의 힘 즉 서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다.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의 실험성은 커다란 울림을 주지 못했고 손홍규의 ‘투명인간’과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는 일상의 문제를 지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단편으로 읽혔다.

  이상문학상이 갖는 권위에 눌려 호기심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평소 우리 소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다같이 즐기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말에 방영되는 텔레비전의 각종 시상식의 절반만큼이라도 문학상과 책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쯤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모든 작가들의 건투를 빌빈다.


100207-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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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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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사랑에 관한 연구』(P. 38),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여자 그리고 사랑

  사랑은 본질적인 자아와의 만남이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벗고 내 존재의 심연과 마주하는 일이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근본적으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취향이 아니라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위태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통해 본능적으로 현실에 적응적인 여성들을 보여주었다. 그녀들의 이기적 욕망과 계산적 사랑에 대한 냉소는 작가가 만든 허구가 아니라 우리들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일 지도 모른다. 김연수도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통해 사랑과 현실 사이의 비루함을 경쾌하게 보여준 바 있지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를 통해 사랑과 이상의 보편성에 접근하고 있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수많은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은 이야기의 가장 풍요로운 주제가 되었으며 인간 삶의 가장 큰 바탕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론 그러하다.

  고종석은 소설을 쓰고 시를 읽어주고 현실을 분석하다가 때때로 언어의 정밀함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고종석의 여자들』은 두 가지를 유의하며 읽어야 한다. 하나는 고종석이며 또 하나는 물론 여자들이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자이노파일(gynophile)은 여성애호 혹은 여성취향 정도의 뜻으로 해석된다. 고종석의 글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책을 읽으면 되겠지만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오해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또 한 하나는 여자들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34명의 여자가 고종석의 여자들이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가 들려주는 여자 이야기는 누구나 흥미 있게 들을 만하다. 취향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여자와 사랑, 참 어렵다.


섹스(sex) 혹은 젠더(gender)

  생물학적 성인 섹스(sex)와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는 이 책을 이해하는 관점이 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현실적이지만 이성적 사랑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그것은 우열과 선악의 가치 판단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차이일 뿐이다. 통상적으로 유전적 본능과 심리적 진화의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성역할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교육과 사회화의 과정에서 여성으로 길러지고 내면화되는 여성성은 올가미가 되어 순종과 억압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섹스와 젠더의 차이는 고종석이 말하는 자이노파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고종석은 생물학적인 섹스가 아니라 젠더로서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때때로 이분법적 구별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자로 길러지는 과정에서 부딪쳐야 하는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더구나 시대 현실, 사회적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이었던 과거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그런 여성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혁명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한없이 여성이 되고 싶었을 그녀의 삶에 대한 고종석의 연민어린 시선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도 작가의 관심은 여성성과 사회적 존재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여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고종석의 여자‘들’

  한 여자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을까. 이 책에 아니 고종석에게 선택받은 서른 네 명의 여자들은 흥미롭게도 윤심덕과 최진실을 제외하면 대중예술을 통해 환상과 꿈을 심어준 여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노래와 춤 혹은 연기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여자 사이에는 그만한 간극이 있는 것일까. 특이한 두 명의 이야기는 ‘자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고종석의 여자들은 역사 혹은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여자들이다.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호기심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책에 소개된 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익숙치 않은 여성들도 있지만 측전무후, 임수경, 오프라 윈프리에 이르기까지 생존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자들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시대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삶에 대한 열정과 뚜렷한 신념을 가졌던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의 삶은 오히려 간결하고 단순하다. 범접하지 못할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능력의 유무를 떠나 삶의 자취에 향기가 묻어나고 열정의 깊이에 감탄할 만한 여자들이 소개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그녀들을 바라보는 고종석의 눈을 빌려보는 데 의미가 있다. 고종석의 선구안과 문체는 고종석을 이해하고 그녀가 선택한 삶을 긍정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책이 작가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객관적 시선과 보편적 정서를 끌어 낼 수 있다면 읽을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수필 형식의 짤막한 글들이 완성도 높은 전체 구성을 염두해 둘 수는 없다. 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모은 책이 가진 한계가 서른 네 명의 매력적인 여자들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책의 말미에 고종석의 친구 황인숙과 강금실의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어 반갑기도 했고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에 공감하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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